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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6화 〉 116화­결말 또한 마주앉기에서 (116/131)


〈 116화 〉 116화­결말 또한 마주앉기에서






* * *






다음날.


나는 평소보다 기분 좋은 상태로 수업을 들었다. 이유는 오늘 아침에 받은 깨톡 덕분이었다.


민주 : 잘 해결됨! 아마 낼부터 주현이가 스터디부활동을 할꺼야!


메시지 아래로 축하의 의미가 담긴 이모티콘이 올라왔다. 이렇게나 기쁜 소식이!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들고 만세 포즈를 했다.


덕분에 엄마가,


“아들, 아침부터 체조하니?”


라고 물으며 이상하게 여기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하지만 아무렴 어때.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데.


덕분에 도보로 40분이나 걸리는 등굣길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어느덧 4교시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메뉴가 미니 돈까스였나?


기억을 더듬으며 교과서를 정리하고 있던 중에 윤희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응.”


답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윤희가 턱을 괸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책상 위에 시집 한 권이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시집 읽으려고?”


“아니. 나중에 보려고.”


윤희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웬일이래?”


“뭐어, 항상 같은 것만 하고 살면 재미없으니까.”


윤희가 이런 대사를 하는 날이 오다니.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인 모양이다.


어느새 규원이도 우리에게 다가왔다.


“얘들아아. 오늘 반찬 미니 돈까스래!”


“이미 알고 있어.”


반면 윤희는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반응했다. 그러고 보니 얘가 급식 메뉴에 관심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


규원이는 내 책상을 짚고 서서 내 얼굴을 유심이 쳐다봤다.


“왜 그렇게 눈빛 레이저를 쏘냐?”


“뭔가 좋은 일 있었나 본데.”


규원이의 발언에 나는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네가 드디어 남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게 되었구나. 장하다!”


“아, 뭔 소리야. 그 정돈 예전부터 할 줄 알았거든!”


버럭 소리 친 규원이가 곧장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된 거 한 번 맞춰볼게. 네가 왜 기분이 좋은지.”


“그래. 한 번 해봐.”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규원이는 윤희에게 아무 힌트도 주지 말라고 미리 못을 박았다.


윤희는 황당하다는 듯한 눈빛을 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혼자 설레발은.


규원이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규원이가 짤막한 탄성과 함께 손뼉을 쳤다.


“주현이 언니 돌아오는구나? 맞지?”


“어떻게 알았어?”


나는 화들짝 놀라서 외쳤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거든?”


“나도 눈치 못 챌 거라 생각했는데.”


윤희도 나와 같은 예상을 했구만.


“야, 너희들! 그렇게 사람 무시하기야? 흥.”


콧방귀를 낀 규원이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홱 돌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서,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온 거지?”


윤희의 질문에 규원이가 얼른 머리로 긍정했다.


“그래. 그러자.”


윤희가 의자에서 일어서자 나도 덩달아 일어났다.


우리는 배식을 받은 뒤 자리에 앉아서 즐겁게 식사를 했다. 교실로 돌아와서는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오후 수업도 무사히 치르고 나니 고대하던 방과 후가 되었다.


우리 셋은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는 얼른 자리를 박차고 부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윤희는 내게 부실 열쇠를 건네주었다.


“이제 네 거잖아.”


“맞다! 받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


나는 열쇠를 받아들고 문을 열었다.


먼저 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시작했더니 지아 누나도 부실에 왔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 주현 누나는요?”


내 질문에 지아 누나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게……. 오늘은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했어.”


종일 품고 있었던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진 순간이었다.


* * * *


결국 주현 누나가 빠진 채로 부 활동을 해야 했다.


분명 주현·민주 누나 간의 해묵은 갈등도 풀었고, 아주머니와도 잘 해결되었다고 했는데…….


윤희나 규원이, 지아 누나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 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은 윤희와 규원이가 앞장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지아 누나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영재야. 어제 일은 어떻게 됐어?”


