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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화 〉 125화­결국 남는 것은 하나뿐(1) (125/131)

〈 125화 〉 125화­결국 남는 것은 하나뿐(1)

* * *

토요일 아침.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절로 눈이 떠졌다.

이부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엄마는 부엌에서 한참 무언가를 만드는 중이었다.

“아직 7시 반인데, 벌써 일어났네?”

참고로 보통 주말에는 9시까지 잔다. 엄마가 의아하게 여길 만도 하지.

“그냥. 눈이 떠졌어.”

내가 기지개를 켜는 동안, 엄마는 앞치마를 벗고 오래된 코트를 걸쳤다.

“엄마 이제 나갈게.”

“응. 잘 다녀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슬기는 그 순간까지도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슬기야. 일어나야지.”

쪼그려 앉은 자세로 슬기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으으음.”

눈썹을 찌푸리며 웅얼거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밥 먹어야지.”

“반찬 뭔데에?”

밥 소리에 바로 눈 떠버리는구만.

나는 부엌으로 가서 메뉴를 확인한 뒤 알려주었다.

“계란국이랑 시금치 무침.”

슬기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 동안 나는 아침상을 차렸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슬기는 이부자리 정리를, 나는 밥상을 치웠다.

헛헛한 뱃속을 채웠으니 이제 할 일을 해야지.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모의고사 문제집을 펼쳤다. 하지만 공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다.

어젯밤에 스터디부 단톡방에 보낸 채팅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 : 그간 부활동 같이하면서 즐거웠어요!! 앞으로 스터디드림 잘부탁해요!

주현 : 응....

마지막 작별 인사에 답장한 사람은 주현 누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읽기만 했지, 답장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어제를 마지막으로 스터디부 활동을 그만두었다. 부장 자리와 열쇠는 이미 윤희에게 넘겨준 상태.

사실 스터디부 활동을 좀 더 해도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택한 일이다.

정작 스터디부 깨톡방은 여전히 못 나오고 있지만…….

미련을 완벽하게 떨쳐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군.

면접까지 앞으로 일주일.

긴장하지 않고 잘하려면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 깨톡방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해 보는 걸로 하자.

스마트폰을 충전기에 연결하고 나서 몬아미 볼펜을 손에 쥐었다.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다음 문제 풀이를 시작하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에 표시된 이름은 바로 지아 누나였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지아 누나, 어쩐 일로…….”

[영재야. 지금 어디야?]

누나는 곧장 내 말허리를 잘랐다.

“지금 집이에요.”

[그래? 잘됐네.]

대체 뭐가 잘 됐다는 거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아 누나의 말이 이어졌다.

[잠깐 나올 수 있어? 좀 있으면 너네 집 도착하거든.]

“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아무튼 5분 후에 도착할 거니까 그리 알고 있어.]

지아 누나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나는 얼떨떨한 상채로 스마트폰 액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챙겼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부랴부랴 세수를 하고 나서 옷을 걸치러 방으로 향했다.

“오빠. 왜 갑자기 난리야?”

“그런 게 있어!”

옷을 대충 입고 나서 스마트폰을 챙겼다. 그대로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한 무리의 여자들이 우리 집 방향으로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어?”

나도 모르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지아 누나를 비롯한 스터디부 멤버들 전부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그들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달음박질을 했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한영재다!”

그렇게 소리친 이는 규원이였다. 윤희와 주현 누나는 눈길만 한 번 던지고는 우리 집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지아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 왜 갑자기 여길…….”

“왜겠어.”

누나가 미간을 찌푸렸고, 나는 합주기가 되었다. 이유라면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으니까.

“오호. 이런 데 살았구만.”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규원이.

“그래서 뭐?”

절로 튀어 나가는 퉁명스런 말투.

“집 들어가도 돼?”

“절대 안 돼!”

“아, 알았어.”

소리치자 규원이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우리 집 주변을 둘러본 윤희 주현 누나가 내 옆에 서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지아 누나는 매우 강렬한 눈빛 레이저를 쏘고 있었고.

“그렇다고 모두 다 올 필요는 없었지 않아요?”

지아 누나를 향해 묻자 누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때로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효과가 좋거든.”

“나, 나도……. 그, 그렇게 생각, 해…….”

주현 누나가 슬쩍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는 윤희와 규원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윤희는 잠시 시선을 마주하다가 이내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지아 언니가 다 같이 오자구 했어.”

“뭐, 그런 것 같긴 하더라.”

스터디부에서 우리 집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은 지아 누나뿐이니까.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집 앞에서 스터디부 멤버 전체가 모여있는 지금 이 상황이 무척 어색하게 다가왔다.

지아 누나가 입술을 벌렸다.

“정말로, 이제 스터디부에 안 올 거야?”

“…….”

“편입 절차가 다 끝날 때까지 시간 남아있잖아. 안 그래?”

“그렇, 죠.”

머리를 묵직하게 한 번 끄덕였다.

“정말로, 갈 거야?”

나는 지아 누나의 간절한 눈빛을 온전히 받아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각오하고 모든 걸 털어놓았으니까.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이사장님과 약속한 게 아니니까.

“네.”

“진짜 이대로 끝인 거야?”

“…….”

쉽사리 나오지 않는 대답.

지아 누나가 갑자기 청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아직 우리 단톡방은 안 나갔네.”

“어? 진짜네.”

옆에서 규원이도 한 마디 내뱉었다. 윤희와 주현 누나도 각자의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그건…….”

그동안 함께 지내온 시간들에 미련이 있으니까.

그것을 곧바로 내팽개칠 만큼 매정한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하지만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잠시만.”

규원이가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 지아 누나가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규원이는 전혀 아랑곳않고 나와 지아 누나 사이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양손을 얹은 자세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한영재!”

