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화 〉6화-고르디우스의 매듭(4) (6/131)



〈 6화 〉6화-고르디우스의 매듭(4)

나의 질문에 엄마가 침음을 흘리며 관자놀이를 쿡쿡 눌렀다.

“엄마가 책을 안   벌써 20년이 돼서 잘 모르겠네. 미안.”
“아, 그렇구나…….”

이렇게 되면 자력으로 알아내는 수밖에 없겠구만.

“근데 그건 어디서 본 거니?”
“그냥 아는애가 얘기해 줬어.”
“시를 좋아하나 보구나.”

엄마 말대로다. 쉬는 시간마다 시집만 보고 있는 애니까.

“그런데 궁금하네. 그 애는 무슨 이유로 그걸 얘기한 걸까?”
“나도 그걸몰라서 엄마한테 물어본 거야.”

엄마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혹시 여자애니? 우리 아들은 공부 말곤 관심 없는  알았는데.”

뭐, 나도 남자니까 이성에게 흥미가 없다고 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좀 다른 일이 있어.”

엄마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우리아들이니까 잘하겠지.”

엄마의 따뜻한  마디와 신뢰가 담긴 눈빛이 내 가슴을 울리게 했다.
엄마가 나를 전적으로 믿으니까 나도 거기에 부응하고 싶다.

“그러엄.”

대답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린 나는 한 가지 다짐했다.
때가 되면 엄마에게 숨김없이 다 얘기하겠다고.

“아! 미래책방에 가서 찾아봐.”
“미래책방에?”

그러자 엄마가 고개를 한 번 움직였다.
참고로 미래책방은 어릴 적부터 자주 이용하는 단골 가게다.

“아마 네가 찾는 책이 있을 거야.”
“그럼, 엄마를 믿고 가봐야겠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의 저녁 식사를 더 이상 방해하면 안 되니까.

“나 이제 공부하러 갈게.”
“너무 늦게까지 하진 말고.”

방으로 들어온 나는 문제집을 다시 풀기 시작했다.
채점을 끝내고 나니 잊고 있었던 밤샘의 여파가 나를 덮쳐왔다.
원래라면 두 시간 정도는 더 공부할 테지만, 오늘은 도저히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거실로 나왔다. 그런 뒤 엄마 옆자리에 누웠다.

곧장 하품과 함께 잠이 쏟아졌다.
내일은 내가 저질러놓은 일을 수습하자.
그 생각을 끝으로 나는 완전히 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 * * *



다음날,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8시 20분에 교실에 당도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규원이가 소리쳤다.

“오옷! 드디어 드라마의 주인공 등장!”

거기에 박수까지 치면서 호응을 유도했다.
내가 무슨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규원이의 요란에 몇몇 애들이 동조하여 환호성을 질렀다.
정말 사람 피곤하게 하는 녀석이네. 내 잘못도 있긴 하지만…….

“마침 어제 대답 들었다고 그러던데?”

 분단에 앉아있던 애가 한 마디 거들자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건 또 어디서 만들어진 소문이냐?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만.
어제 소문이 퍼졌을 때 바로 아니라고 부정할 걸 그랬나.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혹시나 하여 윤희가 있는 곳을 살폈다. 윤희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시집에 몰두하고 있었다.

모든 일에 항상 저런 태도를 취하는 걸까.
의문이 생겨났지만 흐르는 강물처럼 금세 떠밀려가고 말았다.
도연이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어, 도연아. 어제에 이어 오늘도…….”
“보다시피, 애들 관심이 상당하잖아?”

도연이가 싱긋 미소 지었다.

“나도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거든.”

단지 반의 대표라는 이유만으로  것은아니구만.

“또 네가 대답을 들었다고 말하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말야.”

잘 생각해 보니 애들이 그렇게 여길 만했다. 교실에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윤희와 나니까.
나는 그동안 윤희에게 스터디부를 권하려는 목적 때문에 그랬던 거지만, 사정을 모르는 애들 입장에서 본다면 충분히 오해할 법하지.

“나도 어제 너네 둘이 교실에 남아 있는  봤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어?”

 전체가 숨을 죽였다.
여기서 내가 선택할  있는 대답은 두 가지.
사실 이규원이 헛소문을 낸 것이다, 라고 하는 사실을 말하는 것.
결국 차였다, 며 애들의 기대에 적당히 부응하면서도 이 소동을 일단락 지을 수 있는 대답을 하는 것.

“음… 결국 차였어.”

나의 선택은, 후자였다. 일부러 뜸을 들이고 나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다는어조로 말했다.
실제로도 아무렇지 않았다. 정말로 차인 게 아니니까.
좀 다른 의미로 윤희에게차인 경험은 있지만.
하지만 그것과 연애 문제는 별개다.
“아… 어떡해.”

