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59화-나아가고 나아가서 4일차(1)
다음날 아침. 수학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나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마자 충전기에 연결해둔 휴대폰을 찾으러 갔다. 행여나 자고 있는 애들을 밟을까 싶어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확실히 혼자만 스마트폰이 아니니까 눈에 잘 띄긴 하네.
나는 충전기와 휴대폰을 미리 가방에 챙겨 넣었다. 가방 지퍼를 조용히 잠그는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으음…….”
상반신을 일으킨 윤희가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했다. 잠옷으로는 흰색 반팔 면티를 입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특정 부위의 굴곡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갈 정도의 사이즈.
이 이상 구경하는 건 위험하다!
나는 남자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얼른 시선을 피한 다음 화장실로 향하려고 했다.
그때 윤희가 목소리를 냈다.
“먼저 일어났구나.”
“어, 응. 어쩌다 보니. 너는 잘 잤어?”
나는 다시 윤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윤희가 무릎을 세워 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응……. 잘 잤어.”
윤희가 반쯤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러더니 손으로 앞 머리칼을 몇 차례 쓸어넘겼다.
부스스하게 떠 있는 머리칼에 반쯤 감긴 눈.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무방비한 모습이었기에 나는 그만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윤희가 그런 나를 응시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웃어. 웃지 마…….”
말을 끝맺기도 전에 하품을 하는 윤희.
그간 보여 준 도도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알던 그 심윤희가 맞나?
의외의 모습을 계속 연출하니 나는 또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으으. 너 진짜.”
윤희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얼굴에 나타나는 불만스런 표정.
나는 황급히 웃음기를 지웠다. 너무 눈치 없이 웃었나?
“앗, 미안해.”
“흥.”
윤희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다. 이거 큰일인데.
기분을 풀어줄 요량으로 윤희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윤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변명은, 아마도 통하지 않겠지. 금방 눈치채 버릴 테니까.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가장 좋을 것이다.
“저기, 윤희야…….”
윤희가 나를 일별하더니 휘휘 손짓을 했다.
“얼른 씻어. 애들 일어나기 전에.”
아까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태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완전히 풀린 것 같지는 않고…….
윤희 말대로 씻으러 가야 하나. 아니면 좀 더 붙잡고 기분을 풀어주어야 하나.
머뭇거리는 사이 문밖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모두 일어나! 지금 7시니까 준비하고8시까지 로비에 집합해!”
담임선생님표 기상나팔이었다.
그 소리에 애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어났다.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는 모습들이 흡사 관 뚜껑을 열고 나오는 좀비들 같았다.
“얼른. 그러다 제일 마지막에 씻으려고?”
“아, 아뇨.”
윤희의 재촉에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때마침 애들이 하나둘 자신의 스마트폰을 찾으러 어슬렁어슬렁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민할 새가 없구만.
“일단 씻고 올게.”
나는 부리나케 화장실로 뛰어갔다.
* * * *
숙소에서 제공한 아침 식사는 백반이었다.
나와 윤희, 규원이는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아침 식사를 했다.
잠에서 깼을 때만 해도 반송장 같았던 규원이는 어느새 원래의 활발한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아침에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다니까.”
“다 먹고 말해, 다 먹고.”
검지를 들고 지적하자 규원이가 물과 함께 입 안에 있던 것을 삼켰다.
“푸하! 맛있다아.”
“다들 잘 잤어?”
도연이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우리들의 자리에 끼었다.
“오오. 어서 와.”
역시나 가장 반겨주는 이는 규원이었다. 나와 윤희도 차례로 인사를 건넸다.
도연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규원이는 도연이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면서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반면 윤희는 두 사람의 대화에 참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원래 조용한 편이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아니면 아직도 아침에 있었던 일을 담아두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 * * *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우리들은 짐을 챙겨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서도 윤희는 창밖 풍경만 구경할 뿐 입술을 떼지 않았다.
이럴 때 참 곤혹스럽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할지, 아니면 윤희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으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들은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윤희의 동태를 곁눈으로 살폈다. 윤희가 시선을 눈치챈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왜 그랬어?”
먼저 포문을 열어젖힌 윤희가 야속하게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그만.”
