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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27)화 (27/91)

27화.

“그럼 황녀님께서 연통을 주시는 대로 가장 빠른 일자를 잡아보겠습니다.”

“빠릿빠릿해서 마음에 들어. 그럼 연회 즐기도록 해, 대공비.”

“예, 황녀님.”

황녀는 와인 잔에 담긴 무알콜 주스를 휘휘 젓고 종종종 반대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 다시 혼자가 된 나는 반쯤 남은 샴페인을 홀짝이며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흐음….”

어쩐지 공기가 조금 뒤바뀐 느낌이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 입장할 때는 혼란스러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빛이 대다수였는데, 지금은 내게 말을 걸 기회를 노리기라도 하듯 이쪽으로 은근한 눈빛을 보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럴 만도 하지.’

요주의 인물이었던 황녀부터 주최자인 브릴루즈 부인까지 내게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니 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덕분에 내게 아주 유리하게 되었다.

이쯤 되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시비를 걸어 준 이사벨라의 무리에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좋아, 분위기 괜찮고.’

빈 샴페인 잔을 시종에게 넘긴 내가 씨익 웃으며 걸음을 떼었다.

분위기도 썩 나쁘지 않으니, 다이아나에게 이득이 될 만한 인재들을 조금 더 살펴보실까.

그렇게 온실을 천천히 활보하고 있을 때쯤, 누군가 나를 불렀다.

“저어… 대공비 전하?”

‘또 뭐야.’

뒤를 돌자 이번에도 한 무리 여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이사벨라 무리보다 조금 앳된 얼굴들이었는데, 대강 20대 초중반 정도로 보였다.

‘설마 벌써 2차전이야?’

내가 아무리 사이버불링에 특화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연달아 하는 2차전은 조금 피하고 싶었다.

안 그래도 이사벨라에 황녀, 공작 부인까지 감당하느라 진이 다 빠진 상태라고.

“…자네들은 또 무슨 일인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예의 미소를 띠고 물었다.

그런데 아까 날 찾아온 이사벨라 무리들과는 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앗, 그게.”

“프랭클린 영애, 무슨 말부터 해야 하죠?”

“모, 몰라요.”

저들끼리 옆구리를 쿡쿡 찔러 대며 꺅꺅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뭐랄까.

‘싸울 필요는 없겠네.’

티끌만큼의 위협도 느껴지지 않았다.

계산을 끝낸 내가 방긋 웃었다.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지만, 날 부른 데는 이유가 있겠지. 편하게 이야기해 보게.”

“아, 그게… 대공비 전하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어서.”

“물론, 얼마든지 환영이라네. 보다시피 지금 담소를 나눌 상대가 없어서.”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이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르르 다가와 나를 둘러쌌다.

“안녕하세요, 대공비 전하. 저는 로건 백작가의 차녀 리지라고 합니다.”

“저는 에카르트 후작가의….”

저마다 자기소개를 내뱉는 그들을 보다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만나서 반갑네.”

“저희야말로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

“아까는 정말 멋있었어요!”

“역시 대공비 전하의 카리스마는 따라잡기가 힘들죠.”

“그러니까요, 전 언젠가 하워드 영애가 큰코다칠 줄 알았어요. 여기저기 얼마나 시비를 걸고 다니는데요!”

보아하니 이들 역시 이사벨라 하워드와의 말싸움을 감명 깊게 본 것 같았다.

이쯤 되면 자연히 의문이 차올랐다.

이사벨라 하워드는 대체 뭘 위해 나한테 시비를 건 걸까?

본인한테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뒷걸음질 아군, 뭐 그런 건가?

내가 얕은 생각에 잠겨 있을 동안 영애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고선 나에게 친근히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대공비 전하의 드레스가 정말 예뻐요.”

“맞아요! 전 사실 아까부터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답니다.”

“처음 보는 드레스 형식이에요. 드레스는 늘 좌우 대칭이 가장 아름다운 형태라고 배웠는데, 이건 그렇지 않은데도 이렇게 세련되었는걸요!”

“그러네요. 이 치마는 장미를 형상화한 건가요?”

“밑에 반짝거리는 건 보석인 줄 알았는데, 보석이 아니었네요?”

“헉, 이게 뭔가요?”

“꼭 마법 같아요!”

“그러고 보니 아까 황녀님도 대공비 전하의 드레스를 아주 자세히 보시던데….”

한순간에 내 드레스로 쏠리는 주제에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아, 이건 마법으로 만든 빛 가루일세. 나도 도전해 보지 않은 형태의 드레스라 고민이 많았는데, 자네들이 그리 말해 주니 아주 기껍군.”