주현 누나가 귀띔도 안 해준 모양이었다. 하긴, 원래 그런 얘기를 안 하는 성격이기도 하니까.


“잘 해결은 됐어요. 됐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


“글쎄요.”


내가 옆머리를 긁적이자 누나가 전화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어요.”


완만한 경사로가 끝났고, 우리는 서로에게 인사한 뒤 각자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집으로 향하는 길에 민주 누나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런데 상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전화가 걸려왔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다니.


“여보세요.”


[아, 영재야. 아직 부활동 중이니?]


“아뇨. 좀 전에 끝났어요.”


[그러면 통화되겠구나.]


“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수화기 너머로 민주 누나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가 너랑 얘기 좀 하고 싶대.]


“……그래요?”


조심스레 되묻자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주현 누나의 가출 소동으로 내 정체를 들키고 말았다. 아마도 그것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일이었다. 내 목적을 위해 남을 속인 행위를 저질렀으니까.


“알겠어요. 언제 가면 될까요?”


[가능한 빨리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혹시, 오늘 될까?]


원래라면 미리 계획한 대로 공부를 해야 한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부터 해결하는 편이 훨씬 더 낫겠지.


“네. 괜찮아요.”


[그러면 우리 집으로 오면 돼. 엄마한테 전해둘게.]


그 말을 끝으로 누나가 통화를 끝냈다.


무슨 말을 듣든 달게 받아들이자.


나는 각오를 다지고 나서 주현 누나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


주현 누나네 집에 도착한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인터폰을 눌렀다.


[누구세요?]


예의 그 날선 음성. 아주머니였다.


“아, 저, 한영재입니다.”


그러자 저쪽에서 아무 말 없이 인터폰을 끊었다. 잠시 기다리자 굳게 닫혀 있던 현관문이 열리고 아주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들어오렴.”


“네.”


나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민주·주현 누나가 동시에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자매는 말 대신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너희들은 잠깐 어디 들어가 있어.”


아주머니가 담담한 어조로 말하자 민주 누나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주현아, 내 방 가자.”


“응.”


두 자매는 손을 잡은 채 그대로 방에 들어갔다.


이제 거실에는 나와 아주머니 단둘만 남게 되었다. 과외선생님이라는 허울이 사라지고 나니 이렇게나 어색할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가 짤막한 한숨을 토한 뒤 내게 손짓했다.


“이리 오렴.”


일단 어조만 들어보면 그리 화난 것 같지는 앟은데…….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아주머니를 따라 이동했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서 서로를 대면하게 되었다.


깍지 낀 손을 식탁 위에 올려놓은 아주머니 앞에서 나는 최대한 공손한 자세를 유지했다.


“저번에 과외한다고 왔었잖아.”


“죄송합니다.”


얼른 식탁에 머리를 박았다.


“주현 누나를 스터디부로 데려오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그랬거든요……. 속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러니까 고개 들렴.”


어조가 평소보다 부드럽게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민주가 그러더구나. 네가 정말로 주현이를 소중하게 여긴다고 말이야.”


“네. 소중한 부원이고, 친구니까요.”


이 대답을 할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주머니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주머니가 깍지를 풀고 팔짱을 낀 자세로 바꾸었다. 그러자 상체가 자연스레 앞으로 기울었다.


“어제 애들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러면서 그간 해온 행동들을 돌아보게 되었고. 내가 정말…….”


아주머니의 눈이 천장으로 향했다.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행동일까.


나는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정말……. 애들에게 미안할 짓을 많이 했더구나……. 민주와 주현이에게 판사와 의사가 되라는 강요를 하고. 그래서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리도록 만들었고.”


조금씩 목소리가 잠겨 들어갔다.


“다른 데에는 조금도 한눈팔지 못하도록 엄하게 단속도 했어. 주말에도 쉬지 못하게 학원을 보내놓았고. 성적이 약간만 떨어져도 심하게 꾸중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지.”


아주머니가 자조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제 세 모녀가 정말 속 깊은 대화를 나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랬군요.”


