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30화-서로 다른 관성의 결말(6)
신혜민의 문자메시지를 받은 지 하루가 지났다.
오늘따라 수업 내용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1교시 수업도 채 끝나지 않은 상황.
평소의 컨디션이라면 수업 시간 중에는 선생님의 말과 칠판에 적힌 글씨에만 온 신경을 집중할 텐데, 오늘은 원래 집중력의 70~80% 수준밖에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는 한숨.
들어오겠다고 한 지 반나절만에 돌연 입부 취소를 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점 또한 내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내기는 다음 주 수요일까지.
오늘과 주말 이틀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홍보를 할 수 있는 기간은 단 3일뿐1
여태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했다.
교내 게시판에 포스터 부착하기.
쑥스러움을 무릎 쓰고 정문에서 홍보물 배부하기.
이제 남은 방법은 각 교실을 돌며 홍보하는 일.
내가 홍보를 하면 학생들이 입부를 해줄까. 불안감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왜냐면 스터디드림이 나름대로 알려졌음에도 여전히 입부 희망자가 0에 수렴하고 있으니까.
이 어려운 국면을 타개할 수 있을까.
마치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남은 기간 내에 입부 희망자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1교시 수업이 끝을 알렸다.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자마자 나는 뒷문으로 튀어 나갔다.
목적지는 당연히 1반.
마침 1반 교실에서 나오는 애들이 보여서 나는 다짜고짜 그들을 향해 외쳤다.
“저기! 신혜민 좀 불러줄래?”
그들은 서로를 한 번 마주 보다가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스터디부 얘기하려고? 잠깐만.”
한 명이 다시 교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 애와 함께 신혜민이 복도로 나왔다.
“둘이 잘 얘기해.”
그들은 그 말을 남긴 채 다른 곳으로 향했다.
나는 신혜민을 바라보았다. 신혜민은 귀밑머리를 배배 꼬며 시선을 다른 곳에 던지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 얼마 없는 관계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제 문자 말인데, 갑자기 왜 맘이 바뀌었어?”
신혜민이 벽에 어깨를 기대고는 콧숨을 내쉬었다.
“화난 거 아냐. 그저 이유가 궁금해서.”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더니 그제야 신혜민이 입술을 움직였다.
“어제 친구들하고 놀다가 스터디부 얘기를 했거든. 그랬더니 스터디부 들어가면 자기들이랑 노는 시간 많이 줄어들겠다고 아쉬워 하더라구.”
개인적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이유였다. 학생이라면 자고로 공부가 우선 아닌가.
놀고 싶은 마음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학생의 본분을 내팽개칠 수는 없다.
결국 얘도 규원이와 비슷한 급이었던 건가…….
상당히 실망했지만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 알았어.”
대화는 이걸로 끝. 나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
“잠깐만. 아직 더 있어.”
“뭔데?”
“너네 반에 심윤희였나, 걔가 이미 들어와 있다면서.”
“응. 맞아.”
가면 소동 덕분에 윤희도 나름 유명인이 되었구만.
“근데 그게 왜? 무슨 문제 있어?”
“너희 둘은 같은 반이잖아. 나는 다른 반이고. 괜히 끼어들었다간 어색해질 것 같아서. 뭔가, 방해하게 될 것 같아.”
즉 눈치가 보인다는 얘기.
뭐, 이것도 따지고 보면 핑계에 불과한 말이긴 하지만.
“아무도 그런 생각 안 해.”
단언해도 신혜민에게 통하지 않았다.
“외부인이 성역에 함부로 끼어드는 거 아냐.”
“뭐야 그게.”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뜬금없이 성역이라니.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는 거 아냐? 그저 같이 모여서 공부를 할 뿐인 부인데.”
“너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래. 그런 느낌이 들어.”
느낌을 이유로 내세우면 이쪽에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애초부터 다시 생각해달라고 설득할 마음이 없기도 했고.
한 번 바뀐 마음을 돌이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삼자대면 때 충분히 겪어봤으니까.
그러므로 이유를 들은 것만 해도 충분하다.
“공부는 어쩌게?”
“혼자 해야지. 그래봤자 중위권밖에 못 가지만.”
“만약 들어왔으면 중상위권으로 갔을 거야.”
“그랬을지도. 하지만 지금은 즐거운 학교생활을 보내고 싶어. 추억을 만들고 싶어.”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한 번 주억거렸다.