“세상에, 마법이라니!”

“사실, 아까 대공비 전하께서 입장하실 때부터 몇몇 영애들이 속닥거리는 걸 들었어요.”

부인 한 명이 목소리를 낮추고 내게 속삭였다.

“아마 다들 말은 못 해도 뒤에서 어느 살롱인지 찾아보고 있을걸요?”

“맞아요!”

그러고는 저들끼리 까르르, 웃어넘기는데 그렇게 소녀다울 수 없었다.

그러다 그중 한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허리 쪽으로 눈길을 고정했다.

“그런데… 드레스도 드레스지만, 여기 허리에 장식된 브로치가 참 예뻐요.”

“어머, 영애도 보고 계셨나요? 저도 계속 눈길이 가지 뭐예요.”

“보통 브로치는 가슴에 달기 마련인데….”

이번엔 여자들의 시선이 내 브로치로 쏠렸다.

‘이거지. 너희가 보는 눈이 있구나.’

그리고 나는 그 칭찬이 아주 반가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일부러 보여 주려고 달고 온 장신구니까.

“그런가? 이건 파티에 참석하려고 특별히 고른 브로치라네. 반쪽짜리 하트지. 특별히 향기까지 느껴지도록 주문했다네.”

“어머나.”

여자들이 감탄하듯이 고상하게 입을 가렸다.

“반쪽짜리라면, 다른 반쪽도 있다는 건가요?”

“앗, 그러고 보니 아까 대공 전하의 크라바트에도 비슷한 모양의 브로치가 달려 있던 걸 본 것 같아요.”

“어머, 그러고 보니 저도….”

이안의 손을 잡고 들어올 때부터 예상했지만 정말 하나하나 다 뜯어보고 있었군.

내가 툭, 던진 한 마디로 퍼즐을 짜 맞추며 술렁거리던 그녀들이 날 빤히 바라보았다.

확인 사살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구태여 대답을 하는 대신 그들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응, 맞아. 노렸어.

그 미소의 의미가 긍정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린 여자들이 다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세상에, 낭만적이에요.”

“그러게요. 역시 소문이 전부는 아닌가 봐요.”

“맞아요. 아까 대공 전하가 대공비 전하의 손등에 입 맞추실 때는 제가 다 설레던걸요!”

나에게 한없이 긍정적으로 흘러가는 대화를 보며 오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봤냐, 이안 클라우드?’

내 말이 맞지. 효과적일 거라고.

아까까지만 해도 호기심과 적대감이 뒤섞인 눈빛을 보내던 귀족들이 이렇게 다가와 말을 거는 것을 보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물론, 진짜 중요한 건 지금부터지만.

나는 태연하게 한쪽 뺨에 손을 가져다 대고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티를 낼 생각은 없었는데, 세간에 나도는 소문을 듣고 대공께서 어찌나 속상해하시던지.”

“어머….”

“아무리 신혼이 좋고 이이가 날 싸고돈다고 해도 그렇게 대공저 안에만 있으면 안 되었는데, 전부 내 탓이라네.”

내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여자들은 아주 넘어간 듯 저들끼리 눈길을 주고받고 있었다.

‘대충 이 정도면 되려나.’

브로치 어필도 해 줬겠다, 유난도 대충 떨어 줬겠다. 이 분위기라면 파티가 끝난 뒤에 이안 클라우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충분했다.

아내를 싸고돌다 못해 2년 내내 사교계 행사 참여를 뚝 끊어 버리고, 사교계에 복귀하기 무섭게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유난을 떨어 대는 대공이라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소문인가?

‘물론 지금 상황에서 이걸 전부 믿는 사람은 손에 꼽겠지만.’

어차피 시작이 반인 법이다.

이미지야 천천히 바꿔 가면 되는 거고.

똥차 중의 똥차 이안 클라우드가 이런 식으로 이미지 세탁을 하는 건 썩 달갑지 않았지만, 이 역시 이안 놈을 사랑하는 다이아나의 평판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견딜 수 있었다.

‘넌 진짜 여자 잘 만난 줄 알아라.’

다이아나만 아니었으면 국물도 없었어, 인마.

속으로 이안을 생각하며 이를 박박 갈고 있을 때쯤이었다.

날 둘러싼 영애 중 한 명이 손바닥을 짝 쳤다.

“핫, 그러면 혹시 오늘 일도 아리아 소식지에 올라오는 거 아닐까요?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에 대한 이야기요!”

“어머, 맞아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한 사람이 화두를 올리자 나머지 여자들도 저마다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기 바빴다.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나만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소식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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