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58화-갈팡질팡하며 3일차(3)
나는 벤치로 향하는 도중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번 더 전화를 걸어보았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지만 끝내 연결이 되지 않았다.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지?
의문을 느끼는 찰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윤희인 줄 알고 기뻐했으나 액정에 표시된 이름을 보고는 탄식했다.
“왜, 이규원.”
[영재야아!]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르기에 나는 잠깐 수화부를 귀에서 멀리했다.
“갑자기 소리 지르면 어떡하냐. 놀랐잖아.”
[미안 미안. 근데 윤희랑 연결됐어? 난 안 되던데.]
내가 혼자 찾으러 간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아니, 안 돼. 계속 신호음만 가고.”
[뭐 때문에 그러는 거지? 길을 잃었나?]
“야. 길 잃은 거랑 전화 안 받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
[……아!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럼 외계인이 납치해갔다거나?]
휴우.
나는 짤막한 한숨을 내뱉고 나서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있겠냐.”
웬일로 다른 사람 걱정을 다 하나 했더니만 이번에도 엉뚱한 소릴 하는구만.
[에이, 나도 농담한 거지.]
“자각은 있었네.”
[그래도 에바랜드를 벗어나지는 않았을 거 아냐.]
“당연히 그렇겠지.”
이번에는 웬일로 옳은 말을 하네.
[우린 지금 트위스트 앞에 줄 서 있거든. 나중에 윤희 찾으면 전화 줘. 파이팅!]
“알았어. 최대한 빨리 데려갈게.”
전화를 끊었다.
얘도 얘 나름대로 마음을 쓰고 있었군.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정면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윤희와 헤어졌던 벤치까지는 아직 더 이동해야 했다.
한 번 더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여전히 묵묵부답.
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몸집을 불리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벤치까지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하긴, 이 시간까지 여기에서 죽치고 앉아있을 리가 없지.
그저 생각나는 곳이 여기밖에 없었을 뿐.
나는 잠시 한숨 돌리기 위해 벤치에 앉았다. 그런 뒤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세워진 나무익스프레스 탑승구.
조금 더 먼 거리에 위치한 자이로드롭.
나는 턱을 괸 채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았다. 윤희는 에바랜드에 왔을 때부터
딱히 즐거워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런 윤희가 여기서 가볼 만한 곳은?
……아니, 이런 걸로 알아차릴 리가 없잖아!
“후우.”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박박 문질러댔다. 그러던 중 문득 윤희가 헤어지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가보고 싶은 곳이 있거든. 혼자서.
그러자 여러 가지 의문들이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이 의문들을 해소하려면 방법은 오직 하나다.
윤희와 다시 만나는 것.
“혼자서라…….”
정확한 장소를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윤희에게도 목적지가 있을 것이다. 홀로 움직인다면, 아마도 우리들과 동선이 겹치지 않는 방향으로 갔을 터.
이 벤치를 기준으로 나와 도연이는 오른쪽 방향으로 갔다. 그렇다면…….
나는 고개를 왼편으로 돌렸다. 자이로드롭 탑승구가 있는 방향.
솔직히 이게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워낙에 간단명료한 생각으로부터 이끌어낸 결론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내 감을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좋아.’
나는 왼쪽 방향으로 걸음을 떼었다.
* * * *
도연이와 같이 다니는 동안 보지 못했던 놀이기구들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다만 대부분 연식이 있어 보였다.
난간의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다든지. 아니면 아예 오래되어 보이는 느낌을 준다든지.
한참을 가다 보니 사파리월드 매표소 앞으로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눈대중으로만 보아도 나무익스프레스 대기줄 정도였다. 아니면 그 이상이거나.
그러고 보니 팸플릿에 평균 대기 시간이 1시간이라고 적혀 있었지.
나는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을 꺼냈다. 이제 막 오후 5시를 넘기고 있었다.
집합 시간까지 앞으로 두 시간 남짓.
원래라면 이맘때에 도연이와 함께 사파리월드 투어 일정을 소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윤희를 찾기 위해 이탈한 시점에서부터 이미 물 건너가 버렸지.