“진짜 그게 다야?”
“음…….”
사실은 더 있다. 다만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쑥스러웠다.
고민하고 있자 윤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수작 따위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양.
마치 속내를 꿰뚫어 볼 것만 같은 맑고 투명한 눈.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거겠지?
“어, 음. 네가 그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준 게 처음이라서……. 신선하고 또, 좀, 웃긴…… 모습이어서…….”
결국 토로하고 만 속내.
말하는 동안에도 부끄러워서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갔다.
“그 순간에 얼마나 기분 상했는데.”
윤희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미안. 다음엔 절대로 안 그럴게.”
“다음이 어디 있어. 오늘로 수학여행도 끝인데.”
“아 맞다.”
나는 이마를 쳤다.
이놈의 정신머리 좀 보게.
윤희의 짧은 웃음소릴 냈다. 미간의 주름이 펴지고 눈매가 곡선을 그렸다.
“영재야. 그거 알아?”
“어떤 거?”
“나 사실 화난 적 없어.”
“뭐라고?”
깜짝 놀라서 반문했다.
그러자 윤희가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흘렸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속일 줄은 전혀 몰랐는데.
그럼 지금까지 속앓이한 건 대체 뭐가 되는 거냐고.
“어이가 없네.”
“네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그만…….”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윤희가 검지로 내 팔뚝을 살짝 찔렀다.
“미안. 다음엔 안 그럴게.”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하니 억울함이 좀 사그라졌다.
“알았어. 다음에는 진짜로 그러지 마.”
“그럴게.”
나는 버스 천장을 향해 한숨을 흘려보냈다. 여자들뿐인 곳에서 남자로 살아남기는 참으로 힘들구만.
그래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윤희가 남에게 장난을 거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그나저나 오늘은 어디로 가?”
윤희에게 질문했다.
“DDP에서 전시회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코스야.”
“DDP?”
“동대문데자인플라자. 수학여행 안내문 안 봤어?”
“보긴 했는데…….”
사실 다른 여행 코스에 더 정신이 팔려 있어서 4일차 코스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전시회는 뭐 하는지 알아?”
“이럴 땐 검색에 기대야지. 나도 잘 모르니까.”
윤희가 작은 핸드백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뒤 보란 듯이 흔들었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아냐. 잠깐 손목 풀어주는 것뿐이야.”
오늘따라 유독 장난을 많이 거네.
나는 뚱한 얼굴을 했고, 윤희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배시시 웃었다.
“흥.”
이번에는 내가 삐쳐서 고개를 홱 돌렸다.
“아하하.”
당황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소리 내어 웃는 윤희.
“네가 그러는 거 신선하다.”
아무래도 윤희에게는 먹히지 않는가 보다.
……그나저나 윤희가 저렇게 소리 내어 웃은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는 동안에도 버스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
동대문데자인플라자, DDP에 도착했다.
외관부터 무척이나 특이한 형태를 한 건축물이었다. 그 자체로도 놀라웠지만, 상상을 넘어선 규모에 한 번 더 경악했다.
윤희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보여줘서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사진보다는 실물이로군.
버스에서 내리자 담임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공지했다.
“DDP는 내부가 복잡하고 사람도 많으니까 선생님을 잘 따라와야 한다! 1층에서 전시회 보고 나면 2층에 가서 기념품 구매할 시간 줄 거야. 알았지?”
“네에!”
대답 소리가 우렁찬 걸 보니 다들 여기서 돈을 펑펑 쓸 모양이군.
선생님의 안내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들의 목적지는 어떤 예술가의 팝아트 전시회였다.
꽤 유명한 모양인지 우리 학교 학생들 말고도 관람객이 많이 보였다.
“윤희야. 넌 이 예술가가 누군지 알아?”
“아니, 나도 처음 들어. 미술 쪽은 애초에 잘 모르다시피 해서.”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예술가를 어떻게 알아.”
앞줄에 있었던 규원이가 어느새 우리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건 네가 그냥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나는 가볍게 타박을 주었다.
“그것도 그런데, 예술가 하면 다 고상한 이미지잖아. 나랑 안 어울려.”
