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5화-고르디우스의 매듭(3)
오늘도 어김없이 스터디부에서 공부를 했다. 다른 일은 몰라도 공부만큼은 하루도 거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밤을 샌 후유증 때문에 하품이 올라와서 집중하기 힘들었다. 종일 애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리기도 하여 심적으로도 지쳐있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도 윤희가 내게 했던 말이 신경 쓰였다.
-서늘하고도 사납게 불을 내뿜는 화산, 무엇이 그 속을 뒤흔들었을까?
대관절 이게 무슨 소리람?
수수께끼도 아니고.
아무튼 이런 상태이다 보니 공부가 잘 될 리가 없었다. 때문에 어제에 이어 오늘도 스터디부 활동을 일찍 마감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바깥은 쌀쌀했다.
몸이 피곤할 때 맞는 찬 공기는 사람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눈꺼풀도 천근만근 무겁고.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목청껏 외쳤다.
“한영재애!”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또래보다 우람한 덩치가 눈에 띄자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중학교 동창이자 단짝인 김형준이었다.
나는 반가움에 곧장 팔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형준이가 나에게 다가오자마자 내 목에 팔을 둘렀다.
“자식! 오랜만이네.”
나보다 머리통 하나가 큰 녀석이 그러니 숨이 좀 막혔다.
나는 켁켁거리면서 형준이의 팔뚝을 여러 차례 때렸다. 기브 업 신호였다.
형준이가 팔을 풀어주자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아니, 그렇다고 갑자기 목을 조르면 어떡하냐?”
“뭘, 한두 번도 아니고. 그리고 조른 거 아니다.”
하긴, 친구들끼리 이 정도 장난은 할 수 있지.
하지만 숨 막혔던 건사실이니 한 마디만 했다.
“그러니까 힘 조절 해. 나보다 덩치도 큰 놈이.”
“OK.”
형준이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중학생 때는 머리를 길렀는데, 지금 형준이의 머리는 짧고 단정한 스포츠였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형준이를 무서워했다.
또래들보다 큰 키, 떡 벌어진 어깨, 무엇보다 희번덕거릴 때 엄청 험악해지는 삼백안.
이 세 가지 조합 때문에 양아치로 여겨지곤 한다. 실제로는 생긴 것과 달리 매우 착실한 녀석이지만.
나는 형준이가 입고 있는 교복을 보았다.
왼쪽 가슴팍에 ‘한성’이라고 적힌 은색 오각형 배지가 부착되어 있었다.
…역시 제일고 교복보다 훨씬 세련되었군.
“넌 지금 마친 거야?”
형준이가 물었다.
“원래는 5시에 마치는데 따로 하는 게 있거든. 넌 어때? 거긴 야자 있지 않아?”
“있지. 나는 학원을 가는 대신 야자를 안 하지만. 근데 너 저녁은 먹었냐?”
안 먹었다고 하자 녀석이 반색을 표했다.
“잘됐네! 나 마침 배고프걸랑. 분식집에 갈래?”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내게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요즘 분식집에서는 라면 하나만 해도 3,000원이다. 하지만 내 동전 지갑에 든 전재산은 4,630원뿐.
고민이 시작되려는 찰나 형준이가 고민을 한 방에 타파해 주었다.
“형아가 사준다. 넌 따라만 와라.”
형준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 가정 형편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근처에 있는 분식집으로 향했다.
저녁때가 지난 덕분인지 자리가 많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안쪽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넌 나랑 같은 거 할 거지?”
주문서를 손에 쥔 채 형준이가 물었다.
어차피 얻어먹는 입장이니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공깃밥만 사줘도 감지덕지인데, 그런 말을 했다간 녀석이 딱밤을 때릴 테니 입다물고 있었다.
형준이가 주문한 음식은 고구마치즈 돈가스 두 개와 라볶이 하나였다.
“너무 많이 시키는 거 아냐?”
“이 형아는 하나 갖곤 모자르다구.”
형준이가 보란 듯이 자기배를 두드렸다. 못 본 새에 배가 좀 나온 듯했다.
그나저나 돈가스라.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들떴다. 제대로 된 고기를 못 먹은 지 오래됐으니까.
학교 급식에서 이따금 나오는 고기도 좋다. 하지만 식당에서 사 먹는 고기만큼의 품질을 기대하기는 어려우니까.
그러고 보니 슬기도 돈가스를 참 좋아하는데 말야. 라볶이나 떡볶이도 엄청좋아하고.
“여기 포장되지?”
“요샌 다 해줄 걸. 아, 너 설마 슬기한테도 주려고?”
“응. 내 거 반만 남겨서 포장해가면 엄청 좋아할 걸.”
형준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하나 더 시키면 되니까 그런 생각 마라.”
“아냐. 그거까지 얻어가기는 좀…….”
“저기요!”
형준이가 내 말을 듣다 말고 손을 번쩍 들었다. 종업원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좀 있다가 떡볶이 하나 포장해 주세요.”
종업원이 알겠습니다, 하고 답한 뒤 자리를 떴다.
