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다음 날.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자 비비가 나를 맞아 주었다.
“일어나셨나요, 마님?”
어제 잠깐 웃어 준 이후로 묘하게 나한테 살갑게 대하는 느낌이었다.
“그래, 비비.”
“그럼 준비를 도와드릴 테니 바로 조찬장으로….”
“아니, 오늘은 안 갈 거야.”
“네?”
비비의 주근깨가 콕콕 박힌 얼굴에 의아함이 물들었다.
내가 환하게 웃었다.
“집사를 부르고, 나갈 준비를 하렴.”
“지, 지금요?”
“그래, 지금.”
얼이 빠져 있던 비비가 반 박자 느리게 허둥지둥 움직였다.
“금방 준비할게요, 마님!”
후다닥 방을 나서는 비비를 보며 가볍게 한숨을 돌렸다.
‘어제 협상은 아주 성공적이었지만….’
그거랑 별개로, 생각해 보니 굳이 매일 아침 이안과 함께 식사를 할 필요가 없었다.
피차 반갑지 않은 사이에 꾸역꾸역 얼굴 보면서 밥을 먹을 필요가 있나?
저번 조찬 때 태도를 보건대 아마 이안도 썩 내키진 않을 거다.
‘헹, 혼자 기다리다 쓸쓸하게 식사해 보라지.’
이건 그동안 수없이 다이아나를 바람맞혔던 이안을 향한 소소한 복수이기도 했다.
물론 쓸쓸하게 식사하라는 건 내 바람이고, 놈은 내가 바람을 맞히든 잠수를 타든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을 거다.
‘생각할수록 얄밉단 말이야….’
어떻게 남자 주인공이라는 인간이 이토록 재수 없을 수가 있지?
이 소설 작가의 취향이 진지하게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진지하게 어떻게 하면 이안에게 성공적인 한 방을 먹일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님,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그래, 들어오렴.”
내 허락이 떨어지자 비비가 하녀들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마님이 번화가로 외출을 하실 테니, 다들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치장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비비의 말에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인 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님, 머리는 틀어 올릴까요? 아니면 반을 묶어 늘어뜨리는 게 나을까요?”
“번화가로 가시는 거라면 오래 걸으실 테니, 높은 펌프스 대신 로퍼를 골라 올게요. 마님께선 키도 크신 편이니까 태가 나실 거예요!”
“드레스보단 가벼운 원피스가 좋겠어요.”
나갈 준비만 해 달라고 했는데 어째 몰려온 하녀 전부 신이 난 모양새였다.
다섯 명이 넘는 하녀들이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이것저것 가져다 대는데 솔직히 적응이 안 될 정도였다.
‘그냥 적당히 옷이나 주워 입고 나가는 줄 알았는데….’
귀족들의 나들이를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한창 채비하고 있을 무렵 집사가 문밖에서 노크를 했다.
“마님, 집사 헤럴드입니다.”
“들어오게.”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내가 오늘 번화가로 외출을 할 생각이야.”
“아,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가시는군요.”
집사의 추임새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빙긋 웃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백지 수표를 준비해 주게. 일단은… 두 장이면 되겠군.”
“백지 수표… 말씀이십니까?”
헤럴드는 아까 비비가 지었던 것과 비슷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런 표정인가? 설마 내겐 줄 수 없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뼈 있는 말에 헤럴드가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그를 무표정하게 훑다가 다시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준비해 오게. 삼십 분 뒤 출발할 예정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한데….”
우물쭈물하던 헤럴드가 말했다.
“그럼 오늘 조찬은….”
그놈의 조찬.
이 집엔 아침 안 먹으면 큰일 나는 법이라도 있는 거냐고.
나는 집사에게 들리라는 듯이 쯧, 혀를 찼다.
“생각 없으니 대공께는 알아서 전해 드리게.”
“…알겠습니다.”
집사가 고개를 숙인 채로 조용히 물러갔다.
그가 문을 닫고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채비를 이어 갔다.
“마저 머리를 손질하렴.”