“아, 그건 인정.”
사실 나도 예술 쪽과는 거리가 한참 먼 사람이니까.
“너네끼리만 담소 나누기야?”
도연이까지 합세했다.
“규원이는 멋대로 온 것뿐이야.”
“헐. 나는 들러리 취급이야? 이래 뵈도 스터디부원인데.”
규원이가 볼을 한껏 부풀렸다. 그러자 도연이가 눈웃음을 그리며 검지를 세웠다.
“그러고 있으니까 귀엽다. 볼 한 번만 찔러봐도 돼?”
“아, 안 돼! 내 볼은 소중하다구.”
“한 번마안.”
“싫어 싫어.”
둘이서 참 잘 노는구나.
윤희도 그리 생각했는지 피식 웃었다.
우리는 바닥에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 이동했다.
고풍스럽거나 우아한 그림이 전시되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직 선만으로 그려진 사람 형상.
얼굴에는 눈, 코, 입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또는 무엇을 표현했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그림도 있었다.
조금 건방지게 말하자면 나라도 충분히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작품들이었다.
물론 내가 했다면 그저 낙서로 끝나고 말았겠지만.
이런 게 바로 현대 미술이라는 건가.
나로서는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영역처럼 느껴졌다.
“나도 이런 거 엄청 잘 그리는데. 난 왜 이 사람처럼 안 되는 거야?”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닌 모양이네.
“그런 건 그냥 낙서니까 그렇지.”
윤희의 지적에 규원이는,
“역시 세상은 불공평해. 될 놈은 되고, 난 왜…….”
뜬금없이 불평을 입에 올렸다.
“요즘 미술은 오묘하구나.”
“잘 모르겠다는 뜻이지?”
내가 질문하자 도연이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래도 무척 도전적이고 인상이 강렬해서 재미있어.”
윤희는 비교적 깊이 있는 감상을 말했다.
한참을 구경한 끝에 우리는 전시장을 빠져 나왔다.
담임선생님은 우리들을 한 곳에 모아 놓았다.
“빠진 사람 없지?”
선생님의 물음에 애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냈다. 이후 우리는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서 2층에 있는 굿즈 상점으로 올라왔다.
“시간은 30분이면 되지?”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몇몇이 말대꾸를 했다.
“짧아요오.”
“더 주세요.”
하지만 선생님은 애들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앞으로 남은 일정 때문에 그 이상 주는 건 어려워. 알겠지? 그럼 30분 뒤에 여기서 보자!”
그 뒤로 더 이상 불만을 표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다들 기념품을 사기 위해 상점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니까.
우리들은 우선 바로 눈앞에 있는 상점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있는 바구니를 챙긴 뒤 진열대를 둘러보았다.
“이거 이쁘네. 아, 요것도 맘에 들고.”
규원이는 눈에 띄는 게 있으면 곧장 바구니에 담았다. 여기서 전 재산을 탕진하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윤희는 어느 한 굿즈를 들여다보며 엄지로 턱을 매만졌다.
도연이는 나와 붙어 다니면서 이것저것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나는 애초에 돈을 쓸 생각이 없어서 눈으로만 슥 훑어보았고.
“영재야.”
다른 코너로 향하려는 나를 불러 세우는 도연이.
“왜?”
“잠깐만, 시간 내 줄 수 있어?”
도연이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했다.
“무슨 일인데?”
“여기 말고 다른 데 가자. 진짜로 잠깐이면 되니까.”
“애들한테 안 말해도 돼?”
“응.”
우리는 상점을 나왔다. 도연이가 무언가를 찾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무슨 이유일까.
의문을 품은 채 잠자코 도연이의 뒤를 따랐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까지 와서 도연이가 발걸음을 멈췄다.
할로겐 전등이 우리의 머리 위를 밝히고 있었다. 좌우로 펼쳐져 있는 매우 널찍한 공간.
도연이가 돌아섰다. 결연함마저 느껴지는 눈빛.
도연이의 동공에 내 모습이 언뜻 비쳤다.
“영재야.”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
도연이가 나를 똑바로 마주보고 말했다.
“좋아해.”
주변의 모든 소음이 지워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