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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화 〉 126화­결국 남는 것은 하나뿐(2) (126/131)

〈 126화 〉 126화­결국 남는 것은 하나뿐(2)

* * *

나는 윤희와 헤어진 뒤에도 한참을 벤치에 앉아있었다.

서서히 멀어져가던 윤희의 뒷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후우.”

마음 한구석이 찌릿했던 탓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벤치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늦가을의 하늘은 내 기분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듯 높고 푸르렀다.

“공부하자, 공부.”

허공을 향해 중얼거린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슬기가 쪼르르 달려왔다.

“오빠아. 왜 갑자기 뛰쳐나간 거야?”

“아, 그냥 친구들이 와서.”

별일 아니라며 손을 휘휘 저었더니 슬기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오, 설마. 형준 오빠? 데려오지 그랬어.”

“아냐. 그리고 나 형준이 말고도 친구 있거든.”

마치 내가 형준이 말고는 친구 없는 사람인 양 말하네.

그때 슬기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아! 지아 언니도 있었네. 어, 그럼 설마?”

“그래. 스터디부 멤버들이 찾아왔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정도는 말해도 상관없으니까.

“우와아. 지금도 있어?”

기대감을 한껏 드러내는 슬기를 향해 나는 담담한 어조로 응답했다.

“좀 전에 돌아갔어.”

“허얼! 데려오지. 엄청 궁금한데…….”

“잠깐 볼 일이 있었던 것뿐이야. 다들 이래저래 바쁘고 그래서.”

적당한 말로 둘러대고 나서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 다음 책상 앞에 앉아서 펼쳐진 문제집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할 생각이 들지 않는구만.

나는 문제집을 옆으로 치우고는 오랜만에 「모든 물음표」를 꺼냈다. 윤희가 인용했던 그 구절을 찾기 위해서.

나는 자세를 잡고 한 페이지씩 천천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책의 중간쯤에서 윤희가 인용했던 구절을 찾았다.

‘만약 바다에 중심이 있다면, 파도는 왜 그리 가지 않을까?’

“…….”

한참이나 반복해서 읽어보았지만,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윤희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시의 구절을 인용할 리가 없는데 말이지.

나는 시집을 내려놓고 이면지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한가운데에 큼직한 글씨로 그 구절을 적었다.

그렇게 해서 뚫어져라 쳐다봐도 여전히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서늘하고도 사납게 불을 내뿜는 화산, 무엇이 그 속을 뒤흔들었을까?’

이 구절은 나와 윤희, 그리고 이사장님을 둘러싼 상황에서 유추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저번에 했던 방식으로 해석해야 되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단서가 너무 적은데.

“음…….”

신음을 흘리며 턱을 문질러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턱을 괸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것 말고도 신경 쓰이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스터디부 멤버들 모두가 우리 집까지 들이닥친 일이라든가.

요 며칠 지아 누나가 내게 매달리는 듯한 반응을 보인 점도 그랬고, 오히려 매달릴 줄 알았던 규원이는 존중해 주겠다고 한 점도 신경 쓰였다.

주현 누나는 따로 말은 안 하지만 규원이와 의견이 비슷한 듯했고.

그리고 윤희는…….

“나쁜 놈…….”

오늘 헤어질 때 들었던 말을 되뇌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정말로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윤희에게 그렇게 매도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윤희의 믿음에 큰 상처를 남겼으니까.

“참 어렵다.”

나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 그 한 마디를 허공에 대고 툭, 던졌다.

* * * *

월요일 아침, 학교에 도착한 나는 주변 애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자리에 앉았다.

가방에서 교재를 꺼내다가 윤희를 슬쩍 곁눈질했는데, 윤희는 이쪽을 향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하긴, 그저께 안 좋게 헤어지고 말았으니.

내 업보라고 여기기로 했다.

예습을 하는 동안 1교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

어느덧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영재야, 윤희야!”

큰 목소리로 외치며 다가온 규원이가 나와 윤희 사이에 섰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

규원이가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갑자기 시작된 눈치게임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윤희도 마찬가지였고.

“응?”