이참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전화해 볼까.
나는 휴대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러다가 손을 멈칫했다.
왠지 이번에도 허탕으로 끝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진짜 어디로 간 거냐.
나는 낮에 안내 팸플릿에서 본 조감도를 상기했다.
여기서 좀 더 이동하면 장미축제를 하는 정원이 있다. 더 나아가면 편의 시설들과 기념품 상점이 위치해있다.
찾아볼 만한 곳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셈.
역시 감을 믿는 게 아니었던 건가.
하지만 후회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나는 다시 발을 움직여 장미 축제가 한창인 정원까지 도달했다.
나는 정원 입구에 세워진 아치형 문을 쳐다보다가 자석에 이끌리다시피 그곳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길 양옆으로 온통 장미 천지였다. 빨간 장미만 있는 줄 알았더니 푸른 장미, 분홍 장미 등등 가짓수도 많았다.
사방에서 풍겨오는 장미향. 이색적인 장소에 온 것만 같은 실감을 안겨 주는 강렬한 향기였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EVARLAND’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낯익은 연보랏빛 머리칼을 발견했다.
모든 걱정이 일순간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다리가 지칠 대로 지쳤지만 그래도 나는 달렸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내서.
점차 가까워져 가는 거리.
“심윤희!”
목청껏 외쳤더니 장미를 구경하던 윤희가 어깨를 한 번 움찔하고는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윤희야!”
마치 오랜만에 만난 사이처럼 반가웠다. 이윽고 나는 윤희 앞에 당도했다.
“겨우, 찾, 았네.”
숨이 차올라서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윤희는 내가 호흡을 정리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날 찾으러 왔다고?”
고개를 들자마자 질문을 던지는 윤희.
“응. 너 찾느라 한참을 돌아다녔어.”
“전화하지 그랬어.”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뭐지? 마치 한 번도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는 듯한 이 뉘앙스는?
“이미 여러 번 했는데?”
내 얼굴을 응시하던 윤희가 작은 핸드백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아……. 무음 모드로 해놓아서 몰랐어.”
“난 또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잖아. 전화도 안 받고.”
윤희는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적당한 때에 합류하려고 했는데 여기가 너무 좋아서 그만…….”
“아무튼 별일 없어서 다행이다.”
나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로 걱정했던 거야?”
“당연하지. 친구잖아.”
“그렇구나. 걱정했구나…….”
어쩐지 안심한 것만 같은 윤희의 표정.
“내가 진짜로 무신경했던 것 같아. 다음에는 안 그럴게. 미안해.”
“그 말 꼭 지켜야 한다?”
검지로 겨누었더니 윤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잠깐만. 규원이한테 전화할게.”
휴대폰을 꺼냈다. 규원이는 누구 씨와 다르게 신호음이 가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조금 전에 윤희랑 만났어.”
수화기 너머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오래 걸렸다고?]
“그 뒤로도 계속 전화 연결이 안 됐거든.”
[대애박.]
규원이가 놀라움을 표시했다.
“좀 있다가 합류할 생각인데 너네 어디에 있어?”
[우리? 우린 지금 나무익스프레스 앞에 있는데. 조금 전에 이것만 3번 탔어.]
순간 내 고막을 의심했다. 그걸 그렇게 많이 탄다고?
[애들이 재밌다고 한 번 더 타제. 그래서 다시 줄 섰어.]
“그, 그럼 네 번째 아냐? 안 무서워?”
[전혀! 게다가 이건 에바랜드의 명물이잖아. 최대한 즐겨야지.]
매우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지.
[아무튼, 우리 이 근처에서 안 벗어날 거니까 너네도 이쪽으로 오면 돼. 좀 있다 봐!]
저쪽에서 먼저 통화를 종료했다.
“……어떻게 그걸 여러 번 탈 수 있는 걸까?”
윤희가 나와 같은 의문을 표했다. 간간이 통화 내용이 들린 모양이었다.
“그러게. 우리가 이상한 건지, 걔네들이 이상한 건지.”
“끼리끼리 모이게 됐네. 겁쟁이들끼리, 강심장들끼리.”
