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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화 〉8화-엉킨 실은 하나씩 풀어야 한다(2) (8/131)



〈 8화 〉8화-엉킨 실은 하나씩 풀어야 한다(2)

그저께 윌리엄 브렌더의 시집, 「모든 물음표」 덕분에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윤희에게 풀이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목전에 닥쳐온 인생 첫 모의고사를 무사히 끝내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이틀 간 단 한 줄의 과장도 보태지 않고 공부만 했다.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수리 영역 문제 풀이.
방과 후에는 곧장 스터디부에 가서 한국사와 사탐·과탐 풀이.
하교할 때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집까지 뜀박질을 했다. 그렇게 집에 들어와서는 옷 벗을 새도 없이 저녁밥부터 목구멍에 밀어 넣었다.
이후 새벽 4시까지 모자란 과목을 위주로 공부.

혹자는 별로 중요한 시험이 아니니까 설렁설렁해도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중요한 시험이 아니라고 해서 유야무야 넘기는 건 내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면, 어떤 시험이든 내게는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 결전의 날이 밝았다.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할  있는 노력을  했다고 자부한다.
이제 믿을 것은 오로지 내 실력뿐.
교실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감독 선생님이 스타카토 리듬으로 교탁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적막을 간헐적으로 건드릴 뿐이었다.

나는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지시에 따라 개인정보를 모두 기입한 OMR카드. 미리 배부 받은 언어영역 시험지가 그 밑에 깔려있었다.
반듯하게 눕혀놓은 몬아미 볼펜을 만지작거렸다.

머릿속은 온통 잘 쳐야 한다는 생각뿐.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손끝과 발끝에 머물러 있는 기운을 몸의 중심으로 끌어오듯이, 집중력을 한데 모았다.
오전 8시 40분.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정적을 깨부쉈다.

“시작!”

감독 선생님의  마디에 나는 곧장 시험지를 펼쳤다.
노력의 성과를 보여줄 때다.

* * * *


오후 4시 10분.
반나절 넘게 이어진 사투가 끝났다.
담임 선생님은 따로 종례를 하지 않고 간단하게 교실청소만 시켰다. 다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는지 불과 10분도 안 돼서 청소가 끝났다.
하긴 평소엔 5시에 마쳤으니까.

나는 뻐근한 목을 풀어주었다. 오랜 시간집중력을 유지한 탓인지 머리가 꽤 피로했다.
하지만 지금은 쉴 때가 아니었다.
그저께 떠올린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 할 차례였다.
도연이가 교실을 나서려다 말고 내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영재야. 오늘 모의고사 어땠어?”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항상 정해져 있지.

“그냥 그랬어.”
“쉬웠던 거야? 난 비문학이 너무 어렵던데.”
“응. 좀 그랬지.”

비문학에 대해서라면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문제를 파악하고 키워드와 문맥을 잘 짚어낼 수 있다면, 웬만큼 풀  있는 수준이었다.

“근데 생각보다 별  없네. 첫 모의고사라서 좀 긴장했거든.”

도연이가 팔을 쭈욱 뻗어서 기지개를 켰다.

“집 가면 TV 보면서 쉬어야지.”
“오늘 같은 날 쉬면 좋지.”
“영재 너도 쉬려고?”

의외라는 듯이 여기는 도연이.
나도 사람인데 왜 그런 반응인지.
하지만 쉬는  나중에 할 일이다.
“그러고 싶긴 한데… 당장에  일이 있어서.”
“무슨 일?”

도연이가 호기심을 내비쳤다.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이야.”
“뭔가 사정이 있나 보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가방을 걸쳤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 풀렸으면 좋겠다.”

도연이가 배시시 웃었다. 보는 사람의 기분을 밝게 해주는 미소였다.
나도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그럼 오늘은 공부 안 할 거야?”

아직 궁금한  더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해야지.”
“…영재 너 사람 맞아? 어떻게 또 공부할 생각을 해?”

마치 기인이라도 본 것 같은 반응.

“어딜 봐도 사람이잖아. 그리고 안 쉰다고  적은 없어.”
“시험 끝난 날은 하루종일 놀아야 정석이잖아.”
“정석이라고 할 것까지…….”
“하긴. 나 같은 일반 학생이 어찌 수석님의 생각을 헤아리겠어.”

도연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놀림조였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도 너희랑 다를 거 없어. 진짜로.”

