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117화찰나의 즐거움
* * *
주현 누나가 스터디부에 복귀한 뒤, 우리는 중간고사 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나와 윤희는 돌아가며 규원이의 공부를 봐줬다. 지아 누나는 홀로 자습을 했는데, 이따금 모르는 부분이 생기면 주현 누나에게 답을 구했다.
그리고 주현 누나는 성심성의껏 지아 누나를 도와주었다. 자신의 공부에만 신경 쓰던 예전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
물론 말을 더듬는 것은 여전했기에 설명을 빠르게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아 누나는 차분히 경청했다.
주말에는 모두가 스터디부에 나왔다.
다만 오전에는 나와 윤희가 주말 학생 교사를 해야 했으므로, 누나들끼리만 부 활동을 먼저 했다.
학생 교사 일정이 끝나면 우리는 다 같이 모여서 점심을 먹었고, 그런 뒤 저녁이 될 때까지 공부했다.
그렇게 보름이 흘러 중간고사 날이 다가왔다. 나흘 간의 치열한 싸움 끝에 드디어 오늘, 마지막 시험 일정이 끝났다.
감독관 선생님이 나가자 애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개운한 마음으로 기지개를 켰는데, 그때 윤희가 말을 걸었다.
“이번 시험 어땠어? 올 백일 것 같아?”
“아마도?”
덤덤한 목소리로 응수하자 윤희가 내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또 잘난 척하네.”
“아니, 네가 물어봐 놓고 그러면 어떡해?”
따져 묻자 오히려 윤희가 짤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넌 어땠어?”
“그럭저럭 잘 본 것 같아. 모르는 문제는 없었거든.”
“그럼 기대해볼 만하겠다.”
윤희가 검지로 입술을 살며시 누른 채 신음성을 냈다.
“음. 성적표 나오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지.”
“얘들아아!”
규원이는 우렁찬 목청과 함께 우리 자리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곧장 내 어깨부터 짚고는 과장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뭐야? 망했어?”
내 질문을 받은 규원이가 도리질을 했다.
“지쳐서어…….”
나는 규원이에게 수고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윤희도 모두 다 수고했다며 한 마디 곁들였다.
규원이는 내 어깨에서 손을 떼고는 윤희 곁으로 다가갔다.
“윤희야. 잘 봤어?”
“음. 그럭저럭.”
덤덤한 목소리로 답하는 윤희.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영재야!”
뒤돌아보니 도연이가 서 있었다.
“시험은 잘 봤어?”
“그런 것 같아.”
그러자 도연이가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왜?”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더니 대답이 돌아왔다.
“이번에도 올 백일 거 같은데…….”
“에이, 그건 성적표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지.”
나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그 직후 규원이가 도연이를 새로운 타깃으로 삼았다.
“엇! 도연아아.”
쪼르르 도연이 앞으로 다가가는 규원이. 두 사람은 무척 친근하게 두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오구오구 우리 규원이. 시험은 잘 봤고?”
오늘 같은 날이면 으레 하는 질문과,
“아니. 전혀어…….”
으레 나오기 마련인 응답이 오갔다.
도연이는 이어 윤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윤희는 그럭저럭이라는, 아주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다.
“도연아, 너는?”
물음표를 꺼낸 규원이가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괜찮게 본 것 같아.”
도연이가 헤헤 웃었다.
“아, 슬슬 가봐야겠다. 너희는 또 스터디부?”
그렇다고 답하자 도연이는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어느새 교실에는 우리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규원이와 윤희에게 눈길을 한 번씩 보내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부실로 가자.”
우리 셋은 가방을 메고 스터디부로 향했다.
* * * *
부실 앞에 도착했더니 2학년 누나들은 이미 와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 빨리 왔네요?”
“너네가 늦은 거란 생각은 안 드니?”
지아 누나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눈을 게슴츠레 떴다. 주현 누나는 그 뒤에 서서 가만히 우리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글쎄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깨를 한 번 들먹인 다음, 열쇠로 문을 열었다.
우리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 시험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럼, 지금부터 가채점을 해 보자. 주현 누나.”
“응.”
주현 누나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누나는 지아 누나 가채점을 도와주세요.”
“그, 그럴게.”
