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29화-서로 다른 관성의 결말(5)
“관심 있다니깐?”
내가 우두커니 서 있자 그 애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로? 들어오려고?”
내 귀를 의심하는 게 아니다. 들어오고 싶다는 말을 한 번 더 듣고 싶었던 것이다.
“응. 입부하고 싶어.”
그 애가 시원스레 머리를 끄덕였다.
“오오! 신혜민 박력!”
“완전 멋져어!”
그 애, 신혜민을 두고 1반 애들이 일제히 찬사를 쏟아냈다.
“그래? 난 진짜 관심 있어서 그런 건데.”
애들을 향해 대꾸한 신혜민이 검지 손으로 귀밑머리를 배배 꼬았다.
나는 감격에 휩싸인 채 신혜민을 바라보았다.
역시 노력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구나!
속으로 만세 삼창을 외쳤다.
신혜민이 어떤 애인지는 아직 판단할 수가 없다.
공부를 하는 기본 자세가 되어 있는지, 모의고사 성적은 어떤지 등.
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하다.
“이참에 신고식도 해야 하는 거 아냐?”
1반 반장의 발언이었다.
“신고식이라니. 스터디부가 얼마나 건전한데.”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큰일 날 소리를 하는 건지.
신고식 잘못했다가 언론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곳이 어디 한두 군데인가.
“그래도 우리 학교에서 남자는 너뿐이잖아. 뭐라도 하나 하는 게 어때? 기념될 만한 걸로 말야.”
뭔가 강요하는 느낌인데. 게다가 왜 그런 것이 집착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너네 재미 보려고 그러는 거지?”
신혜민의 한 마디에 다들 이구동성으로 원한다고 외쳤다.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는 신혜민.
어쩌면 관심받는 걸 즐기는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시쳇말로 관심종자…… 는 좀 실례되는 생각이겠고.
신혜민이 돌아서서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한영재. 나 봐봐.”
신혜민이 말하는 대로 몸을 돌리자 서로 마주 보는 자세가 되어버렸다.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가까운 거리.
어깨에서 치렁거리는 까만 생머리에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긴 속눈썹이 조화를 이루었다.
신혜민은 나보다 키가 약간 작았다. 간신히 남자의 자존심은 지킨 셈이다.
나보다 키 큰 여자애를 마주하면 왠지 모르게 압도당하는 기분이 드니까.
“뭘, 하려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뭐 하긴. 기념이 될 만한 걸 하려는 거지. 애들도 원하고 있으니까.”
신혜민의 표정이 음흉해 보였다.
“그러니까 그게 뭔데?”
교탁 앞에 서서 홍보하던 때와는 다른 긴장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음. 간단한 걸로 하자. 몸으로 하는 거 말야.”
“뭐? 몸?”
놀라서 반사적으로 단어가 튀어나왔다.
“영재야.”
신혜민이 이상야릇한 눈웃음을 지었다.
“잘 생각해 봐. 여자와 남자가 이렇게 마주 보고 있을 때 무얼 해야 할까?”
“어, 어?”
몸으로 하자는 말에서 이미 당황스러움을 느낀 마당에 추가 공격까지 들어오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머!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런 생각은 안 했어.”
“그으런 생각이 뭔데?”
신혜민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몰아세웠다.
이런 류의 대화에서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변명을 하면 할수록 개미지옥에 빠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계속 어버버거렸다.
반면 1반 애들 전부가 기대에 찬 함성을 쏟아내고 있었다.
난 그저 스터디부를 홍보하러 왔을 뿐인데 어쩌다가 이런 꼴을…….
“자. 분위기도 무르익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해보자구.”
신혜민이 말아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주먹으로 대체 무얼 하려고? 설마, 초면부터 주먹질?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그녀의 주먹에 집중했다. 주먹이 내 복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헐, 실화냐!
눈을 질끈 감았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고, 중간 지점에서 우뚝 멈춰 있는 그녀의 주먹을 발견했다.
“빠!”
신혜민이 외침과 함께 주먹을 완전히 펼쳤다.
“…….”
정적이 흘렀다.
만화에서 가끔 쓰이는,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면서 지나가는 연출을 현실에 빼다 박아 놓은 것 같은 썰렁함.
“……는 농담이고! 악수하자고! 하하.”
신혜민이 무척이나 어색한 웃음소릴 냈다. 어물쩍 넘어가려는 속셈이 훤히 보였다.
반 애들이 신혜민을 따라 하나둘 헛웃음 소릴 내기 시작했다.