그렇게 도연이와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이제 슬슬 가야겠네. 내일 봐.”

도연이가 나에게 인사를 건넨 뒤 교실을 빠져나갔다.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고 나서 목적지인 3층으로 발길을 옮겼다.
3층에 있는 이사장실을 향해서.

설마 또 이렇게 찾아가게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일개 학생이 제 발로 이사장님을 뵈려고 찾아가는 일 자체가 상당히 드문 일이니까.
이게 진짜 무슨 고생길이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이사장실 앞에 당도했다.

“한영재입니다.”

안쪽에서 들어오라고 해서 나는 이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장님은 책상에서 한창 업무를 보고 있었다.
서서 눈치를 살피고 있자 이사장님이 앉으라고 했다.

“5분만 기다려.”

그러고 보니 처음 왔을 때도 이랬지?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무척 거칠었다. 이사장쯤 되면 편할 줄 알았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괜히 연락도 안 하고 찾아와서 방해가 됐을까.
하지만 따로 연락처가 없으니 직접 찾아오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이지?”

정확히 5분이 지난 시점에 이사장님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저, 바쁘신데 찾아온  아닌지…….”
“할 얘기가 있어 찾아온 학생을 내가 어찌 내쫓겠어? 그보다 뭣 좀 마시겠니? 커피?”
“네.”

눈치만 살피는 태도는 좋지 않다고, 전에 이사장님이 그랬으니까.
잠시 기다리자 이사장님이 믹스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모금 들이켜자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래. 할 얘기가 뭐지?”

나는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지금부터 꺼내려는 화제는 윤희네 가족에 관련된 이야기다.
자칫 실수했다간 이사장님의 심기를 건드릴 것이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시간은 계속 가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터디부에 관련된 화제라면 뭐든 편하게 말해도 된다.”

이사장님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머릿속으로 순서를 한 번  정리했다.
속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최대한 조심스런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이런 질문,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스터디부와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해서요. 이사장님은 지금 손녀인 심윤희와 사이가  좋은 거지요?”

거의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먼저 던져보았다.

“그 애가 뭐라고 하든?”

‘영감탱이’라고 그랬지요.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아무리 편하게 말하라고 한들 손윗사람에게 그런 얘기까지할 수는 없는 법.
이사장님이 턱을 문질렀다.

“흐음. 영감탱이라고 했나 보구나.”
“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반문.
심윤희와 처음 대화를 나눴을 때가 오버랩되었다. 기시감이라고 해도 좋으려나.

“뭘 그리 놀라?”

이사장님의 어조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아, 아니에요.”

나는 겸연쩍게 웃다가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마치 속내를 읽힌 것 같아서 좌불안석이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녀인 건가.

“어떻게 눈치 챘는지 궁금한 모양이구나.”

이쯤 하면 읽힌 게 확실하다. 그렇다고 선뜻 궁금하다고 답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나는 입술을 달싹거려 보았지만 애꿎은 공기만 내보낼 뿐이었다.

“어…….”
“별 거 없어. 윤희가 평소에 쓰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지.”

나는 여전히 아리송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로 욕을 하지 않은 아이야. 집에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도 않을뿐더러, 스스로 말을 가릴 줄도 알고. 아마 시집의 영향이 클 테지.”

거기까지 얘기한 이사장님이 커피를 들이켰다.
이 정도 내용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사장님은 종이컵을 내려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윤희가 영감탱이라고 하는 걸 들은 적이 있기도 해. 네가 나와 손녀 사이에 대해 물어보는  보고 그 애가 그런 말을 했겠구나, 여겼을 따름이지.”
“솔직히, 좀 놀랐어요.”

이사장님은 슬며시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영감탱이. 나이 많은 영감을 비꼬아 이르는 말.
분명 윤희 나름대로의 불만 표출이다.

그렇다면  불만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윤희의 속을 뒤흔들어 놓은 그 불만은 무엇일까?
 답을 알아내야만 나에게,나아가 스터디부에 미래가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관계가 틀어진 건가요?”
“사실 나와의 관계만이 아니란다. 가족들과 거의 얘기를  하고 있어.”

생각보다 문제가 더 복잡했다. 이렇게 되면 정말로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밝혀두자면, 그 애가 변하길 바라고 있단다. 그저 나와 가족과의 관계 회복만이 아닌, 더  변화를.”