내가 말을 꺼내려고 하자 형준이가 두 팔로 X자 표시를 했다.
“아무 말 마. 슬기가 내 동생 같기도 해서 그래.”
중학생 때 형준이가 우리 집에 몇 번 놀러왔는데 그때마다 슬기가 참 잘 따랐다.
그것 때문에 귀여운 동생처럼 느끼는 모양이었다.
“우리 졸업식하고 한 달 만에 보는 거지?”
“그렇지.”
“졸업하고 연락 한 번 없더라, 너.”
속으로 뜨끔했다.
“그게, 공부만 하다 보니…….”
“그래. 너는 그런 놈이지.”
형준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납득은 좋지 않은데.
하지만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형준이는 스마트폰으로 음식 사진을 찍었다.
“페이지북에 올리게?”
“요즘 재미 들렸거든,”
형준이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접시 위에 곱게 눕혀진 돈가스.
김이 피어오르는 갈색 소스가 돈가스를 이불마냥 덮고 있었다.
포크로 돈가스를 고정한 채 나이프를 갖다 대었다.
바사삭.
튀김옷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속에 숨어있던 으깬 고구마와 흐물흐물녹은 치즈가 썰린 단면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야말로 식욕을 부르는 비주얼.
우리는 한동안 배를 채우는 일에 집중했다.
“제일고는 어때?”
돈가스를 반 정도 먹었을 때 형준이가 물었다.
“그냥 그래. 별 느낌 없어.”
“야. 형아가 들은 게 있어서 그래. 거기 이번에 남학생 한 명뿐이라면서?”
형준이가 씨익 미소를 그렸다.
“내 눈앞에 하렘왕국의 주인공이 있는데 안 물어보고 배기겠냐?”
“그런 얘긴 또 어디서 들은 거야?”
“저번에 카페 갔다가 제일고 애들이 하는 얘길 들었거든. 근데 네가 마침 제일고 교복을 입고 있네? 바로 연결되지?”
여기까지 왔으면 형준이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는 수밖에.
“그래 하렘. 하렘이란 이슬람 국가에서 부인들이 거처하는 방을 의미하며, 혹은 포유류의 번식 집단의 형태 중 하나로…….”
내가 하렘이라는 단어를 아는 이유는 형준이의 영향이다.
형준이의 취미가 애니메이션 감상과 만화책 수집이다 보니 나도 약간 접해 본 것이다.
“형 지금 진지하다.”
목소리를 내리까는 형준이.
아무래도 진실을 알려줘야겠구만.
“진짜 별 느낌 없어. 남자 혼자라고 막 좋아라 하거나 들이대거나 하는 일은 네가 보던 만화에서나 있는 일이라니까.”
형준이가 혀를 차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래서 공부벌레는 안 돼. 밥상을 떡 하니 갖다 줘도 먹을 줄을 몰라.”
“음, 내가 못 생겨서 그런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입술 밖으로 뛰쳐나왔다.
형준이가 턱을 매만지면서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일리 있구만.”
반박할 어휘가 하나도 없는 내 처지가 처량해졌다.
“그나저나 한성고는 어떠냐?”
이럴 때는 화제 전환 만한 게 없다. 때마침 한성고에 대해서 궁금한 것도 많고.
형준이는 곧장 관자놀이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딱 한 마디만 할게. 지옥.”
“왜? 좋지 않아?”
내 말에 형준이가 아주 질색을 했다.
“일단 경쟁률이 미쳐 돌아가. 1학년부터 무조건 10시까지 야자에, 2학년부터는 11시까지. 나처럼 학원에 가는 게 아니면 얄짤 없어. 학원 끊었다 하면 곧바로 야자행이고. 그리고 공부에 미친 애들이 한둘이 아니야. 10시 넘어도 안 일어나는 애들 널렸어. 중학생 때 전교 10등 했던 거 여기서는 진짜 아무 의미도 없더라.”
그간 참아왔는지 형준이가 빠르게 열변을 토했다.
“난 그래도 괜찮을 거 같은데?”
“맞다! 여기 더 미친놈이 있었지.”
“왜? 공부 좀 열심히 하는 거 가지고 호들갑은.”
그러자 형준이가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야. 네가 말하는 ‘열심’이 일반 학생들의 범주가 아니잖아.”
거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목표가 확고하고,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다면 어떤 사람이든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공부에 재능이 없지만 오직 노력만으로 해왔기에 하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외에 소소한 화제로 잡담을 나누면서 돈가스 접시를 말끔히 비웠다.
오랜만에 고급진 단백질을 먹었더니 포만감이 엄청났다. 형준이는 라볶이 접시를 자기 앞으로 당겨왔다.
나에게 라볶이를 권했지만 마다했다.
“맛있는데.”
“진짜 배불러서.”
나는 컵에 물을 떠온 뒤 형준이에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너 이 말 어떻게 생각해? 서늘하고도 사납게 불을 내뿜는 화산, 무엇이 그 속을 뒤흔들었을까?”
