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66화-우리가 만들어가는 방향(2)
저녁이 되자 우리는 스터디부 활동을 마치고 학교를 나섰다. 하늘은 완전히 어둑해진 상태였다.
우리는 학교 정문 너머로 펼쳐진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가장 선두에 선 지아 누나와 규원이는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윤희는 나와 나란히 서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고, 주현 선배는 멀찌감치 떨어진 채 걷고 있었다.
누가 봐도 모르는 사이 같아보이는 거리감.
“영재야! 내일 규원이랑 학교 마치고 놀러 가려는데 괜찮아?”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지아 누나는 기대감으로 들어 찬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래도 된다며 흔쾌히 수락했다.
이렇게나 예쁜 사람이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데, 당연히 허락해야지!
“와. 우리 부장님 최고!”
누나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내 선택이 아주 탁월했어.
속으로 흡족함을 느끼는 와중에 규원이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헐. 언니가 부탁하는 건 바로 들어주다니. 너 만약에 내가 부탁했으면 어쨌을 거야?”
“누나랑 같이 가는 거니까 허락하지.”
그러자 누나가 내게 윙크를 발사했다. 이거, 심장에 안 좋은데?
“그럼 말야, 내가 혼자 놀러 간다고 했으면?”
규원이가 자신의 빈약한 가슴팍을 가리키며 물음표를 던졌다. 초롱초롱한 눈빛과 함께 말이다.
“너는 일단 안 돼.”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답변을 내놓자 규원이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허얼. 대놓고 차별하다니…….”
“이게 바로 평소 행실의 차이라고.”
양 볼을 부풀린 규원이를 향해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규원이는 지난번에 대형 폭탄을 터뜨린 전과가 있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니 여기서는 들먹이지 않기로 했다.
“규원아. 그래서 내일 뭐할까?”
“음, 코인노래방부터 가자!”
금세 기분이 풀린 듯 규원이는 지아 누나와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 윤희가 돌연 모두가 뒤로 미뤄놓은 화두를 입에 담았다.
“그런데 좀 전에 주현 선배는 왜 그런 발언을 한 걸까?”
나는 곧장 뒤편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거리가 꽤 멀었다.
우리들의 대화가 들리지는 않겠군.
“글쎄.”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린 다음 주현 선배가 했던 말을 곱씹어보았다.
-아무 소용없어. 공부는…… 혼자, 하는 거니까.
무심코 튀어나온 듯한 혼잣말.
평소에 입을 다물고 살다시피 하는 탓에 더더욱 주목을 끌었다.
윤희가 깊이 들어가는 질문을 던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맞는 말, 이라고 생각은 해.”
답변하고 나서 윤희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래. 하지만 석연치 않아. 어조가 좀, 자조하는 느낌이었거든. 무심코 본심을 드러낸 것도 같고.”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며 말하는 윤희.
아마 그 순간 모두가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주현 선배답지 않다고.
전교 8등을 할 만큼 공부를 잘하는 수재.
필사적이라는 형용사가 어울릴 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는 우등생.
적어도 공부에 대한 자신감은 충분할 거라 여겼다.
그러나 오늘 내뱉은 혼잣말 덕에 주현 선배가 다르게 보였다.
무언가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우리끼리 쑥덕거린다고 무언가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니고…….”
“그건 그래.”
내 말에 대해 윤희가 동감을 표시했다.
결국 그런 얘기는 본인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하니까.
“우선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해 보자.”
“응.”
윤희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그래서 주현 선배는 무슨 이유로 스터디부에 들어오려고 했을까?
아무래도 주현 선배에 대해 알아가야 할 것들이 많아진 기분이 들었다.
경사로의 끝에 다다르자 모두들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까지 오니까 집에 간다는 실감이 드네.”
지아 누나가 청아한 목소리로 말하며 기지개를 켰다. 하복이 얇다 보니 흉부의 움직임이 더욱 도드라졌다.
나는 일부러 눈길을 돌렸는데, 하필 윤희와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윤희는 지아 누나와 이쪽을 번갈아 보고 나서 나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솔직히 억울한 감도 없잖아 있지만……. 이런 건 변명해봤자 안 통하겠지.
