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113화평행선을 맞닿게 하는 방법(6)
* * *
주현 선배의 대답에 다들 침묵했다.
“화해하고 싶어한다고? 잘된 일 아냐?”
그 와중에 분위기 파악을 못한 규원이는 지아 누나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했다.
주현 누나는 세찬 고개짓을 하고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아, 네. 알겠어요.”
나는 일단 한발 물러나기로 하고는 자리에 착석했다. 그것을 신호로 다들 멈췄던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책상에 엎드린 채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민주 누나에게 깨톡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나 : 누나! 주현누나가 싫다고해요 ㅠㅠㅠㅠ
곧바로 민주 누나에게서 답장이 왔다.
민주 : 예상은햇지만.... 곤란하네.. 혹시 지금 통화가능?
나 : 아..지금은 부활동중이라 나중에할께요!
조심스레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다행히 아무도 이쪽 동향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 * * *
오늘은 평소보다 30분 일찍 부활동을 마쳤다. 마음 쓰이는 일 때문에 집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마친다는 나의 선언에 모두가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를 그 누구보다도 반기는 규원이조차도 오늘만큼은 상당히 차분한 태도였다.
가장 먼저 가방을 챙긴 지아 누나가 주현 누나의 책상 앞으로 향했다.
“주현아. 오늘도 우리 집에서 잘래?”
“응…….”
가방을 맨 주현 누나가 작은 소리로 답하는 동안, 나머지 인원들도 가방을 다 챙겼다.
우리는 부실을 나섰다. 별관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누나들과 규원이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참고로 주현 누나가 가운데에 낀 구도였다.
누나들은 오늘 저녁 메뉴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논의를 나누고 있었다. 논의라고 해봤자, 지아 누나가 일방적으로 의견을 내는 것에 훨씬 가까웠지만.
“나, 나! 함박 스테이크!”
규원이가 번쩍 손을 들며 논의에 끼어 들었다. 웬일로 떡볶이를 벗어났네?
“재료가 없어. 귀찮기도 하고.”
“그럼 언니, 내가 할게!”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이웃집 사이였지. 같이 저녁을 해 먹는 일도 흔할 것이다.
“안 돼. 너 며칠 전에 우리 집 와서 떡볶이하겠다고 했다가 다 태워 먹었잖아. 치우느라 얼마나 혼났는지 알아?”
“어, 음…….”
규원이가 입을 꾹 다물었고, 누나는 규원이를 째려보았다.
“사람은 누구든, 실수를 할 수 있다!”
규원이가 수습에 나섰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한 번의 실수로 너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지.”
“크윽!”
규원이가 가슴을 부여잡은 채 상체를 수그렸다. 이번 건 데미지가 좀 크게 들어온 모양이었다.
지아 누나는 그런 규원이를 내버려 둔 채 주현 누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주현아, 뭐 먹고 싶어? 피자 시켜 먹을까?”
지아 누나가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은 채 주현 누나의 등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응……. 좋아…….”
“오, 언니이! 나도 같이 먹자아!”
대화를 듣고 있던 규원이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그럼 우리 반반해서 내자.”
“좋지!”
그렇게 세 사람의 저녁 메뉴가 결정되었다.
학교 정문을 빠져나와 완만한 경사로에 접어들었다.
지아 누나와 규원이는 주현 누나를 사이에 둔 채 수다를 떨었다.
“지아 언니가 신경을 많이 쓰고 있네.”
윤희는 세 사람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규원이도 그런 것 같아.”
규원이도 어느새 주현 누나의 등에 손을 얹었다. 주현 누나는 놀라는 기색 없이 두 사람의 손길을 받아주고 있었다.
윤희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일이 참 어렵게 돌아가.”
나는 입김을 내뱉으며 긍정의 고갯짓을 했다.
“솔직히,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모르겠어.”
지아 누나와 규원이는 여전히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주현 누나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기색이었다.
문득 주현 누나가 그동안 이렇게 앞장서서 걸었던 적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 광경이 놀랍다거나,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역시 주현 누나가 이대로 스터디부를 떠나게 할 수는 없다.
“영재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윤희의 목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현 언니, 오늘 문제집에 거의 손 안 댔어.”