이사장님이 지금 무얼 말하는지 그 맥락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사장 정도의 자리에 있으면 자신의 손녀가 학교생활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쯤은 손쉽게 알아낼  있을 테니까.
윤희가 교실에서 친구 한 명 없이 홀로 지내고 있는 것쯤은 진즉에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윤희를 스터디부의 부원으로 데려오려는 것은 그저 성적만을 위한 게 아닌 셈이다.
이제야 스터디부를 세운 이사장님의 진의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좀 더 질문해도 될까요?”

이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윤희는 예전부터 친구가 없었나요?”

당사자가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있었더라면 뼈가 좀 많이 아팠을 것이다.

“손녀의 입장을 생각해서 좋게 말해 주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중학생 때도 그랬지.”

나는 미지근해진 커피를 단번에 들이켰다.

“더 마시겠니?”
“네.”

이사장님이 커피를 타오는 동안 여태까지 알아낸 정보를 정리해 보았다.
그 사이 이사장님이 종이컵 두 개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많이 마시면 오늘은 늦게까지 공부할 수 있겠군.
나는 받아든 커피를 입에 머금은 뒤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럼, 초등학생 때는 어땠나요?”
“음…….”

이사장님이 턱을  채 침음을 흘렸다.

“그래. 딱 한 번 친구들을 데려온 적이 있었지. 3명이었을 거야.  날은 내가 쉬던 날이었어. 그래서 아이들에게 과일과 음료수를 내줬지. 하지만 그때 이후로는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온 적이 없었구나.”
“그즈음부터 가족들과 사이가 안 좋아진 거예요?”
“아니다. 그 애가 중학교 2학년 때 부모와 마찰을 빚으면서 그리되었지.”

셈법이 복잡해졌다.
친구를 만들지 않는 이유와 가족과의 불화가 생긴 계기가 다르니까.

“갈등이라고 한다면… 진로 문제인가요?”

이사장님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경험을 토대로 한 추론이다. 나도 중학생일 때 엄마와 진로 문제를 두고 얘기를 했으니까.
그때 반드시 한성대학교에 가겠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여기는 대학교를 졸업한다면 어디든 취직할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세상은 학벌을 제일 중요시한다.
학벌이 꼭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성공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막상 엄마는 내가 꿈을 찾길 원했지만.

“내 아들은 윤희가 자신의 가업을 이어가길 원했지. 하지만 윤희는 그걸 원하지 않았어.  문제로 제 부모와 말다툼하는 것을 여러 번 봐왔지.”
“음, 마치 목격자처럼 얘기하시는 것 같아요.”
“실제로 그랬지.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말이다. 구태여 변명을 하자면  학교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거든. 원래 나와 손녀 사이가 이렇게 냉랭하지 않았어. 제 부모란 것들은 항상 일이 바빴으니까 자연히 내게 많이 기대곤 했지. 다만, 윤희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나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던 게야. 아직 어린데…… 더 신경써줬어야 했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거의 자조 섞인 어조였다.

“이사장님은, 스터디부를 만든 목적이 심윤희의 갱생 아니, 변화인 건가요?”
“단지 한 가지 목적만을 염두에 두지 않았어. 학교 전체의 면학 분위기를 이끌어 내는 것, 네가 말한 대로 우리 손녀가 더 나은 학교생활을 보내기를 바라는 것. 하지만 윤희가 나아지려면 나와, 가족들과 먼저 관계를 회복해야 하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도 있고.”

말을 마친 이사장님은 종이컵을 매만졌다.
그런데 스터디부를 만든 목적이 정말로 저것뿐일까?
제시한 두 가지 이유 말고도 더 있을 것만 같았지만, 주제를 벗어날 것 같아서 접어두기로 했다.

“벌써 2년이 됐구나. 집에서 말을 걸려고 해도 윤희가 무시로 일관한 지.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돼. 그 애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이고. 다시금 대화의 물꼬를 틔어야지.”
“방법이 있으신가요?”

윤희는 현재 이사장님이란 얘기만 꺼내도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강제로 데려오는 정도가 아니라면 방법이 없을 텐데.

“한 가지 있긴 해. 그 애를 움직이게 만들 단  마디가.”

그러더니 이사장님이  말을 나에게 들려주셨다.

“네?”

그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발언이어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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