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5)화 (5/91)

5화.

이제 와 고백하자면, 난 속된 말로 ‘키보드 워리어’라 불리는 부류였다.

키보드 워리어란?

한 대의 컴퓨터와 한 자루의 키보드만으로 능히 모니터 너머의 백만대군을 물리칠 수 있는 자를 일컫는 단어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내 인생은 비주류 장르의 연속이었다.

인터넷 소설이 유행하던 시절엔 남주도 서브남주도 아닌 지나가는 남주 친구1에게 반해 팬카페를 개설했고, 아이돌 덕질을 할 때는 5인조 그룹에서 늘 혼자 남는 비인기 멤버를 최애 삼았으며, 로판 붐이 일어 모두가 흑발 적안의 북부대공에게 설렐 때 녹발의 분량 없는 호위 기사에게 내 모든 주식을 때려 박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덕분에 트X터 같은 SNS에서 주류 팬덤과 부딪힐 때마다 나는 탈곡기에 옥수수 털리듯 털려야 했다.

-아직도 이걸 파는 사람이 있음?

-A×B가 공식이지, 여기서 C×A를 들이민다고?

-와… 나 저런 취향 처음 봐. 혹시 밥도 초코 우유에 말아 드시나요?

-꼴알못. 상대 안 함.

‘재수 없는 메이저 자식들….’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다굴 앞에 장사 없다고.

쪽수 많은 것들이 더 했다.

그런 고난의 시간을 겪어 온 지 무려 10년.

나는 여럿이서 득달같이 달려들어 사이버불링을 해도 멘탈에 금 하나 가지 않는 키보드 배틀의 달인으로 자랐다.

이 소설을 볼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주 팬덤이 댓글과 SNS에서 나를 얼마나 쥐어패든, 나는 꿋꿋하게 다이아나 프로필 사진을 달고 그놈들과 앞장서서 기 싸움을 했다.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이래 봬도 내가 다이아나 팬덤의 잔다르크로 불렸다고.

‘그것도 작가가 완결을 그따위로 내는 바람에 전투 의지를 전부 잃고 말았지만.’

아무튼 이 상황에서 이 얘기를 왜 하느냐.

소설 속 남자 주인공 이안 클라우드는 나와 달리 한없는 유리멘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좋게 말해 꼿꼿했고, 신랄하게 말해 고지식한 데다 미련했다.

고집은 더럽게 센 주제에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해 근 30년간 감정을 죽이고 살아온 것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그러니 내가 저 감정 없는 깡통 로봇 같은 이안 클라우드와의 기 싸움에서 이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비비에게 전해 들은 추잡한 소문을 종이 위에 깡그리 적고 다시 찬찬히 읽었다.

지금은 전부 나를 향한 말이었지만, 이대로 가면 이 중 몇몇은 다이아나를 향한 비난이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는 안 되지.”

이 모든 것은 내 다이아나의 꽃길을 위함이므로.

‘다이아나, 기다려. 내가 이 자식 정신 교육 제대로 시켜 놓을게!’

***

그날 밤.

이안은 말한 대로 늦은 시간에 저택으로 돌아왔다.

사용인들마저 대부분 잠든 야심한 시각이었다.

창가에서 턱을 괴고 있던 나는, 이안이 본관으로 들어오자마자 냅다 집무실로 향했다.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이안은 귀가한 뒤에도 곧장 잠이 드는 날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새벽까지 삼 층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다 새벽 동트기 직전에 침실에 들어가 잠깐 눈을 붙이는 정도였다.

‘인간이 하루 평균 네 시간도 자지 않고 살 수 있다니.’

지가 나폴레옹이야?

작가는 이안의 이런 생활 패턴을 완벽주의로 포장했지만, 내가 느끼기에 이 인간은 그냥 생체 패턴이 망가진 일 중독자였다.

‘그러다 일찍 죽지.’

인간의 수명은 수면량에 영향을 받는다고.

속으로 혀를 쯧쯧 차며 집무실 문 앞에 섰다.

예상대로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똑똑.

작게 노크를 하고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안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렸다.