규원이가 아예 어깨에 손을 얹고 흔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윤희에게도 그랬다. 윤희가 규원이를 향해 슬쩍 눈짓을 했다.

빠질 타이밍은 지금!

“난 나중에 먹을게. 복습 좀 하려고.”

“그래? 알았어.”

규원이가 내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이윽고 두 사람은 급식실로 향했고,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점심시간 이후에도 윤희와 나 사이에는 찬바람만 쌩쌩 불었다.

규원이는 쉬는 시간마다 우리들의 자리로 왔다. 그리고 나나 윤희에게 번갈아 가며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걸었다.

하지만 규원이의 노력도 결국 허사로 끝났다. 종례 시간까지 윤희가 내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종례가 끝나고 나서 나는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희는 규원이와 함께 스터디드림 부실로 향했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인사말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야 교실을 빠져나왔다.

교사를 빠져나온 나는 집으로 발걸음했는데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었다. 그동안 해가 떠 있을 시각에 하교를 한 적이 없다시피 했으니까. 이렇게 하교 행렬에 섞여 있는 것도.

터벅터벅 걷다 보니 정문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영재야! 한영재!”

조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돌아보니 도연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 먼저 간 거 아니었어?”

분명 나보다 먼저 교실을 나섰는데.

“그게, 담임쌤이 잠깐 뭣 좀 시켰거든.”

“아하.”

“그런데 너, 오늘은 부 활동 안 하나 봐?”

도연이의 눈동자가 의아한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은 집에 일이 있어서 그래.”

“그렇구나.”

이해했다는 의미로 머리를 움직이는 도연이. 그러더니 손을 흔들며, 인사말을 남겼다.

“그럼 잘 가.”

“응. 너도.”

나는 돌아섰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연이에게는 사실대로 털어놓는 게 좋을까.

“영재야 뭐 해?”

그래. 말도 없이 떠나면 무척 섭섭하게 여길 것이다. 적어도 친하게 지낸 이들에게는 이실직고하는 편이 좋으리라.

나는 다시 돌아섰고, 영문을 모르는 도연이는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도연아. 나 할 말 있어.”

비장한 눈빛을 보냈다.

“어떤 건데?”

호흡을 한 번 가다듬은 뒤 말문을 열었다.

“나 사실, 한성고에 편입해. 이미 1차 합격은 한 상태야.”

“뭐? 진짜?”

도연이가 눈을 크게 치떴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도 그랬듯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도연이는 시종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렇구나…….”

설명을 마치자 도연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던 하교 행렬도 어느새 끝이 났다.

“그렇게 떠난다고 하니까 아쉽네. 내년에는 너한테서 배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거든.”

“미안해. 그건 어렵게 됐네. 정말로 가고 싶어 하던 학교거든.”

“진짜 아쉽다…….”

서운함이 담긴 눈빛을 보내는 도연이.

“부원들은 뭐라고 했어?”

“존중해 준다는 쪽도 있었고, 매달리는 쪽도 있었고……. 그랬어. 그래도 다들 결국에는 받아들여 주더라.”

“어떻게 잘 마무리했나 보네.”

“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아 누나가 실망하게 만들었으니까. 윤희와 다시 멀어지기도 했고.

도연이가 옅게 웃었다.

“얘기해 줘서 고마워. 보내기 싫은 마음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도연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럼 남은 기간 동안이라도 잘 부탁해.”

“그래.”

우리는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런 뒤 도연이가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너도 잘 가.”

화답하고 나서 돌아섰다.

금방 받아들여 준 도연이가 고마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덩어리가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이대로 괜찮을까.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보폭을 빨리했다.

* * * *

그날 밤, 나는 책상 앞에서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바다에 중심이 있다면, 파도는 왜 그리 가지 않을까…….”

이면지에 적어놓은 글귀를 발음해 보았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무언가가 번뜩이지는 않았다.

“으아아.”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당장에라도 전화를 걸어서, 윤희에게 가르쳐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어려웠으니까.

진짜로 그렇게 할까?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정신 나간 생각은 하지도 말자.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나는 후다닥 방을 뛰쳐나가서 퇴근한 엄마를 맞이해 주었다.