“아! 나도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
규원이가 동감을 표하자 나와 윤희 또한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일하게 주현 선배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각자의 집으로 헤어져야 할 시간.
우리들은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주현 선배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 묵언수행을 하는 시간.
누가 이 선배의 입에다 접착제를 발랐는지.
상대방을 둔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으려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혼자 다닐 때는 외로울지언정 이런 불편함은 느끼지 않았는데.
나와 주현 선배의 관계는 이대로 쭉 평행선을 달리다 끝나는 걸까.
문득 며칠 전 지아 누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위기감을 느꼈다고. 그것은 비단 지아 누나만이 느낀 것이 아닐 테다.
나는 지난 몇 달 간 겪은 경험들을 통해 배운 게 하나 있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점.
기다리기만 해서는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선배. 오늘 했던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닌 건가요?”
주현 선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미세하게 움찔 떠는 눈썹.
애초에 찌를 생각으로 내던진 화제다.
반응을 보였으니 일단은 긍정적인 신호라고 볼 수 있겠군.
“아, 아냐……. 아무 의미, 없어.”
주현 선배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좀 더 물고 늘어질 생각이었는데 그만둬야겠군.
“나, 곧 학원, 이라서…….”
그 말을 끝으로 주현 선배가 나를 지나쳐서 달리기 시작했다.
많이 불편했었나.
어느 정도 의도하기는 했지만, 곧장 줄행랑을 칠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점차 멀어져 가는 주현 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아직은 시간이 많이 필요해 보였다.
* * * *
다음날.
2교시 수업 끝나자 나는 교과서와 노트를 책상 서랍에 집어넣었다. 그런 뒤 칠판 옆에 있는 게시판으로 향했다.
지금 내 관심사는 단 하나. ‘시험기간 한정 주말 학생 교사 모집’ 게시물이다.
신청자 명단을 확인해 보니 여전히 내 이름뿐이었다.
문화상품권 3만원이면 엄청 매력적인 포상 아닌가?
“웬일로 노트를 안 보네.”
윤희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가 보고 있는 게시물을 손으로 슬쩍 들췄다.
“아, 이거. 보기보다 엄청 관심 있어 하는구나.”
“음, 뭐. 일단 신청을 했으니까.”
“문화상품권 3만원…….”
중얼거리던 윤희가 검지로 입술을 살짝 눌렀다.
나와는 달리 윤희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포상은 아닐 것이다.
“역시 할아버지가 낸 아이디어겠지?”
“어, 응. 그런가 봐.”
속으로 뜨끔했지만 무사히 잘 대답했다.
“따로 들은 건 없고?”
“당연히 없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질문이었지만 자연스럽게 대처했다.
“그러는 너는?”
되묻자 윤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데 진짜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 같이 공부한다는 느낌이 들 것 같거든.”
칭찬이나 다름없는 말이어서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갑자기 기분 좋아 보이는데?”
“응?”
고개를 틀자 내 옆모습을 빤히 보던 윤희와 눈이 맞았다.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길래.”
“이 3만원 갖고 뭘 할지 상상하다가……. 하하.”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살짝 어색하게 답했다. 그때 누군가의 팔이 내 목을 걸고 들어왔다.
“뭐야. 나만 쏙 빼놓고 비밀 얘기라니!”
바로 규원이였다.
“그냥. 이거 보고 있었어.”
윤희는 차분하게 응대했다.
“오오! 어디 보자.”
규원이의 흥미가 게시물로 옮겨갔다. 덕분에 규원이의 팔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에이, 뭐야. 어제 본 거잖아.”
“그나저나 넌 왜 갑자기 목을 걸고 그러냐. 아프잖아.”
“그냥 조금 서운해서 그랬지. 나만 빼놓고 그러기 있기 없기?”
샐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규원이.
“없, 기.”
첫 음절을 강조하여 답했다. 그제야 규원이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음……. 진짜로 해볼까.”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윤희.
“밑져야 본전인데 해보는 건 어때? 이미 규원이 공부도 봐주고 있잖아.”
“그래 해 봐. 나는 하고 싶어도 못한다구.”
규원이도 거들고 나섰지만, 윤희는 대답 대신 신음성을 낼 뿐이었다.