라볶이에 집중하고 있던 형준이가 젓가락질을 멈췄다.
“뭔 소리야?”
나는 한 번 더 말해주었다.
“대체 뭐지?”
“윌리엄 브렌더라고 어떤 애가 그러던데.”
“잠깐만.”
형준이가 스마트폰을 꺼내서 만지작거렸다.
“윌리엄 브렌더. 20세기 영국 시인 중 한 명이라는데?”
“오, 그렇구나. 그럼 그 말에 대한 건?”
“그건 없네. 그나저나 그거 말해준 애, 여자애야?”
나는 일단 그렇다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라고? 이거 꼭 들어봐야겠는데.”
“아니, 그보다 저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지금 여자 얘기가 나오려는 참에 그게 중요해?”
“나한텐 중요해.”
형준이는 잠깐 신음을 내뱉다가 결론을 내렸다.
“아, 난 모르겠어. 그냥 화산이 내뿜는 거라니까 마그마 아니겠냐?”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몰라. 그보다 그 여자앤 누군데? 무슨 관곈데?”
이 녀석 갑자기 발정이라도 났나.
“아무 사이도 아냐.”
“근데 그런 말을 했다고? 이상한데.”
거기까지 말하던 형준이가 갑자기 감탄사를 발음하고는 핑거 스냅을 했다.
“혹시, 썸?”
“절대 아냐.”
심윤희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말이 쏙 들어갈 텐데 말이지.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아니라니깐. 어쨌거나모르면 됐어.”
“에이, 좀 더 들려줘 봐. 딱 봐도 뭐가 더 있구만.”
“별 거 없어.”
그러자 형준이가 주문서를 들고 가격표를 확인했다.
“고구마치즈돈가스가 7천원이라… 오늘은 영재한테 얻어 먹어볼까. 그동안 나한테 연락도 한 번 안 했겠다.”
“어, 잠깐만.”
내 지갑에 있는 돈을 한참 오버한 금액.
이 순간 을의 위치를 확실하게 깨닫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은 스터디부에 대해서 얘기할 타이밍이 아니다.
나는 형준이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은 말하기가 좀 그래. 다음에 때가 되면 얘기해 줄게.”
“그래? 그렇다면 뭐.”
다행히 형준이가 사정을 이해해 주었다.
미리 주문했던 떡볶이 포장을 챙기고 우리는 분식집을 나왔다.
벌써 8시 20분이었다.
“어이쿠! 슬슬 학원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네. 다음에 보자!”
“그래. 떡볶이 잘 먹을게!”
우리는 작별 인사를 한 다음 각자의 길로 걸어갔다.
평소보다 귀가가 늦었지만 이걸 보면 슬기가 분명 기뻐할 것이다.
* * * *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8시 40분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슬기가 볼을 잔뜩 부풀렸다.
“미안. 오다가 형준이 만났거든. 분식집 갔다 왔어.”
“형준 오빠?”
슬기의 목소리가 갑자기 밝아졌다. 나는 그런 슬기에게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받아. 형준이가 너 생각해서 사준 거야.”
“허얼. 대박.”
슬기가 비닐봉지를 밥상에 올렸다. 내용물이 떡볶이인 것을 확인하고는 무척 좋아라했다.
“근데 진짜 형준 오빠가 나 생각해서 사준 거라고?”
“네가 동생 같대.”
“오빠, 나 지금 너무 행복해!”
형준이가 좋아서인지, 떡볶이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둘 다 좋은 건지.
슬기의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너, 저녁은?”
“오빠 기다리다가 지쳐서 그냥 좀 먹었어.”
“근데 떡볶이가 들어가?”
“당연하지!”
기세 넘치게 대답한 슬기가 떡을 한입에 집어넣고는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덕분에 고구마치즈 돈가스를 남기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서 공부할 책을 펼쳤다. 오늘 할 것은 언어 영역 모의고사 문제집.
맛있는 걸 먹었더니 잠기운도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다.
2회차를 다 풀어갈 즈음 엄마가 돌아왔다.
나는 엄마를 맞이하러 방을 나섰다.
“엄마 왔어?”
“응.”
슬기는 조금 전에 꿈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엄마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는 간단하게 저녁상을 차렸다.
“아들 고마워.”
엄마가 수저를 들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왜 그러니?”
“엄마 혹시, 윌리엄 브렌더라고 들어봤어?”
내가 이렇게 질문을 꺼낸 것은, 엄마가 과거에 문학소녀였기 때문이다.
심윤희가 시집을 많이 읽듯이, 엄마도 시집을 많이 읽었다고 언젠가 얘기했다.
“그 이름 오랜만에 들어보네. 영국의 시인이야.”
나는 형준이 덕분에 알아냈는데.
단박에 기억해내는 엄마가 새삼 대단하게 보였다. 나는 엄마에게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그러면 엄마, 서늘하고도 사납게 불을 내뿜는 화산, 무엇이 그 속을 뒤흔들었을까? 라는 말은 어떻게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