규원이가 검지손으로 내 가슴팍을 겨누었다.

“난 네 뜻을 존중해.”

“응?”

잇새 사이로 튀어 나간 반문.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규원아?”

눈을 큼직하게 뜬 지아 누나, 그리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윤희와 주현 누나.

규원이는 여전히 당당한 자세였다.

“솔직히 말해서, 좀 짜증은 났다? 아니, 이걸 짜증이라고 해야 되려나? 아무튼 기분이 좀 언짢았다구. 그 동안 한 마디 말도 않다가 갑자기 한성고로 떠난다고 하니까 말이야. 다들 그랬잖아. 안 그래?”

규원이의 물음에 세 사람이 고갯짓으로 동감을 표했다.

“영재 너라도 그렇지?”

규원이가 턱짓을 하자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만! 너도 쉽게 말 꺼낸 건 아니었을 거잖아. 맞아, 아니야?”

“응……. 맞아.”

실제로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며 고민했던 일이니까. 그나저나 오늘따라 얘가 왜 이러지?

“한성고는 네가 원래 가고 싶어 했던 학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네 뜻인 거네. 그럼 존중해야지.”

시원스레 인정하는 규원이.

나는 놀라서 멍하니 규원이를 응시했다. 얘한테 이렇게 나서서 정리하는 능력이 있었던가?

다른 멤버들도 의외라는 눈빛으로 규원이를 보았다.

규원이가 나와 뒤편을 번갈아 보더니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들먹였다.

“아니 뭐, 내가 항상 틀린 말하는 건 아니라구.”

“그래, 존중. 존중해야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지아 누나.

“그래. 존중해야지.”

“응. 존중…….”

윤희와 주현 누나도 ‘존중’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하지만 모두가 납득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특히 윤희와 지아 누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지아 누나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영재야. 완전히 받아들이는 건 여전히 어려워.”

나는 이해한다는 의미로 머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내 맘대로 네 의지를 꺾으려고 하는 건 어린애 같은 행동이니까.”

지아 누나가 내게 다가오려고 하자 규원이가 옆으로 한 발 물러났다.

“잘 가. 그리고 우리 친구로 남자.”

“네. 깨톡방은 나가지 않을게요.”

나는 누나가 내민 오른손을 맞잡았다. 지아 누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손을 놓았다.

“한영재.”

윤희가 나를 불렀다.

“따로 할 얘기가 있는데.”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윤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올 게 왔구나.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 * * *

나머지 세 사람은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있겠다고 했다. 근처라고 해도 여기서 도보로 15분 거리지만.

나는 윤희에게 조심스레 권했다.

“여기서는 좀 그러니까, 자리 옮길까?”

“그래.”

앞장서자 윤희가 뒤를 따라왔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벤치가 눈에 띄었고, 우리는 거기로 가서 앉았다. 두 뼘만큼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서.

윤희가 고른 숨결을 흘려보낸 뒤 운을 떼었다.

“사실은 예전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어.”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느꼈거든. 남들이라면 그냥 흘려넘겼을 사인들 말이야.”

윤희는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헌 교재만으로 공부를 하는 것. 사실 이건 네가 용돈을 적게 받아서 그런다고 했던 거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 잘 마시지도 못하는 아메리카노를 굳이 사 먹는 모습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

눈이 절로 바닥을 향했다. 윤희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딱 한 번 의심스러웠던 적이 있었어. 우리 집에 초대하려고 주소 알려줬을 때 기억 나?”

“응.”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답했다.

“그때 내가 길 알려주려고 네 집 주소를 물어봤잖아.”

“아.”

기억난다. 나는 그때 우리 집 주소를 알려주기 싫어서 다른 주소를 댔으니까.

“강성아파트. 네 집으로 오는 길에 보이더라. 지아 누나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어.”

“사실, 집안 형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거든.”

“그 마음 이해해. 나도 여태까지 그래왔으니까.”

동감을 표하는 와중에도 윤희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런데 할아버지랑…… 그런 약속을 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어.”

자신의 무릎을 움켜쥐는 윤희.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난 그동안 네가 무슨 이유로 스터디부의 부장을 맡게 되었는지,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어. 물론 입부를 거절하고 있을 땐 내 앞가림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었으니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거지만. 하지만 입부한 이후에도 그 점에 의문을 품지 않았어.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윤희가 피식 웃었다.

“너 정말 대단해. 그동안 잘 숨겨왔으니까.”

묘하게 가시 돋친 어조에 나는 일언반구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랫입술만 깨물 따름.

윤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재야.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그러면서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긴장한 빛이 역력한 눈빛.

나는 그 눈을 마주했다.

“무섭지만…….”

윤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가슴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날 필요로 한다고 했던 그 말, 그건 거짓말이었어?”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때는 윤희가 들어와야 스터디부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윤희가 부의 멤버로서 필요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이유.

윤희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답, 못하는구나.”

“미안.”

“그랬구나…….”

“내가 나빴어. 그러니까 때리든 뭐든 화풀이해도 돼.”

윤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걸로 끝낼 셈인 거지? 난 안 해. 못 해.”

“윤희야…….”

“결국 네 마음만 편해지려는 속셈이잖아. 모를 거 같아?”

윤희의 격앙된 어조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윤희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내가 왜 네가 부장인 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는 줄 알아?”

“잘, 모르겠어.”

“믿었으니까. 전적으로…….”

윤희는 나를 믿었다. 하지만 나는 윤희를 이용했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쁜 놈.”

윤희가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내 몸이 석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만약 바다에 중심이 있다면, 파도는 왜 그리 가지 않을까?”

벤치에서 일어선 윤희가 그 한 마디를 남긴 채 홀연히 떠나갔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바로 윌리엄 브렌더의 「모든 물음표」에서 나온 시 구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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