“그래?”
“응.”
가만히 고개를 움직이는 윤희.
“그만한 일을 겪었으니까.”
내 말에 윤희가 안타까움이 깃든 눈으로 주현 누나를 바라보았다.
“잘 해결되었음 좋겠어.”
윤희가 담담하게 소망을 담아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나와 윤희만의 소망이 아닐 것이다. 스터디부 멤버 모두가 바라고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야 한다.
“노력해볼게.”
경사로의 끝지점에 다다랐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 * * *
모두와 헤어지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민주 누나의 번호를 찾아낸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민주 누나의 음성에는 어딘가 조급함이 느껴졌다.
[영재야. 왜 이제야 전화했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이 정도로 보챌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누나. 일단 진정 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냐구.]
“죄송합니다 누님.”
빠르게 사죄했다.
[오오. 사회생활 잘하겠는데?]
“아, 네. 뭐…….”
여기에 대해선 적당히 넘어가야지.
[음. 그래서 주현이는 싫다고 한 게 확실한 거지?]
“네, 맞아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한숨 소리.
[후우. 어렵다, 어려워.]
“저도 같은 심정이에요. 왜 이렇게 꼬이는 건지.”
답답하기는 나 또한 마찬가지다.
[서로 평행선만 달리니까 그래.]
“누나답지 않네요.”
“뭐가?”
“아, 아니에요. 그냥.”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누나답지 않은 표현이라는 말을 했다간 나중에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나랑 얘기하는 것도 피하고 말야.]
혀 차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건 안 물어봤는데요…….”
[뭘. 보나마나지.]
누나의 체념 어린 어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누나의 말마따나 두 사람은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절대로 맞닿을 수가 없는 견고한 평행선.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해묵은 갈등이 암세포처럼 뿌리를 박고 있다. 때문에 둘 중 어느 누구도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민주 누나.”
나는 묵직한 음성을 냈다.
“저번에 저한테 얘기했죠? 주현 누나랑 다시 사이 좋게 지냈으면 한다고.”
[아, 그때……. 그랬었지.]
“그 마음 지금도 변함없나요?”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자 수화기 너머로 숨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의도야?]
“확인하고 싶어서요. 그게 정말인지.”
민주 누나가 정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내가 주제를 한참이나 벗어나는 발언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이 과정이 필요하다. 방금 전 뇌리를 스친 떠오른 해결 방안을 실천하기 위해서.
[지금 의심하는 거지?]
평소보다 냉랭한 어조에도 나는 침착하게 응답했다.
“아뇨. 단순한 확인이에요. 다른 의도는 없어요.”
[변함없어. 진심이야.]
민주 누나가 또박또박 힘주어 발음했다.
“고마워요.”
[그래서, 확인한 다음에는?]
“이제 주현 누나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아내야죠.”
[말은 참 쉽다.]
피식, 하는 웃음소리는 자조에 가까웠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주현이가 과연 그걸 들려줄까? 가족들에게조차도 내보이지 않는데.]
“아뇨. 제가 알아내려는 게 아니에요.”
[그게 뭔 소리야? 네가 아니면 누가 해?]
“누구겠어요. 바로 민주 누나가 해야 할 일이죠.”
[내가?]
“네.”
그러자 민주 누나가 잠시 뜸을 들였다.
[난 안 된다고 했잖아. 주현이는 나를 피하려고…….]
“왜 안 된다는 생각부터 하세요?”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갔다.
[그건……. 시도할 때마다 피하기 일쑤였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그래.]
누나가 무거운 목소리로 긍정했다.
“아까 얘기했잖아요.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마음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
침묵이 내리깔렸다.
“민주 누나. 제가 미약하나마 도와드릴게요.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거든요.”
[그게 뭔데?]
나는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진심.”
[응?]
“누나의 진심을 주현 누나에게 전할게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대화할 수 있도록.”
[정말로?]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는 희미한 의구심이 남아있었다.
“장담은 못해요.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겠다고 다짐했으니까.”
민주 누나의 묵직한 한숨이 귓전에 울렸다.
[우리 엄마랑 만나기 전에 나부터인가……. 좋아. 믿고 기다릴게.]