“미안해. 괜히 기대하게 만들었네.”
“아냐.”
사과를 받으려고 부른 게 아니었으므로 나는 손을 내저었다.
신혜민과 헤어지고 난 뒤 나는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함에서 신혜민이 보낸 문자를 삭제했다.
다시 원점에서부터 시작이다.
* * * *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후우.
나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공기 중으로 날려 보냈다.
신혜민에 대한 미련은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간 해온 노력이 허사가 됐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기운이 나질 않았다.
더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책임감도 내 어깨를 짓눌렀다.
텅 비다시피 한 교실을 무심하게 둘러보다가 필기 노트를 꺼냈다. 큰맘 먹고 두꺼운 놈으로 샀는데 어느새 반 넘게 쓴 상태였다.
조만간 눈물을 머금고 새로 사야겠구만.
오늘 필기한 부분을 찾아서 펼쳤다.
손이 수업을 못 따라간 줄 알았더니 중요한 내용은 대부분 필기가 되어 있었다. 습관이 이래서 무섭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노트에 적힌 글자들이 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오늘은 덮어야 되려나.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턱을 쳐들자 새하얀 천장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어떡하지?
머릿속이 백지나 다름없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는 중에 도연이가 다가왔다.
“천장에 문제집 매달려 있어?”
도연이가 이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니…….”
답변하는 음성에 맥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 좋아 보여.”
도연아. 넌 정말 심성이 곱구나. 우리 반에서 이토록 내 상태를 신경 써주는 애는 너밖에 없을 거야.
“도연아.”
“응.”
“스터디부 들어와 줘.”
거의 애원하는 어조였다.
“학원 시간이랑 겹쳐서……. 전에 얘기했잖아.”
미안해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도연이.
“알아. 그냥 한 말야.”
나는 자세를 똑바로 했다. 도연이가 윤희에게 말을 걸었다.
“윤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독서를 하고 있던 윤희가 책 페이지를 손가락에 걸어둔 채 도연이와 눈을 마주했다.
“옆자리라서 알고 있었어.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이 가고…….”
“이제는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라는 거지?”
도연이가 짓궂은 미소를 그렸다.
반면 윤희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저 침착함만큼은 정말이지 배우고 싶다.
“그렇기다보단, 그냥 보면 알 때가 있어. 영재뿐만이 아니라.”
“그래?”
윤희가 도연이를 향해 살며시 고개를 움직였다.
“직감이랄까, 그런 게 맞아떨어질 때가 많아. 내가 성격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행동 패턴을 통해서 유추해 보기도 하고.”
그래서 내가 왜 심란해하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다고 한 거였군.
“도연이 네가 왜 우리들 자리에 자주 놀러 오는지도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윤희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도연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거리자 윤희가 말 대신 나를 향해 곁눈질했다.
그것을 눈치챈 도연이가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고는 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맞지?”
“아, 아냐. 그런 거 아니니까…….”
안절부절못하는 도연이를 향해 윤희가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대놓고 곁눈질을 한 덕에 나도 무슨 얘기인지 감을 잡았다.
하지만 이런 걸 티냈다간 오히려 눈치 없는 놈이 된다. 그러므로 모른 척하기로 했다.
윤희는 다시금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도연이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두어 번 했는데 양 뺨이 발그스름했다.
“어쨌거나 오늘따라 기운이 없어 보이길래 말 걸어본 거야. 우리 영재, 그런 애 아니잖아.”
“그으랬나?”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응! 그러니까 어서 기운 차렸으면 좋겠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노력한 게 보답 받는 날이 분명히 올 거야.”
도연이가 해맑게 웃었다. 보는 사람의 기분마저 밝게 해주는 에너지 넘치는 미소였다.
“고마워.”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난 이만! 둘이 좋은 시간 보내.”
도연이가 교실을 나섰다.
노력한 게 보답받는다, 인가…….
사실 그 노력한테 배반당한 것 같아서 이러고 있는 건데 말이지.
그래도 응원 한 마디가 울적함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이러니 도연이에게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이 호감은 어디까지나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호감이니 오해가 없기를.
이제 교실에 남은 인원은 나와 윤희뿐이었다.
문득 벽시계를 보니 슬슬 급식실로 출발해야 할 때였다.
노트를 서랍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윤희도 책을 집어넣고 일어섰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은 타이밍이었다.