***
“…그래서 마님께서는 오늘 조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 층의 다이닝 홀.
집사의 보고에 이안의 시선이 자신의 오른편 자리에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한 번도 조찬 시간에 늦은 적 없던 엘로이즈가 20분이 지나도록 내려오지 않아 의문을 가지던 차였다.
그런데 자기 대신 집사장을 보내서 한다는 말이 ‘오늘은 조찬에 참석할 생각이 없다’라니.
“…….”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알았으니 나가 봐라.”
“예, 전하.”
집사가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이안이 여태 손대지 않아 깨끗하던 식기를 집어 들었다.
정적 속, 작게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이안은 지난밤부터 오늘 아침까지의 모든 것이 이상했다.
어제 갑작스럽게 집무실을 찾아온 엘로이즈는 실로 평소와 달랐다.
익히 알고 있었을 자신에 관한 추문을 늘어놓으면서 종이를 들이밀던 태도부터, 톡 쏘아붙이는 삐딱한 말투까지.
게다가….
“제가 지금부터 대공을 고쳐 쓸 거란 말이죠.”
“보아하니 대공께선 글러 먹으셨어요.”
엘로이즈가 그런 상스러운 말을 쓸 수 있는 여인이었던가?
고민해 봐도 나오는 답은 없었다.
이안 클라우드는 엘로이즈가 ‘어떤 사람’인지 논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으니까.
이안이 그녀의 빈자리를 힐끗 바라보았다.
‘어제는 다짜고짜 찾아오더니, 오늘은 조찬을 거른다고.’
2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두 사람은 항상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누가 먼저 제안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굳어진 암묵적인 규칙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찬을 제외하면 두 사람이 필요한 대화를 나눌 기회는 전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집사는 아침부터 엘로이즈가 치장을 하느라 바쁜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백지 수표를 받아 갔다고 했지.’
유별날 정도로 사치와는 거리가 먼 여자가 백지 수표를 요구했다.
기계적으로 고기를 씹던 이안의 행동이 느려졌다.
다시금 어제의 엘로이즈가 떠오른 탓이었다.
“원하신다면, 이혼도 해 드릴 수 있어요.”
얼핏 선심을 쓰는 것 같은 말투였다.
사실 엘로이즈가 이혼을 논하든 말든 그건 이안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안에게 필요한 건 어디까지나 대공저의 재정을 관리하고 위신을 세울 대공비였고, 엘로이즈가 적합한 인재이긴 하나 대체 불가능한 필수 불가결의 존재는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어제 엘로이즈가 이안에게 내건 조건은 그가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거슬리는군.’
달그락.
그가 식기를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내내 부드러운 고기를 씹고 있었음에도 마치 자갈이라도 먹은 것처럼 표정이 썩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접시는 채 반도 비우지 못한 상태였다.
“치워라.”
표정을 굳힌 이안이 그대로 다이닝 홀을 떠났다.
***
“음, 날씨 좋다.”
마차에서 내려 쏟아지는 햇살을 만끽하며 슬쩍 웃었다.
“비비, 빠짐없이 챙겨 왔니?”
“네, 네. 마님. 백지 수표와 보증서 전부 가져왔습니다.”
“옳지.”
종종걸음으로 내 뒤를 쫓으며 비비가 재차 물었다.
“정말 의상실에 가시는 게 맞지요?”
“그래.”
“마님이 의상실에 가시는 건 처음 봐요.”
비비가 들뜬 얼굴로 덧붙였다.
사실, 오늘 이렇게 일찍부터 번화가에 온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이 세계에서 살기로 한 이상, 저택에 가만히 눌러앉아 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물론 다이아나가 돌아오기 전까지 이안의 정신 상태만 뜯어고치며 대공비 노릇을 겸사겸사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돌아온 다이아나를 위해 프리패스 꽃길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선 발에 땀 나게 뛰어다닐 필요가 있었다.
“그럼 가 보실까.”
나의 사랑, 나의 여신, 나의 최애 다이아나의 행복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