주현 누나가 시험지를 챙긴 채 지아 누나의 옆자리로 갔다. 규원이는 자연스레 주현 누나의 자리로 옮겨 앉게 되었다.
그렇게 1학년은 1학년끼리, 2학년은 2학년끼리 가채점을 시작했다.
1학년 멤버 가채점의 기준은 당연히 내 시험지.
“영재가 있어서 참 편하다니깐.”
“그러게. 성적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으니까.”
윤희가 규원이의 말에 동조했다.
나는 잠시도 쉬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눈으로는 계속 교과서와 문제집을 확인하고.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
채점이 끝나자 나는 빨간 몬아미 볼펜을 내려 놓았다.
결과는 역시나 만점!
“이번에도 만족스럽네.”
팔짱을 낀 채 머리를 주억거리는 동안 윤희는 예상대로라는 반응을 보였다. 규원이는 감탄을 연발하며 나를 추켜세우기 바빴고.
“너 또 만점이구나?”
“네.”
지아 누나를 향해 응답했다.
주현 누나는 벌어진 입술을 닫을 줄 몰랐다.
이래서 만점 받는 재미를 놓칠 수가 없다니까.
나는 규원이와 윤희에게 시험지를 건네 주었고, 그로부터 10분이 흐르자 모두가 가채점을 마쳤다.
평균 점수를 매겨보았다. 규원이 68점. 지아 누나 84점. 윤희 94점. 주현 누나 95점.
“다들 많이 올랐네!”
나는 감탄과 함께 박수를 쳤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규원이의 상승폭이었다.. 저번 학기 기말 때 57점이었으니까.
지아 누나도 이번에 70점대를 벗어났고, 주현 누나도 저번보다 평균이 올라갔다.
윤희도 저번 90점에서 더 상승했다.
“우와아. 좀만 더 하면 70점도 가겠네. 아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 자세를 취하는 규원이.
“휴우.”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안도의 한숨을 쉬는 주현 누나.
그럴 만도 했다. 저번 기말 때 멤버들 중 유일하게 평균 점수가 떨어졌었으니까.
“와. 나 80점대는 처음인데…….”
지아 누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저번에 1점 차이로 아깝게 80점대로 올라서지 못한 걸 생각하면 충분히 기뻐할 만하지.
“지아 누나 축하드려요!”
“박수받으니까 엄청 큰일을 해낸 기분인데.”
내 박수갈채를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나는?”
검지로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키는 규원이.
“잘했어.”
윤희가 손뼉을 치자 나머지 사람들도 일제히 박수를 쳤다.
나는 멤버들을 향해 다들 고생 많았고, 잘했다는 덕담을 나누었다.
“자, 그런고로 오늘은…….”
일부러 말꼬리를 흐리자 모두가 나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뒤풀이다!”
그러자 멤버들 모두 즐거운 함성을 내질렀다.
원래는 개학식날 주현 누나가 돌아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하려고 했던 건데, 이런저런 사건들 탓에 이제야 하게 된 셈이었다.
“그럼 뭘 먹을까?”
윤희가 질문을 입에 담았다.
“그거 먹자, 그거!”
목청을 높이는 규원이를 향해 윤희가 손바닥을 펼치며 제지했다.
“떡볶이 말고 다른 걸로 말해.”
“떡볶이 아닌데…….”
“그럼?”
이번엔 내가 되물었다. 누나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후후, 하고 웃는 꼴을 보니 왠지 느낌이 영 좋지 않은데…….
“베스킨라빈스32의 민트초코!”
“…….”
일동 침묵에 규원이가 당황스러운 눈빛을 했다.
“어라? 다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야?”
“뒤풀이에는 안 어울리는데.”
윤희가 가장 먼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별로 안 땡겨.”
이어지는 지아 누나의 발언. 주현 누나는 입술을 꾹 닫은 채 도리질을 했다.
“치약을 왜 먹냐? 기각.”
내가 단칼에 거절하자 규원이가 눈을 부라리며 삿대질을 했다.
“치약이라니! 민초단들에게 모욕과도 같은 발언을.”
“둘 다 거기까지.”
윤희가 우리를 제지하고 나서 교복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냥 무난하게 치킨이랑 피자로 하자. 돈은 내가 낼 테니까.”
윤희 최고!