도연이의 안타까워하는 눈빛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반 전체를 둘러보았다. 도연이와 마찬가지로 모두들 안타까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자기 일인 양 대하는  애들의 태도가 왠지 모르게 감동을 주었다.
도연이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 주었다.

“우리 영재 기죽지 마. 세상의 절반은 여자잖아? 우리 반만 해도 꽤, 많고.”

하긴, 제일고 재학생 전체에서 남자가 나뿐이긴 하지.

“고마워.”
“뭘.”

도연이가 배시시 웃었다.
HR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도연이가 자리로 돌아갔고, 나 역시내 자리로 향했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양옆에서 애들이 위로와 응원의  마디를 건넸다.

참 묘한기분이 들었다. 만약 내가 차인 게 진짜였더라면, 엄청나게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구만.
결과적으로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것이 정답이었다.
만약 사실대로 밝혔으면 양심은 지킬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 뒤로 집요한 심문이 이어졌을 것이다.

어제의 경험이 그러한 추론을 가능하게 했다.
어쨌거나 이로써 소문은 빠르게 잦아들 것이다.
원래 소문은 매듭지어지기 전까지 살아 있는 화염이니까.

나는 가방을 풀고 예습할 교과서를 책상 위에 올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윤희를 쳐다보았다.
윤희는 시집을 읽고 있었는데, 우연히 시집의 표지가 시야 들어왔다.

「모든 물음표」

저자는 어제 윤희가 말한 ‘윌리엄 브렌더’였다.
저 책에 힌트가 있는 걸까?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눈치챌까  얼른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이미 눈치채 놓고 모른 척하는 걸지도.

그러고 보니 아직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바로 당사자에게 사과하는 것이었다.



* * * *



4교시 영어 시간은 우리  담임선생님의교과목이었다.
발음이 영어문제 듣기CD랑비슷하게 들릴 정도로 또박또박하고 정확하고, 문법 설명을 쉽게 해주는 덕에 수업을 따라가기가 쉬웠다.
열심히 따라만 간다면 말이지.

나는 노트 필기를 하고나서 시선을 들었다. 삼분의  정도가 이미 책상과 포옹하고 있었다.
공부 못하는 학교라는 이미지가 그냥 생긴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만드는 광경.
입학식으로부터 불과 며칠 만에 이렇게 된다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수업 여기까지.”

선생님이 평소보다 5분 일찍 마쳤다.
선생님이 손으로 교탁을  번 두드리자 자고 있던 애들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너네 춘곤증이야, 뭐야?”

애들이 대답 대신 기지개를 켰다.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오늘 좀 일찍 마쳤는데, 공지할  있어서 그래.”

선생님이 공지한 내용은 3월 모의고사에 대한 것이었다.
중학생 때 말로만 들었던 모의고사.
조만간 치르게  것이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차피 말 그대로 모의고사니까 한 번 경험해 본다 생각하고 맘 편히 쳐. 그렇다고 냅다 찍고 자는 애들은 따로 면담 들어갈 테니까 눈치껏 해.”

그러면서 선생님은 부담가지지 말라고 한  더 강조한 뒤 교실을 나섰다.
이윽고 점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비실거리던 애들이 부리나케 교실을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1교시부터 필기해놓은 내용을 천천히 읽어가기 시작했다.
막 한 페이지를 넘기려는 찰나 누군가의 검지손이 내 책상을 쳤다.
규원이었다. 손목에는 싸구려 티가 물씬 나는 팔찌를 차고 있었다.

“왜? 나 바쁜데.”

나는 퉁명스레 응대했지만, 규원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에이, 잠깐만 시간 내 줘어.”
“나 이거 봐야 해.”

나는 공책을 살짝 들어 보이고는 저리 가보라고 손짓했다.

“5분마안.”

규원이가 기어이  어깨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이리 쓸데없이 끈질겨.

“그냥 여기서 말하면  되나?”
“여기선  그래. 자리 좀 옮기자.”

약간 째진 규원이의 눈꼬리가 살짝 휘어져 있었다.
진짜귀찮아 죽겠는데…….
나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치근거리게둘 바에는 빠르게 해결 보고 오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별 거 아니면, 그냥 가버린다?”
“저얼대로 그런 일 없어. 날 믿어.”

규원이가 빈약한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쳤다. 그러더니 종종걸음으로 교실 출입문 앞까지 갔다.
우리는 3층 계단을 올라간 다음 그대로 구름다리까지 직행했다. 규원이가 멈춰 선 곳은 구름다리의 중간지점이었다.