“좋은 소식 들고 올게요.”
[그래. 알았어.]
그러면서 만약 된다면 내일 저녁 중으로 자리를 마련해달라는 부탁도 남겼다.
통화를 마치고 나서 스마트폰을 움켜 쥐었다.
스스로 자처하여 맡게 된 막중한 책무였지만, 괜찮았다.
진심을 다해서 평행선을 맞닿게 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아주머니와의 갈등 또한 봉합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으니까.
* * * *
나는 집으로 곧장 향하지 않고 마트로 향했다. 때마침 엄마가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다.
“11,300원입니다.”
손님을 향해 얘기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흔들었고, 엄마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음료 진열대에서 가장 싼 캔커피를 골라서 카운터 앞으로 향했다.
“웬일로 이 시간에 마트를 다 오네.”
엄마가 바코드를 찍으며 말을 건넸다.
“단 게 좀 땡겨서.”
내가 동진 지갑을 꺼내려 하자 엄마가 손으로 만류했다.
“엄마가 살게. 그냥 가.”
“오늘은 내 용돈으로 사고 싶은데.”
“그러니? 알았어. 400원.”
나는 엄마가 내민 손에 100원 동전 네 개를 올려놓았다.
“그럼 나 들어갈게.”
엄마에게 인사를 한 뒤 마트를 나섰다.
때마침 근처에 벤치가 있었다. 나는 가방을 벗고 벤치에 앉았다.
아직은 여름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그런지 행인들의 옷차림은 무척이나 얇고 가벼웠다.
점차 짙푸르게 채색되는 하늘. 이윽고 가로등이 일제히 점등되었다.
“진심.”
조금 전 민주 누나에게 말했던 단어.
그동안 나는, 우리 스터디부는 진심이었기에 여기까지 헤쳐올 수 있었다.
이번 일도 따지고 보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면 되니까.
하지만 다들 지레 겁을 먹은 채 이것저것 고려하며 재기 바쁘다. 그러다 보면 결국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둘 중 한 명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의 진심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스터디부 활동을 하며 배운 것.
빈 캔을 옆에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번에 전화할 상대는 주현 누나.
신호음이 길게 이어진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주현 누나.”
[으, 응…….]
“지금 지아 누나 집이죠?”
[응…….]
“그럼 잠깐 통화 괜찮을까요?”
주현 누나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내비치다가 수락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민주 누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질문을 던지면서 저번에 둘이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주현 누나는 민주 누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왜 그런지에 대한 이유는 알려주지 않은 채.
이번에는 무어라 대답할까.
[왜, 왜, 그걸…….]
곧장 나쁜 사람이라는 평가가 나오지 않은 것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민주 누나가 예전처럼 관계를 회복하길 원해요.”
단호한 목소리로 사실을 전달했다.
[…….]
돌아오지 않는 대답.
여전히 피하려는 걸까?
하지만 그런다고 물러설 거였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누나에게 바로 전할 수가 없어서 제가 대신 전달 받았어요. 이건 진심이라고. 그리고 저도 이대로 보고만 있기에는 너무 안타까워서요.”
[나, 난…….]
“주현 누나. 한 번만 민주 누나와 만나보면 안 될까요?”
[어, 엄마랑 만나는, 건?]
“지금은 생각하지 말아요. 눈앞에 닥친 문제에 집중하자구요, 우리.”
나는 민주 누나와의 관계 개선을 우선순위로 내세웠다.
“주현 누나. 민주 누나랑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면 어떨까요? 이대로 계속, 소원하게 지낼 건 아니잖아요?”
[그, 그렇긴 한데…….]
여전히 망설임이 남아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갈등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더더욱 움츠리게 될 뿐이다.
“누나. 스터디드림 표어, 기억나세요?”
[아…….]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로군.
“헤매지 말아요, 망설이지 말아요, 우리 함께 나아가요.”
[마, 맞아. 그거.]
“주현 누나.”
진지한 어조로 호출했다.
“제가 같이 있을게요. 우리 함께 나아가요.”
한참 뒤에서야 주현 누나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그, 그럴게…….]
이렇게 삼자대면이 성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