나는 말 대신 양쪽 엄지를 한껏 치켜세웠다. 그러자 나머지 멤버들도 멋지다며 한 마디씩 곁들였다.
“그럼 우리, 기다리는 동안 과자라도 먹자!”
“그게 좋겠다.”
규원이의 제안에 찬동하는 지아 누나.
“그럼 편의점 다녀올 사람 두 명을 정하자구. 가위바위보로.”
말을 마친 규원이가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윤희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난 안 해도 되지?”
“물론이지!”
규원이의 빠른 승낙.
그렇게 넷이서 가위바위보를 하게 되었다. 결과는 나와 주현 누나의 승리.
“역시나, 이런 건 먼저 제안한 사람이 걸리더라니까.”
지아 누나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어, 어째서…….”
규원이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묵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지아 누나가 규원이의 목에 팔을 두른 채 부실 밖으로 나섰다.
주현 누나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피, 피자는, 뭘로…… 할 거야?”
“언니가 좋아하는 걸로 해요.”
“고, 고마워……. 윤희야.”
주현 누나의 선택은 새우와 감자가 들어간 피자였고, 치킨은 윤희가 직접 골랐다.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이 돌아왔다. 과자와 음료수를 한 보따리나 들고서.
너무 많은 것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었지만, 금세 기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두들 기세 좋게 먹어 치웠으니까.
남은 것은 포장지와 빈 페트병들뿐.
규원이는 신명이 났는지 노래 한 곡조를 뽑겠다며 빈 페트병을 마이크처럼 입에 갖다대었다. 그러고는 최신 가요 한 곡을 맛깔나게 뽑아냈다.
이어 지아 누나도 신나는 노래를 부르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윤희는 몰래 챙겨왔다면서 트럼프 카드를 꺼냈다.
덕분에 우리는 부실 한가운데에 둘러앉아서 카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나는 주현 누나를 쳐다보았는데, 무척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같이 함께 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
뒷정리를 하고 나서 우리는 스터디부를 나섰다. 시간은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려 4시간이나 놀았을 줄이야.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는 도중에 지아 누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영재야. 잠깐 얘기 좀 하자.”
그러자 윤희가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지아 누나가 걸음을 늦추자 나도 그 속도에 맞추었다.
“주현이가 스터디부 돌아오고 나서 부쩍 밝아진 것 같아.”
“그쵸?”
누나의 말마따나 주현 누나는 돌아온 이후 이전보다 밝아졌다. 분위기나 표정이나.
멤버들과 좀 더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고.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내게 눈길을 주는 지아 누나.
나는 슬쩍 주현 누나의 뒷모습을 살폈다. 윤희와 규원이 사이에 낀 채 열심히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다.
“주현 누나가 아무 얘기도 안 해주던가요?”
“응.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보긴 좀 그러니까. 살짝 귀띔만이라도 해줘.”
필살기인 윙크를 날리는 누나.
그래도 내가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누나가 자신의 무거운 입을 어필했다.
물론 지아 누나의 입이 무겁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주현 누나가 밝히지 않은 내용을 내가 얘기하는 건 아무래도 좀…….
나는 고민 끝에 답을 들려주었다.
“누나. 미안하지만 그건 들어주기 어려울 것 같아요.”
담담한 어조.
누나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그렇구나. 알겠어.”
납득하며 한 발 물러섰다.
“그나저나 너도 참 대단해.”
“네?”
돌아보니 누나의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그간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잖아. 그런데 그걸 전부 해결하면서 스터디부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는 게 말인야.”
“저는, 별로 한 게 없어요.”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괜스레 뒷머리를 매만졌다.
실제로 그랬다. 나 혼자서라면 절대로 해결하지 못했을 문제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모두의 도움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주현 누나의 탈퇴 사건만 해도 사전 준비는 스터디부 멤버들이 해주었으니까.
누나가 가출했을 때도 모두가 발 벗고 나섰고.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얘기를 지아 누나는 조용히 경청해 주었다.
“그게 대단한 거지.”
“그럴까요?”
“그럼.”
시원스레 답하는 지아 누나.
“정말, 너 없었으면 스터디부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 같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스터디부는 제가 끝까지 책임질 거니까.”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 순간에는 진심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때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앞으로 내게 닥쳐올 일들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