“여기서?”

내 물음에 규원이가 고개를 과장스럽게 끄덕였다.
점심 시간대이긴 하지만 구름다리를 다니는 애들은 많지 않았다.

“할 얘기가 대체 뭔데?”
“후후.”

규원이는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다. 그렇게 뜸을 들인다면내게도 다 방법이 있지.

“할 말 없으면 간다.”
“잠깐만!”

규원이가 내 팔을 붙잡았다.
역시 이 방법은 효과가 좋다.

“그치만, 영재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묜 안 들어줄 거잖아.”
“…….”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런 걸 현실에서 써먹을 줄이야.
내가 굳은 표정을 짓고 있자 규원이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제대로 얘기할게. 진짜로 차인 거 맞아?”
“아침에 말했잖아.”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해 줘. 나도 일단 당사자잖아?”

아니지. 넌 그저 목격자였지. 그리고 헛소문 유포자.

“대체 네가  당사자라는 건지 난 이해가  가는데. 그리고 차인 거 맞다니까.”
“사실 어제 대답 들었다고  거, 내가 퍼뜨렸거든.”

말하는 내용에 비해서  당당한 태도였다.
뭐, 딱히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까.

“왜 그랬어?”

궁금하니까 되물었다.

“둘이 느낌이 좋아 보여서. 때마침 별관 가서 고백도 하는  같았으니까,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 그랬지.”

이 정도면 중증 오지라퍼다.

“나랑 심윤희는 그때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럼 대체 무슨 일로 그랬던 거야?”

스터디부가 얽힌 일이라 아직은 아무에게도 발설할  없다.

“각자 사정이 있는 건데  왜 이리 참견이야.”
“궁금하니까.”

당돌한 건지, 단순한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 태도였다.
나는 쐐기를 박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네가 생각하는 일 없었고, 남의 사정에 너무 간섭하지 마. 난 이만 간다.”

나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교실로 향했다.

“야, 잠깐만!”

규원이가 소리쳤지만 나는 오히려 걸음을  빨리했다.
쫓아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규원이는 쫓아오지 않았다.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교실 뒷문에 도착했다.
이어폰을 낀 채 시집에 몰두하고 있는 윤희의 옆모습이 보였다. 윤희가 귀밑머리를 살짝 뒤로 넘겼다.
교실에는 윤희 말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문득 의문이 생겨났다.
쟤는  항상 혼자일까, 하고.



* * * *



정규 수업이 모두 끝났다.
종례 시간에 담임선생님은 미리 컴퓨터 사인펜을 준비해 놓으라고 알렸다.
교실 청소를 끝내고 나자 애들이 삼삼오오 모여 하굣길에 올랐다.

윤희는 언제나 가방을 늦게 챙겼다. 나는 오늘도 할 말이 있는 관계로 윤희의 페이스에 맞춰서 짐을 챙겼다.
어느덧 애들이 모두 빠져나갔고,나와 심윤희만 남았다.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가 교실 책상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저기, 심윤희.”

조심스럽게  마디 붙였다.
이제  가방을 걸친 윤희가 이쪽을 보지도 않고 쏘아붙였다.

“스터디부 얘기라면 들을 생각 없어.”
“다른 할 얘기가 있어서.”

윤희의 맑은 눈망울이 나를 쳐다봤다.

“어제 말야… 너한테 괜히 피해를 준 것 같아. 미안해.”
“잘 알고 있네.”

서운함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어조였다.

“그래도 오늘 아침에 수습했으니까. 어제도 좀 귀찮은 정도였고. 이제 걔만 사과하면 되겠네.”

나도 거기에 동의했다.
규원이에게 생각이 있다면 나중에라도 윤희에게 사과할 것이다. 생각이 있다면.

“그럼  이상 할  없지?”

윤희는 그대로 교실을 나서려고 했다.

“잠깐만!”

나는 한   윤희를 불러 세웠다. 윤희가 우뚝 멈춰 섰다.

“너는, 내가 싫어서 스터디부에 들어오려는 거야?”
“결국 또 스터디부 얘기.”

윤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꼭 네가 싫어서는 아냐.”

처분을 기다리는 죄수의 심정 비스무리한 것을 느끼던 나에게 희소식이었다.
사람으로서 싫지 않다고 한다면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니까.

“그러니까, 한영재 너는 문제가 아니란 거야.”
“그 말은…….”
“그래서 싫어.”

짧지만 강렬한 다섯 음절을 남긴 채 윤희가교실을 떠났다.
나는 턱을 매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감한 문제였다.
윤희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이사장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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