38화.
“이번 주말 말입니까?”
내 뜬금없는 제안에 이안이 스푼을 내려놓고 되물었다.
나는 입매를 매끈하게 끌어 올리고선 그를 향해 자신 있게 끄덕였다.
“네.”
물론 이안이라면 보나 마나 거절의 의사를 밝히겠지만, 오늘은 그것에 대비해서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10개쯤 준비했다.
아리아 소식지가 저렇게까지 우리를 주목해 준다는데, 얌전히 있으면 그거야말로 낭비 아닌가?
‘어디 내뺄 수 있으면 내빼보시지.’
재빨리 반박할 준비를 하는 동안 이안의 입이 열렸다.
“그렇게 하시죠.”
“물론 번거로우시겠지만 일전에 대공께서 주말은 저와 함께 보내기로 하신 데다가, 저번 주 시즌 파티… 네?”
“그렇게 하시라 했습니다.”
준비한 말을 속사포처럼 뱉던 내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에 반해 이안은 뭐 그런 눈으로 자길 보느냐는 표정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순순해?’
시즌 파티에 갈 때처럼 이유가 있냐는 둥 스케줄 검토 후 생각해 보겠다는 둥 해야 하는 거 아냐?
갑작스러운 태도 전환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진짜 죽을 때 됐나?’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이안은 날 빤히 보고 있었다.
그가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일 때마다 통창으로 들이친 아침 햇살이 자청색 눈동자 안에 눈부시게 들이쳤다.
그 와중에 미인계 장난 없네.
“문제 있습니까?”
“…아뇨, 딱히 문제는 없지만.”
“그럼 됐군요. 주말 이틀 중 적당한 날과 시간을 정해 말씀해 주시면 비워 두도록 하겠습니다.”
용건은 끝났다는 듯 그가 다시 스푼을 들어 올렸다.
얼떨떨하게 그 모습을 보던 내가 말했다.
“저… 아직 목적지도 이야기 안 했는데요?”
“그래서요.”
“제가 이상한 곳에 가자고 하면 어쩌시려고요?”
내 물음에 이안이 무덤덤하게 셔벗을 한 입 먹었다.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어디든?’
얼핏 들으면 상당히 스윗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간 이안을 지겹게 보아 온 나는 알았다.
저건 그냥 어디든 외출 자체가 썩 마뜩잖으니 장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안의 표정은 시큰둥하기 그지없었다.
‘뭐… 그래도 장족의 발전인가?’
무슨 심산으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게는 나쁘지 않은 신호였다.
이안 저놈이 다이아나에게 지금처럼만 순순히 굴어도,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속도가 배로 빨라질 테니까.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반쯤 녹은 셔벗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든 나는 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음?”
진작 식사를 마친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왜 뭐.’
다 먹었으면 갈 길 가란 말이야.
“왜… 하실 말씀이라도?”
“없습니다.”
그러고선 다시 입을 다물고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설마.’
지금 내가 다 먹기를 기다리는 건가?
잠깐 고민하던 나는 셔벗과 이안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마지막 한 스푼을 입에 넣고 디저트용 스푼을 내려놓았다.
“…….”
그러자 이안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연자약하게 입을 닦으며 난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기다린 거 맞잖아!’
그사이 의자를 집어넣은 이안이 다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 뺨 위로 노골적인 시선이 내려앉았다.
슬쩍 눈만 굴려 시선을 맞추자 그가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부인.”
그러고선 그대로 몸을 돌려 다이닝 홀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
시간은 성실히 흘러 금세 주말이 돌아왔다.
돌아오는 토요일 오전, 번화가로 외출을 할 예정이라는 내 말에 이안은 정말 별말 없이 ‘알았다’는 흔쾌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와 대공이 함께 나들이를 나간다는 소식은 금세 대공저 전체에 퍼져 사용인들이 저마다 주인 내외를 두고 술렁일 지경에 이르렀다.
생각해 보면 시즌 파티 에스코트부터 주말 번화가 나들이까지, 그들에겐 그보다 자극적인 이슈가 없는 듯했다.
이른 아침, 한 무리의 하녀들과 함께 내 침실로 들이닥친 비비가 날 드레스 룸으로 인도하며 헤실헤실 웃었다.
“마님, 오늘 날씨가 참 좋죠?”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그럼요! 다들 주인어른과 마님 이야기로 난리예요.”
