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9화-엉킨 실은 하나씩 풀어야 한다(3)
얘기를 다 들은 나는 놀라서 얼떨떨한 기분을 느꼈다.
“제, 가요?”
“그래.”
흔들림 없는 굳건한 대답이 돌아오자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다.
그걸 내가 말하라고?
“대화 자체를 거부한다면, 대화의 장으로 나오게 만들어야지.”
이사장님이 말을 마친 뒤 커피를 홀짝였다. 그 얘길 꺼내야 하는 내 심정은 그다지 문제될 게 없다는 듯.
그러고 보니 저번에 윤희가 그랬지.
이사장님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사람이라고.
하긴, 괜히 가족일 리가 없지. 더구나 한때 이사장님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고도 하니까.
무려 이런 사람이 학교를 되살리기 위해 스터디부를 세우고, 나를 부장으로 앉힌 것이다.
말아 쥔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나는 어쩌면 예상한 것보다 더 터무니없는 일에 휘말렸는지도 모르겠구만.
“좋은 방법이 아니란 건 알고 있다.”
머릿속을 점령한 잡념을 일거에 지워버리겠다는 듯 이사장님이 먼저 운을 뗐다.
“모든 사람들이 예의가 바르고 악감정이나 오해에 사로잡혀 휘둘리지 않는다면, 설사 갈등이 있더라도 원만하게 풀릴 게야.”
“그렇겠죠.”
정말로 그런 세상이라면 애초에 갈등 자체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각자의 감정이 있고, 갈등은 필연적이지. 세상에는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갈등만큼이나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갈등도 많아. 그런 갈등은 서로가 해결을 보려고 해도 어느 지점에서 자꾸만 어긋나기 마련이야. 앞서 말했듯이 각자가 지닌 감정 때문에.”
거기까지 말한 이사장님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때로는 이쪽에서 해결하고 싶어 해도 상대 쪽에서 그럴 의사가 없는 갈등도 있지. 그런 갈등을 해결하려면 상대를 움직이게 할 무언가를 이용할 줄도 알아야 돼.”
지금 이사장님과 심윤희가 딱 그 상황이다. 이사장님의 의도는 알겠다.
다만 그 말을 내가 해야 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
“세상이 항상 상냥하게만 굴러가지는 않으니까.”
그러면서 이사장님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나는 시선을 슬쩍 피했다. 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그 내용에는 충분히 공감이 갔다. 세상이 상냥하지 않다는 것쯤은 수없이 겪어봤으니까.
“그리고 속에 응어리를 쌓아두기만 하면 자신을 갉아먹고 말 거야. 윤희는 평소에 자기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는 아이니까 더더욱.”
그나마 이사장님 얘기를 할 때만큼은 감정을 드러냈었다. 감정을 보여야 할 때는 분명히 표현할 줄 아는 것일 테지.
“거듭 강조하게 되어 미안하다만, 이 일은 한시 바삐 해결해야겠구나. 음… 내일, 이라도 해야겠지.”
“네? 내일요? 너무 갑작스러운 거 같은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데 말이죠.
“그래. 내일 여기서 하는 게지. 삼자대면 형태로 말이다.”
“사, 삼자대면요?”
봉우리 하나도 넘어가기 힘든 판에 하나를 더 넘어야 한다고?
“여기까지 알게 됐는데 그저 손 놓고 있으려고?”
“아, 아뇨.”
이걸로 확실해졌다. 나는 제 발로 고생길에 들어왔다는 것.
“내일 방과 후에 꼭 데려와 줬으면한다.”
“…노력할게요.”
꾸벅 인사를 하고 이사장실을 나섰다.
애초에 나를 중개역으로 쓰기 위해서 부장에 앉힌 건가.
하지만 이사장님의 말마따나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조금 더 노력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 * * *
집에 들어오니 저녁 6시 반이었다.
내일 해야 될 일을 되짚어보니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필이면 다른 것도 아닌, 삼자대면이라니.
노력해 보겠다고 수십 분 전에 결심했지만, 과연 잘해낼 수 있을지…….
도연이에게 말한 대로 오늘은 최대한 휴식을 취해야겠다.
슬기는 옆으로 누운 채 TV를 보고 있었다.
“왔어어? 오늘은 일찍 왔네.”
“시험 쳤으니까.”
“벌써?”
“모의고사라고 있어. 그나저나 뭐 봐?”
“그냥. 아무거나.”
슬기는 지루한 표정을 한 채 수시로 채널을 돌렸다.
나는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뒤슬기를 따라 옆으로 누웠다.
“오빠 웬일이야?”
“오늘은 좀 쉬게.”
슬기가 목을 홱 틀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허얼. 해가 동쪽에서 뜨나?”
“그럴 땐 서쪽에서 뜬다고 해야지.”