나지막한 음성으로 답하자 아주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민주가 패션 분야에 꿈이 생겼다고 했을 때 나는 조바심이 났어. 판사가 되어 성공해야 될 아이가 성공하지 못할 분야를 갈망했으니까. 네가 아직 사회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는 거다, 공부를 잘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잔소리하기 바빴어.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민주와 멀어지고 말았고. 지금에 와서 보니 민주가 견디지 못할 만큼 스트레스를 주었던 것 같구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서 네, 혹은 아니오, 라고 대답하는 것은 주제를 넘는 짓이니까.


“주현이에게도 못할 짓만 저질러 왔어. 성적이 떨어졌을 때 심하게 나무라기만 했고. 혹시 지난 여름방학 때 일 기억하니?”


“아, 네. 기숙학원에서 무단이탈했던…….”


고개를 두 번 끄덕이는 아주머니.


“생각해 보니 주현이의 의사는 물어볼 생각도 안 하고 멋대로 기숙학원을 보냈더구나. 그 나이 때면 당연히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고 싶을 텐데. 스터디부를 그만두게 한 것도 순전히 내 명령이었고. 가출했을 때도 걱정보다는 학원을 빠진 일에 대해 화부터 냈고…….”


그날의 장면이 떠올랐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손찌검과 충격에 빠진 주현 누나.


아주머니도 그 순간의 일을 떠올렸는지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애들과 대화하며 되돌아보니 모두 내 감정만 앞세운 행동들뿐이었어. 나는 그게 전부 애들의 성공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아주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건 전부……, 내 욕심이었던 거야.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칭찬 한 마디라도 했었어야 했는데……. 그것조차도 하지 않았고. 애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


아주머니가 기어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후 훌쩍거리는 소리가 식탁 주위를 채웠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지? 어설프게 위로할 수도 없고…….


티슈라도 건네야 할까 생각하는 도중에 아주머니가 눈물을 추슬렀다.


“영재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네.”


“어제 민주와 주현이가 화해하도록 도와줬다고 들었어. 정말로 고맙구나. 덕분에 속으로 삭히기만 했던 일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었어.”


“저는 그냥 보고 있기 안타까워서 그랬을 뿐이에요. 오히려 주제넘게 참견한 것 같고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도 많이 반성했으니 이제는 민주와 주현이가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밀어주려고 해.”


아주머니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오른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도 주현이를 잘 부탁하마.”


“넵!”


힘차게 대답하고 그 손을 맞잡았다.


그런데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한 가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아주머니. 그런데 왜 오늘은……. 주현 누나가 스터디부에 못 왔나요?”


“아아. 그건…….”


아주머니가 가볍게 웃었다.


“주현이가 원하는 걸 들어주려고 그랬어.”


“어떤 거였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주머니가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


“학원을 몇 군데 그만두고 싶어했거든. 그래서 학교 마치자마자 바로 학원들을 찾아갔지. 주말에 다니는 곳과 밤늦게까지 하는 곳을 끊었어. 대신 과외는 계속 받고 싶다고 해서 남겨 놓았고. 알고 보니 과외 선생님이 민주 친구라고 하지 뭐니.”


용진 형 얘기였다. 그 형에게는 참 다행스러운 일이로군.


“그래서 오늘은 부 활동을 할 시간이 없었구나. 내일부터는 나갈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그리고 실례했습니다.”


나는 한 번 더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사실 과외 선생님 행세를 했던 일은 기분이 좀 언짢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도 피해 보지 않았잖니. 그러니 미안해할 필요 없어.”


말을 끝맺은 아주머니가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정말로 고맙구나.”


그 어조에서 진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네. 저야말로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대화가 끝나자 아주머니가 누나들을 불렀고, 누나들이 거실로 나왔다.


“저는 이만 갈게요. 주현 누나, 내일 봐요.”


세 모녀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나는 허리 숙여 인사한 뒤 현관을 나섰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걱정도 많이 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가장 이상적인 결말을 이루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중간고사를 위해 전력 질주하는 일뿐.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척 가볍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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