“셋이 모여 있으니까 그림이 따로 없네.”
도연이도 흥미를 보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도연아아.”
규원이가 도연이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옳지옳지 우리 규원이. 그나저나 뭐 보고 있어? 혹시 학생 교사 어쩌구 하는 거?”
“응응!”
규원이가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자 도연이가 빙긋 웃고 나서 게시물을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포상이 꽤 맘에 든다.”
“이참에 한 번 해보는 건 어때? 너도 공부 꽤 하잖아.”
“와. 영재한테 공부로 칭찬 듣는 날도 다 있다니.”
도연이가 가볍게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그러고는 윤희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윤희야, 너는?”
“글쎄.”
“으흑. 역시 나한테는 아무도 권하지 않는구나. 공부를 못해서 너무 술풉니다.”
상심에 빠진 연기를 하는 규원이. 나는 그런 규원이를 내버려둔 채 윤희에게 말했다.
“여러모로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해.”
“봐. 영재도 저렇게 말해 주잖아.”
옆에서 도연이까지 거들자 윤희가 내게 시선을 보냈다. 이윽고 결심이 선 듯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그래. 변하기로 했으니까.”
윤희가 치마 주머니에서 꺼낸 샤프로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기입했다.
“너네 둘이서만 하면 힘들겠지? 나도 도와줄게.”
도연이가 시원스레 내뱉고는 신청란에 자신의 이름을 기입했다. 이로써 2반의 학생 교사는 총 3명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셋을 끝으로 모집이 마감되었다.
* * * *
토요일이 밝았다.
오늘은 평일보다도 햇살이 더 강했다. 날짜는 아직 6월 초인데, 벌써이러면 7월에는 대체 어쩌려고…….
나는 사복을 입었다. 그런 뒤 빠뜨린 짐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나서 가방 지퍼를 닫았다.
오늘부터 기말고사가 끝날 때까지 제일고의 모든 교실이 개방된다. 동시에 학생 교사 활동 시작일이기도 하다.
“오빠 설마, 학교 가?”
방을 나섰더니 슬기가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내일 수업해야 하거든.”
“응? 수업? 오빠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인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슬기.
“그런 게 있어.”
적당히 답해 주고 현관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서 학교 앞 경사로까지 다다랐다.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윤희가 시야에 들어왔다.
“윤희야.”
덥고 지친 와중에 반가운 얼굴을 보자 힘이 솟아났다.
윤희가 빙그레 웃으며 인사했다.
연분홍색 롱티셔츠에 흰색 칠부 스키니의 조합이 보기 좋았다. 바지 끝단은 단정하게 접은 상태.
주말이라 그런지 오늘은 운동화 대신 가벼운 샌들을 신고 있었다.
“걸어서 온 거야? 땀이 엄청나네.”
윤희가 가까이 다가와서 내 안색을 살폈다.
“운동이야, 운동.”
나는 손등으로 이마를 슥 닦아냈다.
“더 찌워야 할 마당에 무슨…….”
“은근 상처 주네.”
“하지만 사실인 걸.”
끝끝내 팩트를 고수하는 거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언제쯤 멸치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
그런 내 모습에 윤희는 오히려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경사로를 따라 올라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의외로 학교에 가는 애들이 많이 보였다.
조금은 기대를 해봐도 되려나.
“영재야. 넌 긴장 안 돼?”
입을 열면서도 윤희는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되기는 하지만. 못할 정도의 일은 아니니까.”
내가 낸 아이디어인데 우는 소릴 하면 안 되지. 문화상품권 3만원도 걸려 있고.
윤희가 걸음을 멈추더니 한숨을 토해냈다.
“조금 전까진 괜찮았는데, 학교가 가까워지니까 갑자기 떨려.”
“너무 걱정마.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래야 하는데…….”
윤희가 왼손을 가슴에 얹고 심호흡을 했고, 나는 그런 윤희의 오른손을 맞잡았다.
잡고 난 직후에 깨달았다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윤희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아! 이건 그냥……. 힘내라는 의미로.”
사실 스스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저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단지 그뿐인 이유.
그래서인지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응. 고마워.”
윤희가 활짝 웃었다.
우리는 학교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손을 놓지 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