슬기의 앞날에 먹구름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8시까지 TV를 보다가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두부가 든 김치찌개와 얼마 남지 않은 콩자반.
저녁상을 치우고 나서도 계속 TV만 쳐다봤다.
이렇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는 참 오랜만이었다.
마치 슬기의 분신이 된 기분이랄까.
11시 반에 엄마가 마트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나는 엄마가 먹을 저녁상을 차리고, 이부자리를 펼쳤다.
슬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위에 드러누웠다.
“오빠도 잘 거야?”
“아니. 이제 공부해야지.”
슬기는 공부라는 단어에 미간을 한껏 모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모의고사 치는 날이랬지? 어땠니?”
어젯밤 엄마에게 모의고사에 대해 얘기했다. 아무래도 결과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냥 그랬어.”
“그랬구나.”
“나 이제 공부할게.”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공부는 원래 하루도 거르면안 된다. 공부하는 리듬을 항상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
이제 공부에 집중을 해야 하니 삼자대면이든, 그 ‘말’이든 잠시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 * * *
다음날.
5교시 수업 때면 책상과 한 몸이 되는 애들이 많아진다.
점심도 배불리 먹었겠다, 싱그러운 봄기운을 한껏 품은 따사로운 햇볕도 내리쬐겠다, 낮잠에 빠져들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있을까.
선생님이 교탁을 두드리며 일어나라고 해도 상체를 일으키는 애들은 절반 남짓.
규원이는 그 중에서 수업 시간마다 곯아떨어지기로 반의 대표를 맡고 있을 정도이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선생님이 교단을 벗어나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첫 타깃은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는 규원이였다.
“이규원! 일어나야지.”
선생님이 건드려보지만 일어날 기미가 없다.
잠귀신이라도 들러붙은 건가.
선생님이 책상을 탕탕 두드리자,
“우와악!”
아주 큰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고,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수업 끝났어요?”
“으이그. 정신 안 차리지?”
선생님이 꿀밤을 먹이자 모두들 웃음보를 터뜨렸다.
“세수 좀 하고 와. 침도 닦고.”
거기서 한 번 더 웃음보가 터졌다.
규원이는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반 전체를 둘러보았다.
멋쩍게 웃다가 선생님한테 한 대 더 맞았다.
“아 쌤! 아파요.”
“그럼 아프라고 때리지. 빨리 갔다 와.”
선생님이 가리키는 대로 교실을 나서는 규원이.
하지만 규원이는 채 10분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곯아떨어졌다. 그쯤 하니 선생님도 결국 포기했다.
대단한 녀석일세.
쉬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공책에 필기한 내용을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때 내 책상에 누군가가 손을 올렸다.
“똑똑. 한영재 씨 계십니까?”
귀찮은 녀석이 왔다.
“이번엔 왜? 또 소문 거리 찾으러 왔어?”
나는 대놓고 귀찮아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지난번에 그럴 만한 일이 있었으니까.
“에이, 그건 아니고. 그냥 모의고사 어땠나 하고 궁금해서.”
이규원은 자신의 단발머리를 손으로 살짝 넘겼다. 손목에 찬 싸구려 팔지가 흔들거렸다.
“난 뭐, 그냥 그랬어.”
“그렇구만.”
규원이가 홀로 무언가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는 너는?”
“난 꽤 어려웠는데.”
“그랬구나.”
나는 신경을 다시 공책에 집중시켰다.
“으잉? 무시야?”
“나 지금 공부하고 있잖아.”
글씨를 빼곡히 채워놓은 공책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오오. 이게 바로 우리 학교의 자랑, 한영재의 공책…….”
“됐지? 용건 없으면 이만.”
얼른 가보라고 손을 내저었다.
“아냐. 있어.”
규원이가 도리질을 했다.
“뭔데? 빨리 말해.”
그러자 규원이가 허리를 숙이더니 내 귓가에 소곤거렸다.
“둘이 진짜로 안 사귀는 거야?”
“아니라니까!”
나도 모르게 언성이 올라갔다. 몇몇이 이쪽을 쳐다보길래 신경 쓰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뭐, 그렇게까지 얘기한다면야.”
규원이가 장난스런 웃음을 짓고는 제친구들 무리로 돌아갔다.
나는 재빨리 공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나저나 오늘 삼자대면을 성사시켜야 하는데…….
곁눈질로 윤희의 동태를 확인해 보니 오늘은 다른 시집을 보고 있었다.
근데진짜 그 말을 해도 되는 걸까?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지만, 그간 스터디부의 부원으로 들어와 달라는 설득에 실패한 걸 생각하면, 그 말 외에는 윤희를 움직이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이윽고 6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 * * *
정규 수업이 끝났다.