“엄마 잘 다녀왔어?”

“그럼.”

엄마가 거실로 올라섰다.

“슬기는 잘 자고 있구나.”

“항상 이때쯤에 자잖아.”

엄마의 말마따나 슬기는 이불을 목까지 덮은 채 단잠에 빠져있었다.

“저녁상 차려올게.”

부엌으로 향하려 하자 엄마가 제지했다.

“아니야. 안 먹어도 돼.”

“그래도 괜찮아?”

“아들하고 얘기 좀 하려고.”

엄마가 외투를 벗어서 행거에 걸었다.

“방에 가자.”

엄마의 제안에 우리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책상 앞에서 서로를 마주 본 채 앉았다.

“한성고 면접 언제라고 했었더라?”

“이번 주 금요일. 앞으로 4일 남았어.”

“그렇구나.”

엄마가 머리를 주억거렸다.

“걱정돼서 그래?”

질문에 대해 엄마는 대답 대신 입술로 미소를 그릴 뿐이었다.

“엄마. 걱정하지 말아. 나 잘할 자신 있어.”

나는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은 일종의 되새김질이기도 했다. 결심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친구들에게 잘 얘기했고?”

“…….”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내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나는 쩝, 입맛을 다셨다.

“얘기는 했어. 했는데…….”

후우.

폐부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한숨.

멤버들이 보여준 각각의 반응들이 다시금 뇌리에 재생되었다.

“깔끔하게 매듭지은 것 같지가 않아. 갑갑한 느낌도 들고.”

속내를 털어놓더니 엄마가 부드러운 어조로 일렀다.

“모두가 받아들여 주지는 않았구나.”

“응.”

자연히 어깨가 수그러들었다. 엄마는 내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는 엄마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사실 그럴 거라 생각은 했어. 갑자기 이런 얘길 꺼내면 누가 그렇구나, 하고 쉽게 받아들이겠어.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럼.”

엄마는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잘 매듭 짓고 싶었거든. 하지만 잘 안 된 것 같아서, 속상해.”

“그랬구나.”

“엄마. 내 욕심이 지나친 걸까?”

엄마의 부드러운 눈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망설임이 남아있는 거니?”

나는 잠깐 고민하고 나서 그렇다고 답했다.

한성고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스터디부 활동을 계속 하고픈 마음도 남아있었다.

두 가지의 상반된 진심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4일 남았다고 했지?”

“맞아.”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직 4일이나 남았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고민해보렴.”

“그것 말고는, 없겠지?”

조심스레 되묻자 엄마가 고개를 한 번 움직이며 긍정했다, 엄마가 눈웃음을 머금은 채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아, 엄마.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어떤 거?”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엄마.

“만약 바다에 중심이 있다면, 파도는 왜 그리 가지 않을까, 라는 글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모든 물음표」에서 나온 거니?”

“어떻게 알았어?”

반문했더니 엄마가 빙그레 웃었다.

“책꽂이에 꽂혀 있길래 한 번 읽어봤단다.”

“아하…….”

“그 여자애가 얘기한 거야?”

“어, 응.”

대답하자 엄마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왜 그러는데?”

“아니, 그냥.”

그렇게 답하면서도 엄마는 묘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 얘긴 됐고, 엄마 생각엔 무슨 뜻일 것 같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어.”

“아무 의미 없이 한 얘긴 아닌 것 같구나.”

“그야 그렇겠지.”

머리를 끄덕거렸다.

“엄만 잘 모르겠어.”

“역시나…….”

“그래도 한 가지는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어떤 건데?”

반색하며 되묻자 엄마가 검지로 내 미간을 쿡쿡 찔렀다.

“답을 찾아야 할 사람은 바로 너라는 점.”

나는 곧바로 실망감을 드러냈다.

“역시 그것밖에 없는 건가…….”

“저번에도 알아냈지 않니? 이번에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희망 사항으로 끝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엄마가 주먹을 살짝 들고서 파이팅을 외쳤다.

나는 가볍게 웃었다.

“알았어. 스스로 찾아낼게.”

하지만 나는 면접 날이 될 때까지 그 시구의 의미를 해석해내지 못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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