“아! 진짜네. 무슨 우연의 일치일까?”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다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돌아갈까? 그걸 타지는 않을 거지만.”
윤희에게 제안하면서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아차! 실수다.
나는 머쓱해져서 황급히 손을 거뒀다.
“그 전에 한 군데만 들렀다 갈래?”
“어디?”
“그건 따라와 보면 알아.”
눈웃음을 짓는 윤희.
그런 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곧장 그 뒤를 따라갔다.
윤희가 내 소매를 살며시 잡았으므로.
* * * *
윤희의 목적지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관람차였다.
휴대폰이 오후 6시를 알리고 있었다.
우리는 줄 끄트머리에 붙었다. 입간판에 ‘대기 예상 시간 15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거 타고 애들이랑 합류하면 3일차도 끝이구만.”
“그렇네.”
윤희가 작게 고개짓을 했다.
“그나저나 너 혼자서 어디 갔다 온 거야?”
“그냥, 여기저기 돌아봤어.”
대답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나는 납득의 표시로 머리를 움직였다. 프라이버시의 영역이라면 더이상 파고들 생각이 없으니까.
윤희는 핸드백에서 스마트폰을 꺼내고는 내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사진도 좀 많이 찍었고.”
내가 윤희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동안 보았던 놀이기구의 사진이 많았다. 미처 보지 못한 것들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어느새 차례가 다가왔다. 우리는 대관람차에 탑승했다.
4명은 너끈히 탈 정도로 넓은 실내를 갖추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감탄하면서 양옆을 번갈아 보았다. 윤희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도연이랑 어땠어?”
윤희의 표정은 언제나와 같이 진지했다.
나는 이런저런 놀이기구를 탔던 일과 스낵 코너에서 공짜 풍선을 받았던 일 등을 얘기했다.
대관람차가 천천히 상승하자 발 디디고 있었던 지상과 멀어져 갔다.
“윤희야. 물어봐도 될까?”
“왜 혼자서 다녔는지?”
척하면 원하는 답이 나오는 게 윤희다웠다.
“말하기 어려운 거면 말고.”
고개를 젓는 윤희.
한숨을 한 도막 토해내고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수학여행으로 여길 두 번이나 왔어. 초6 때, 그리고 중2 때. 너라면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 거라고 생각해.”
윤희가 눈길을 약간 내리깔았다.
“응. 알 것 같아.”
윤희의 과거를 알고 있으니까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이런 델 오면 난 항상 혼자 다녔거든.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지만. 비참, 했다고도 할 수 있겠네. 하지만 익숙해지니까비참한지, 외로운지, 쓸쓸한지 그런 느낌도 안 들었어. 그래. 나는 원래 혼자니까. 좋지도 않지만 특별히 문제될 것도 없다고.”
윤희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지난날을 반추하며 애수에 젖은 그 눈에 그늘이 살짝 드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랑 달라. 스터디드림이 있고, 우리 2반이 있으니까. 더 이상 외롭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놀이기구 사진은 왜…….”
의문을 입에 담았다.
윤희가 다시 눈을 마주했다.
조금 전에 보았던 애수와 그늘이 말끔히 씻겨나가 있었다.
“그때에 눈에 새겼던 것들, 기억나는 것들을 일부러 찾아다닌 결과물이야. 기억하는 것 중 대부분은 여전히 있었어. 하지만 지금의 나는 더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니까. 같은 것을 보더라도 나는 더이상 외톨이가 아니라고 여길 수 있었어. 나는 변했구나, 그걸 체감할 수 있었어. 이제야 나는 그 시절 외톨이였던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깨달았고.”
“맞섰구나.”
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미련해. 하지만 이런 과정은 꼭 필요했다고 생각했거든.”
윤희의 진솔한 속마음.
나는 무언가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의 소용돌이였다.
대관람차가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영재야.”
윤희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개인 미소. 후련함마저 느껴졌다.
“응. 나도.”
그 손을 맞잡았다. 지금 이 순간 나 역시 진심이라고.
석양이 우리들의 맞잡은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이 적셨다.
3일차가, 그렇게 끝을 향해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