윤희는 언제나와 같이 여유롭게 책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고정 패턴 수준인데.
나는 말을 꺼낼 타이밍을 보고 있었는데, 윤희는 내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대로면 기회가 없다!
나는 이판사판 내지르기로 결심했다.
“저기, 심윤희.”
가방 지퍼를 잠그고 있던 윤희가 고개를 푹 숙이면서 과장스레 한숨을 토해냈다.
“진짜 끈질기네. 너보단 거머리가 더 낫겠어.”
비꼬는 말투.
나를 향하는 시선이 서늘하고 매서웠다.
예상대로 격정적인 반응.
앞으로 꺼내야 될 말을 생각하자 걱정이 연기처럼 스멀스멀 밀려왔다. 그러나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는 일.
애초에 이 정도 기백에 물러설 거였으면 스터디드림의 부장이든 뭐든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싫다는데 자꾸 매달리는 태도가 얼마나 꼴불견인지 알아?”
웬만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윤희가 대놓고 질색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늘하고도 사납게 불을 내뿜는 화산, 그 속을 뒤흔든 것은?”
나는 일단 되는대로 내질렀다.
그것이 변화구이든 직구이든 일단 던지고 보자는 심정이었다.
“윌리엄 브렌더. 모든 물음표. 8번 시 첫 번째 연.”
“그래서?”
윤희가 가방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아까보다 어조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화산을 뒤흔드는 것은 마그마라고 생각하기 쉽지. 실제로 화산이 마그마를 내뿜으니까. 게다가 ‘사나운 불’이랑도 연결성을 지녀.”
여기까지는 상식선. 조금 더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 구절은 독자가 자신의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르게 읽을 수 있어.”
나는 윤희의 눈을 마주 보았다.
무엇이든 비출 것만 같은 맑은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서늘하고도’라는 표현이 ‘마그마’나 ‘화산’에 대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러니까 ‘화산’이 무엇을 비유하는지, 은유하는지 읽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달라진다는 생각에 다다른 거지.”
비유와 은유.
이 개념들은 국어 교과서에서 자주 등장한다.
「모든 물음표」는 교과서적이지 않지만, 이 개념들을 토대로도 나름대로 해석이 가능하다.
윤희가 자신의 검지로 입술을 문질렀다.
“그래서 나는 내 주변을 떠올렸어. 정확하게는 서늘하면서도, 때때로 사납게 불을 내뿜는 그런 사람을 말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답이 나오더라고. 그 화산은.”
나는 검지손을 들어올렸다.
“바로 너야.”
“풉!”
윤희가 순간 웃음보를 터뜨렸다.
처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아니, 근데 나 방금 좀 멋있지 않았나?
윤희는 그러고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내 검지손이 자신감을 잃고 점점 구부러졌다.
“뭐, 재밌는 해석이라는 건 인정할게. 난 그냥 한 말이었지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구절을 알아내려고 며칠을 고민했건만.
“내가 그간 보여준 태도에서 힌트를 얻었던 모양이네. 일정 부분은 맞았다고 해야겠지.”
역시 눈치 하난 진짜로 빠르다.
“하지만 범생이라 그런가. 상상력이 빈약하네. 모든 물음표는 굳이 의미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상상하는 즐거움을 안겨주는 시집이야. 가령 서늘하고도 사납게 불을 내뿜는 화산의 속을 뒤흔드는 것이 바다라면? 혹은 숲이라면? 개미였다면? 또 서늘하고도 사납게 불을 내뿜는 화산이 지구가 표출하는 불만이라면?”
“아리송한데.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네가 한 해석도 그런 부류라는 얘기야.”
“내가 얼마나 고민했는데…….”
“꼭 틀렸다는 얘기는 아니라니까. 시에는 정답이 없어. 그리고 시인들은 시가 꼭 말이 되도록 적지 않아. 언제나 예술의 영역을 남겨놓곤 하지.”
역시 많이 읽은 애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더군다나 평소보다 말수가 많아진 모습을 보니 정말로 시를 좋아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사장님이 그 말을 했던 건가.
“그래, 이번엔 무슨 용건이야? 보나마나 스터디부 얘기겠지만.”
“오늘은 그것 말고 다른 건이야. 이사장님이 오늘 너랑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하셨어.”
내 말이 끝맺기가 무섭게 윤희의 표정이차가워졌다.
“나는 없다고 전해. 그럼 이만.”
설득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명확한 거절 의사.
윤희는 재빠르게 가방을 메더니 종종걸음으로 교실을 나서려고 했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
결국 나는 이사장님이 지시한 대로 말을 내뱉었다.
“이사장님이 그랬어. 만약 오늘 이사장실로 오지 않으면, 교내 방송으로 네 시작 노트에 있는 시를 전부 다 낭독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