나도 거기에 전염되어 허허, 실소했다.
“그래. 악수면 되는 거지?”
“응, 맞아.”
악수를 하고 나서 신혜민이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확신했다.
이 내기의 승자는 바로 나라고.
* * * *
신혜민이 오늘은 부실 구경을 해보고 싶다고 하여 종례가 끝나면 바로 2반 교실 앞으로 와 있으라고 전해두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희소식을 당장에라도 규원이에게 알리고 싶었다. 규원이가 빨리 단념해주는 것만큼 나에게 좋은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당장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터디부에 나와 심윤희, 그리고 신혜민이 함께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광경을 직접 보여준다면 규원이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입을 떡 벌린 채 자신의 패배를 실감하지 않을까.
그런 장면을 상상하자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6교시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심윤희.”
서랍에서 소설책을 꺼내던 윤희가 내게 눈길을 보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춘 채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다.
“1반에서 한 명이 들어오겠다고 했어.”
윤희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그래? 다행이네.”
놀란 얼굴인 것에 비해 목소리는 담담한 편이었다. 지극히 윤희다운 반응.
“이제 홍보 활동은 끝이야?”
“아니지. 아직 두 자리가 남았잖아. 내 목표는 5명을 다 채우는 거라고.”
나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고생이 많아.”
윤희의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영재야!”
도연이가 내 책상으로 다가오자 윤희가 얼른 소설책을 펼쳤다. 그러자 도연이가 윤희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거 무슨 책이야?”
“아, 이거……. 소설.”
도연이는 윤희가 손에 쥔 책 제목과 작가를 확인하더니 곧장 반색을 표했다.
“오! 나 이 작가님 좋아하는데.”
“어? 정말?”
좋아하는 화제가 나온 덕분일까. 윤희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윤희야. 혹시, 너 「뿌리 내린 집」이라는 작품도 봤어?”
“그건 이 작가분의 데뷔작이잖아. 예전에 읽어봤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근데 도연아. 나한테 볼 일 있었던 거 아니야?
계속 쳐다보고 있자 그제야 도연이가 내게로 눈길을 돌렸다.
“윤희가 책에 대해서 많이 아네.”
“책을 달고 살잖아.”
나는 당연하다는 투로 답했다.
“근데 아까 1반에는 무슨 일로 갔어? 거기에 아는 애 있어?”
나는 스터디부 홍보를 하러 간 것뿐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진짜 다른 의도는 없었으니까 오해하지 말아 줘.”
“그랬구나. 아까 애들이 그렇게 놀리길래 뭔가 싶었지.”
“애들이 날 가만두질 않아.”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거 복 받은 거야.”
“으으. 전혀 복이 아니라구.”
질색하자 도연이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책상을 손으로 짚은 채 상체를 약간 수그렸다.
“요새 보니까 너랑 윤희랑 자주 대화하더라. 스터디부하면서 많이 친해진 거지?”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역시나 다들 눈치챘구만.
“난 보기 좋다고 생각해.”
도연이가 활짝 웃었다.
“그렇구나.”
나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도연이는 책에 집중하고 있는 윤희를 넌지시 바라보았다가 다른 화제를 입에 올렸다.
“그래서, 홍보 효과는 봤어?”
“응. 한 명 들어오겠다고 했어.”
다시 광대가 한껏 올라가려고 했다.
너무 티내면 안 되는데, 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 축하해.”
“고마워.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말고. 특히 이규원한테는.”
“걱정마. 그 정도 눈치는 있어.”
도연이가 눈웃음을 지었다.
문득 벽시계를 확인해 보니 쉬는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곧 종 치겠다.”
“진짜네. 그럼 난 이만.”
벽시계를 확인한 도연이가 손을 흔들고 나서 제자리로 향했다.
* * * *
남은 수업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종례시간이 다가왔다.
담임선생님이 전달사항을 간략하게 전파하는 것으로 종례가 끝났다.
그러자 애들이 가방을 챙겨 들고 잽싸게 교실을 빠져나갔다.
“나 먼저 나가 있을게.”
나는 잽싸게 가방을 챙기자마자 윤희에게 알렸다.
“응.”
복도로 뛰쳐나갔는데 신혜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앗다. 때마침 1반에서 나온 애들이 해맑은 미소를 그린 채 내게 손을 흔들었다.
하긴, 5교시에 그 난리를 쳤으니 그럴 만도 하지.