우리는 배식을 받은 뒤에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서로 다른 자리에 앉았을 텐데, 윤희가 맞은편에 앉을 걸 보니 나름대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 신혜민이라는 애, 결국 안 들어오는 거지?”
오늘도 날카로운 직감을 선보였다.
나는 그렇다고 답하며 고개를 움직였다.
“사실 부실 견학을 미룬다고 했을 때부터 안 좋은 예감이 들었어.”
“진짜 대단한 직감이네. 귀띔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저번에 내 말을 들으면 불길하다고 그래서.”
어제는 왜 말꼬리를 흐리는가 했더니…….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부원 모집 생각보다 어렵네.”
말을 끝맺은 뒤 한숨을 내뱉었다.
“오늘 1교시에 신혜민한테 가봤거든. 이유라도 들어보려고.”
“친구들이랑 노는 게 더 좋대?”
근사치의 답을 입에 담는 윤희. 아마 어제 신혜민이 보여준 모습에서 유추한 것이겠지.
“그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어.”
“의외네.”
“자기는 다른 반인데 우리는 같은 반이잖아. 그래서 끼어들려니 마음에 걸린대.”
“음. 그 심정 알 것 같기는 해.”
윤희가 양손을 포개더니 그 위에 자신의 턱을 얹었다.
“이미 자리가 잡힌 곳에 들어가려고 하면 괜히 눈치 보이잖아. 자연히 행동도 조심스러워지고. 그 애한테는 그게 불편하게 다가왔겠지.”
“부담 가질 필요가 전혀 없는데.”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르니까.”
그러더니 윤희가 고기완자 하나를 내 식판에 올려주었다.
“그러니까 이번 일로 너무 침울해하지 마. 노력하면 분명 보답받는 날이 올 거야.”
도연이가 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윤희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한동안 윤희를 바라보았다. 진짜로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밥 식겠다.”
윤희가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나도 부랴부랴 밥덩이를 입에 넣었다.
식은 지 오래였지만 아무렴 어때.
나는 끈질긴 놈이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 * *
윤희와 도연이의 위로를 받은 덕에 평소의 집중력을 완전히 되찾았다.
공부가 잘되는 이 감각. 그것이 나를 고양시켰다.
종례가 끝나자 우리는 곧장 스터디부로 향했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은 우리는 각자 할 일을 했다. 나는 공부. 윤희는 독서.
어제 새로 산 문제집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윤희가 관심을 표했다.
“그 문제집 잠깐만 봐도 될까?”
“갑자기 왜?”
“어제 얘기했잖아. 추천하는 문제집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아, 맞다.”
나는 문제집을 넘겨주었고, 윤희는 문제집을 꼼꼼하게 살펴보고는 맘에 든다고 얘기했다.
“다른 문제집도 구경해 보는 게 좋을 텐데?”
“이 정도면 나랑 잘 맞을 것 같아.”
나는 책장으로 가서 빼곡하게 꽂혀있는 문제집 중 하나를 골라 윤희에게 건넸다. 윤희가 페이지를 몇 장 넘겨보더니 신음성을 흘렸다.
“확실히, 네 말대로 해야겠어.”
“거봐.”
윤희가 옆 책상에 문제집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네 거 어제 산 거 맞지?”
윤희가 갑자기 화살을 다른 방향으로 쏘았다.
“새 거라기에는 상태가 좀 그렇던데……. 가격도 서점보다 훨씬 저렴하고.”
“항상 헌책방을 이용하거든. 엄마가 용돈을 거의 안 주니까 내 나름 방법을 찾은 거지.”
나는 적당히 그럴싸한 대답을 내놓았다.
“헌책방이 아직도 있었구나…….”
윤희는 묘한 데서 신기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라면 용돈 받아서 문제집을 샀을 것 같아. 기왕 공부하는 거, 새 걸로 하면 더 기분이 나니까.”
물론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현실이 녹록치 않다.
“헌책방이 집에서 훨씬 가깝거든. 단골이기도 하고.”
“그렇구나.”
윤희의 표정을 살펴보니 이번에도 잘 넘어간 듯했다.
그때 선명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노력이 보답받는 날이 온다고 하더니 이걸 두고 한 얘기였던 건가!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마주보았다. 윤희의 맑은 눈동자에 어려 있는 기대감.
“지금 가요!”
나는 반색을 표하며 문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문을 열자 면식이 있는 사람이 정다운 인사를 건넸다.
“안녕? 견학하려고 왔어.”
지아 누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