싱글벙글한 비비를 보며 모르는 척 물었다.
“사용인들이?”
“네에, 드디어 두 분이 정말 부부가 되는 게 아니냐면서 다들 엄청 들떠 있던걸요?”
“그동안은 꼭 부부가 아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비비.”
“아, 그, 그게! 죄, 죄송해요…! 제가 말실수를.”
금세 사색이 되어 고개를 조아리는 비비를 보곤 픽 웃어 주었다.
“장난이란다. 그럴 법도 하지.”
“마, 마니임….”
“듣기에 기꺼운 소식들이니 또 그런 말이 나오거든 종종 전해 주렴. 언제나 그렇듯 누구도 벌하지 않으마.”
내 너그러운 태도에 비비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그렇게 할게요.”
사용인들의 반응이 곧 사교계의 반응이고, 제국 전체의 반응이다.
두 달 후 돌아올 황녀의 탄신일까지 기다리지 않고 이안과 북적이는 번화가까지 나가는 이유는 간단했다.
본디 화제성이란 노출도에 비례하는 법이니까.
‘이안의 시즌 파티 등장에 대해선 다들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지.’
다들 의문에 차 있을 즈음, 바로 이안과 내가 번화가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여론이 바뀌는 데에도 속도가 붙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엔 아리아 소식지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소식지, 굉장히 탐난다.
내가 있던 세계, 그러니까 21세기 대한민국의 SNS엔 소위 말하는 ‘네임드’라고 불리는 인플루언서들이 있었다.
보통 공통 관심사를 가진 집단은 그 ‘네임드’의 의견을 따라가기 마련이고, 그런 흐름이 모이면 곧 여론이 된다.
참고로 이 소설 팬덤의 네임드는 전부 이안 클라우드의 극성팬이었다.
‘그 자식들한테 사이버불링을 당한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아무튼.
이런 네임드의 눈 밖에 나면 상당히 성가셔지지만, 반대로 네임드 하나만 잡으면 여론 잡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SNS가 없는 이 시대의 여론을 꽉 쥐고 있고, 소식지 하나로 사교계를 술렁일 수 있는 네임드.
바로 아리아 소식지 아니겠는가?
‘필자의 정체만 알면 잘 구워삶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기엔 정보가 너무 없었다.
완전히 익명으로 쓰이는 데다가, 다른 신문과 달리 제보도 받지 않으니까.
‘뭐, 적당히 알짱거리다 보면 그쪽도 빌미를 주기 마련이지.’
세상에 안 잡히는 꼬리는 없는 법이라고 하지들 않는가?
물론, 이건 전부 부수적인 요소고 이번 외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안의 정신교육이지만.
내가 얕은 사색에 잠겨 있는 동안 비비와 하녀들이 내 치장을 마치고 물러섰다.
거울 앞에서 샛노란 외출용 드레스를 이리저리 비춰 보다가 물었다.
“비비, 이건 못 보던 드레스구나.”
“앗, 그거요. 마담 제드께서 어제 여름맞이 특별 신작이라며 주고 가셨어요!”
“마담 제드가?”
파티 참석용 드레스를 수선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사이에 신작이라니.
게다가 요즘 황녀 드레스를 만들고 있지 않나?
“네, 그리고 뭐라더라… 마담 제드의 영원한 첫 번째는 마님이라고 꼭 전해 달라시던데요.”
비비의 말을 듣고 나는 아, 탄성을 삼켰다.
‘마담 제드는 이런 의리 있는 면이 좋다니까.’
실제로 작품 후반부에서 다이아나에게 마음을 연 마담 제드는 많은 논란에도 꿋꿋하게 다이아나를 지지해 준다.
나한테 보여 주는 이 의리는 곧 다이아나를 향하겠지.
‘다이아나! 내가 너 없는 사이 열심히 꼬셔 놓을 테니까 넌 꽃길만 걸어!’
만족스럽게 드레스 자락을 흔들다가 빙긋 웃었다.
“이만 내려가야겠다.”
“네, 마님! 오늘도 최선을 다해 마님을 모실게요!”
채비를 마치고 일 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저번과 마찬가지로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는 이안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몸을 돌렸다.
“부인.”
“오래 기다리셨나요?”
내 물음에 반사적으로 입을 뻐끔거리던 이안이 멈칫하고선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왔습니다.”
그가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