손을 들어 그들에게 화답하는 그때,
“한영재애!”
신혜민이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합장부터 했다.
“저기, 스터디부는 내일부터 가면 안 될까? 갑자기 중요한 약속이 생겼거든.”
“무슨 약속?”
“아, 그게…….”
신혜민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뒤편을 바라보니 여학생 세 명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약속이 생긴 모양이로군.
“그래. 그럼 내일부터 시작하자.”
흔쾌히 수락했다. 내가 이래뵈도 꽤 유연한 사람이라고.
“아 맞아! 폰 번호 좀 줘. 깨톡하게.”
신혜민이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나 2G폰이라서 문자로 해야 돼.”
“역시 범생이는 다르구나!”
대체 2G폰과 범생이의 상관관계가 뭔지.
그런 생각을 하며 번호를 입력해 주었다.
“그럼 나중에 문자 보내줄게!”
신혜민이 손을 크게 흔든 뒤 일행들과 합류했다.
“쟤구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윤희의 음성에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합장하고 있을 때부터.”
처음부터 다 본 셈이었다.
윤희는 눈에 안 띄게 숨어 있었다는 부연 설명을 했다.
윤희와 신혜민의 만남은 내일의 즐거움으로 미뤄야겠군.
“그런데 무슨 이유로 들어오고 싶다고 했어?”
“그냥 관심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뿐이었어?”
“왜?”
“아냐. 그냥…….”
갑자기 말꼬리를 삼키니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데…….
“스터디부 가자.”
내가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에 윤희가 앞장섰다.
어쩌면 물어보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윤희의 뒤를 따라갔다.
* * * *
저녁 6시 반.
나는 오늘자 스터디부 활동 종료를 선언했다. 평소 7시가 넘을 때까지 하던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일찍 마친 편이다.
“웬일이야?”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어.”
윤희가 궁금하다는 눈빛을 했다.
“슬슬 새로운 문제집을 사야 해서. 또 요새는 뭐가 나오는지도 확인해 보고.”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문제집 있어?”
“있긴 한데, 너한테 맞을지는 잘 모르겠어.”
“그래도 네가 추천해 주는 거면 나름대로 검증된 거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지.”
윤희가 가볍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 추천해 줘.”
“그럴게.”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경사로의 끝지점에서 헤어졌다.
나는 미래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에서 책을 묶고 있던 주인아저씨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나는 늘 해왔던 대로 곧장 문제집 코너로 갔다.
낙서가 좀 많거나 필기가 많이 된 문제집들을 걸러낸 끝에 비교적 상태가 깔끔한 문제집 두 권을 건져 올렸다.
가장 중요한 가격표를 확인해 보았다.
하나는 3,500원.
다른 하나는 4,800원.
내 동전 지갑에 있는 자금은 9,300원. 예산의 90%가 한 방에 나가는 수준이었다.
억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문제집에 쓰는 지출이야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가슴이 많이 쓰라린 것은 여전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며 계산대로 향하다가 문학 코너가 눈에 밟혔다.
저번에 윌리엄 브렌더의 「모든 물음표」를 찾기 위해 구경하기도 했지.
나는 문제집 두 권을 겨드랑이 사이에 낀 채 시집을 둘러보았다.
살 여력은 안 되니까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
내친 김에 소설책도 구경했다.
오늘 학교에서 윤희와 도연이가 얘기한 「뿌리 내린 집」이라는 작품도 있었다.
무척 두꺼웠다. 이런 걸 어떻게 다 읽는 거냐.
뒷면에 부착된 가격은 5,000원. 문제집보다도 비싼 가격.
나는 그 책을 도로 내려놓았다.
문제집 두 권을 계산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거의 8시가 다 된 시각.
웬일로 슬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대신 현관 앞에 웬 쪽지가 놓여 있었다.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체로 오늘은 늦게까지 친구네 집에서 놀다 오겠다고 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남아있던 계란국과 김치만 있는 조촐한 상을 차렸다.
오랜만에 혼자 먹어서 그런지 약간 허전했다.
저녁상을 치우는 중에 휴대폰이 울렸다.
수신된 메시지가 한 건. 모르는 번호였다.
그러고 보니 신혜민이 나중에 메시지를 보낸다고 했지?
「영재야 나 신혜민인데 스터디부 가입하는거 취소할게」
메시지 아래에 ‘Sorry'와 캐릭터가 그려진 이모티콘이 있었다.
……뭐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에 나는 한동안 휴대폰 액정을 우두커니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