서류를 검토하던 이안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발견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부인이 왜 여길 오셨습니까?”

물구나무를 서서 들어도 성가시다는 말투였다.

아랑곳 않고 안으로 들어선 내가 집무실을 가로질렀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특별한 건이 아니면 조찬 외의 시간엔 서로 찾지 않기로 했던 것 같은데요.”

“…….”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급한 건입니까?”

안경을 벗은 이안이 짜증스럽게 눈가를 매만졌다.

‘싸가지….’

피차 안 반가운 건 마찬가지거든, 이 자식아.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억지로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네, 특별한 건이 있어서요.”

“…그러십니까.”

이안이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챙겨 온 종이를 책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세간에서 저를 부르는 말들이라고 하더군요.”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 위에는 몇 시간 전 내가 하녀에게 들었던 저열한 수식어와, 추문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수 초간 그것을 훑던 이안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양심에 찔리는 기색은 조금도 없는 뻔뻔한 낯빛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

여기서 벌써 반응을 보이면 개싸가지 이안 클라우드가 아니지, 암.

“제 평판을 보고도 느끼는 점이 없으세요? 대공.”

“제가 부인의 평판까지 신경을 써 드려야 합니까?”

말하는 것 봐.

내가 질세라 받아쳤다.

“대공비가 밖에서 이런 소리를 듣는데 아무렇지도 않으시다고요?”

“신경 쓸 의무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저와 관련된 이 추문은 전부 대공과 관련된 것들인데요.”

반박해 봐라, 이 자식아.

“…….”

연거푸 내 말에 태클을 걸던 이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당연하게도 여기 써 있는 모든 수식어는 엘로이즈가 이안과 결혼한 이후에 달린 말들이었으니까.

아무리 공포의 주둥아리라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인정하시는 모양이네요.”

결혼 후 엘로이즈가 사교 행사에 참석하는 빈도를 확연히 줄였다.

상호 합의된 사항이라고는 하지만, 명목뿐인 대공 부인이 되었다는 걸 만천하에 알려 좋을 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공 부부라는 직위를 가진 이상 영영 사교계와 담을 쌓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부부가 함께 공식 석상에 참석하는 일이 생기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안은 누가 봐도 ‘우리 사랑 없는 결혼을 했어요’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겨 댔다.

그렇다 보니 수도에 소문이 퍼지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엘로이즈는 대공에게 외면받는 이름뿐인 대공비라고.

“다시 물을게요. 정말 신경 쓸 이유가 없으세요?”

한 자 한 자 눌러 말하며 이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

책상 위의 종이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던 이안이 느리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서요.”

“…….”

“본론만 간단히 하시죠. 하고 싶으신 말이 뭡니까?”

이렇게 나오시겠다.

제 부인이 자기 때문에 수도의 씹을 거리가 되었다는데, 사과나 위로 하나 없다 이거지?

짧게 숨을 들이쉰 내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상호 간의 이익을 위한 결혼이라고 한들, 이대로는 못 살겠다 싶어서요.”

이안의 미간이 다시금 좁아졌다.

“이대로는, 이라….”

“…….”

“다른 방식이 있으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잠깐 눈을 굴리던 그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제 와 마음을 달라, 이런 진부한 소리를 하시려거든 그만두십시오.”

“제가요?”

으, 진저리를 치며 어깨를 털었다.

내가 미쳤니?

네 사랑을 받을 바에야 나 혼자 다이아나를 영원히 짝사랑하고 말지.

나한테 필요한 건 나의 최애지, 네가 아니란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내 격한 반응에 이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훑었다.

“그럼 뭡니까? 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와서 하실 중요한 말이라는 게.”

됐다. 

드디어 준비한 말을 할 차례였다.

“…대공, 혹시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말 아세요?”

“…예?”

당연하게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나는 그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내 눈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제법 맑은 눈의 광인 같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전 그거 안 믿어요.”

“무슨.”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무슨 말이긴요, 제가 지금부터 대공을 고쳐 쓸 거란 말이죠.”

내가 너의 생각의자가 되어서 정신 교육을 제대로 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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