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롱롱 타임 노 씨
“그나마 위안이 되네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상대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사돈총각에게도 나쁜 일이 아닐 겁니다.”
“…항상 도움에 감사해요.”
“별말씀을.”
주미는 집에 가서 오빠 여친의 일을 대화로 풀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중요한 정보를 들었으니 이쪽 정보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최근 남편의 얘기를 전했다.
“아. 그리고 남편이 요즘 불만이 좀 있는 모양이에요. 마이튜브 데이터 센터 유치를 놓친 일 때문인 것 같아요. 이를 바득바득 갈더라고요. 물론 그 대상은 아주버님이 아니라 한송 텔레콤의 사촌 형들이고요.”
마이튜브의 아시아 데이터 센터를 유치하기 위해 달려든 세기 통신은 보기 좋게 물을 먹었다. 한송 텔레콤과 GL 텔레콤의 연합전선에 밀려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진즉에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대응하라니까…. 수용이는 따로 달래주겠습니다. 마음 상하지 않게 얘기하지요.”
“예. 아주버님.”
주미가 나가고 수안은 수용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다시 인터폰으로 장 비서를 찾았다.
“장 비서. 전략비서실 정 이사 오라고 해.”
-예. 회장님.
수안은 집무실로 뛰어온 임 이사에게 제시카 다다리오와 신주환의 감시를 지시했다.
“그럼 두 분이….”
“잘 만나는 모양입니다.”
“허허. 요즘은 연예도 세계화 추세로군요.”
“추가 지시 사항은 따로 없습니다. 그냥 지켜보고 결과만 다음 날에 E-mail로 보고하면 됩니다.”
“예. 회장님.”
수안은 임 이사가 나가고 수용에게 전화했다.
-어. 형. 아니 회장님.
“요즘 불만이 가득한 동생님 아니신가.”
-아휴. 형. 불만은 무슨.
“데이터 센터 나가리 된 건 내가 다 보전해 주지 않았나?”
-그럼. 그럼. 당연하지. 오늘 주미가 그런 얘기까지 했어?
수용도 아내가 형을 보러 간다는 얘긴 들었다. 오빠와 관련된 일을 물어본다고 들었는데, 시시콜콜하게 자신의 얘기까지 전한 모양이다.
“네 소식은 제수씨가 다 얘기해.”
-설마… 형. 그 얘긴 안 한 거지?
“푸흐흐. 네 뒷주머니 정보까지 털어놨을까 봐 걱정이냐? 애초에 그 얘긴 꺼낼 생각도 없었다.”
수안은 수용에게 딴 주머니를 만들어 주며 톡톡히 이번 일을 보상했다.
-하아. 다행이다. 깜짝 놀랐네. 주미한테 일부러 마음 상한 척한 거니까 형은 오해하지 말아 줘. 형들이 일을 잘해. 내가 완전히 당했다니까.
딴 주머니를 감추려고 일부러 더 그랬다.
“다음엔 이기길 바라마. 아! 그리고 코인은 나중에 한 방 더 있다. 이번에 먹은 만큼은 아니지만, 올해 말까지 더 모아 놔. 2017년 말에 또 먹어. 아마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마지막 만찬일 거다.”
딴 주머니는 바로 전자 화폐를 통해 만들어 준 비자금이었다.
-흐흐. 기대되네.
“넌 계속 처가에 살려고?”
-살다 보니까 적응해서 괜찮아. 어차피 집도 가깝고 좋잖아.
독립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더 그렇다. 집안에 웃어른이 계신 곳이 오히려 녀석에게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네 아내에겐 말했는데, 너도 알긴 해야겠지?”
-주환 형님 일이야?
“그래.”
-누굴 만나기에 그래?
“제시카 다다리오.”
-뭐? 다리미? 다다미?
“…….”
-이름이 뭐 그래? 세탁소집 딸인가?
“그냥 제수씨한테 직접 들어라. 전자 지갑 잘 관리하고.”
-흐흐. 그 돈만 생각하면 요즘 안 먹어도 배불러.
“그 돈으로 애들 까까라도 사 줘.”
-푸흐하하. 3천억으로 무슨 까까를 사.
딴 주머니의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수조 원의 자산이 있었지만, 딴 주머니는 다른 의미 아니겠는가.
* * *
신주환은 요즘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긴 뭐야? 되게 높다.”
“같이 가볼까? 한국에 왔으니 남산 케이블카는 타 봐야지.”
“오오. 좋았어. 가자. 매니저. 차 대기시켜.”
“옙. 배우님.”
제시는 주환의 팔을 가슴 깊이 끌어안고 남산으로 향했다. 남산에 갔다가 맛집도 찾아가고 한옥 마을에도 가 볼 생각이다.
제시와 주환의 일은 얼마 전 도착한 E-Mail이 시작이었다.
[롱롱롱 타임 노 씨. 얼마 전에 매니저가 또 그만뒀어. 당신만 한 매니저가 없네. 그리고 우리 살던 집에 갔더니 너 벌써 한국으로 토꼈더라? 잘 살아? 평생 기다린다며? 확 다리나 부러져라.]
“풉.”
그녀다운 글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메일 마지막을 본 주환은 더 웃을 수 없었다.
[추신. 나 다음 주 토요일에 한국으로 놀러 간다. 마중 안 나오면 죽을 줄 알아. 앙?]
“헉!!”
그때부터 지금까지 주환은 다시 만난 연인과 해후하고 달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둘은 남산 타워 정상에서 서울의 전경을 배경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고, 내려와서는 울타리 가득 매달린 자물쇠들을 마주했다.
“우아. 이건 뭐야?”
“…사랑하는 사람들의 변치 말자는 약속. 보통 연인이 와서 서로의 이름을 적어서 자물쇠로 채우고 열쇠는 버려. 이 열쇠 없는 자물쇠처럼 맺어진 인연이 절대로 풀리지 않기를…. 서로의 인연이 끝까지 이어지길 바라면서.”
“…….”
주환은 말이 없어진 제시카에게 물었다.
“제시는 언제 미국으로 돌아가?”
“…글쎄.”
안 그래도 정해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으로 가서 다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영화도 두 편이나 있었고, TV 드라마 촬영도 예정되어 있었다.
“제시 덕분에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 와줘서 고마워.”
“…주환.”
“당신이 에너지를 채워줘서 다시 달릴 수 있을 것 같아. 당신의 나의 에너지!”
“…미국으로 다시 올 순 없어?”
“…….”
당장이라도 간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될 말이다.
“제시. 제시….”
주환은 웃으며 제시를 보내 주고 싶었다. 좋은 기억만 남겨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머리로는 웃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표정은 기괴하게 변하고 있었다.
“…….”
말이 나오질 않는다. 그녀가 다시 미국으로 간다는 생각만으로 세상이 끝나 버리는 것 같았다.
“뚝.”
“…….”
“우리 같이 있는 동안이라도 즐겁게 지내자.”
“…그래.”
.
.
.
주환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어머니는 벌써 잠자리에 드셨는지 집이 조용하다.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가는데 거실에 검은 실루엣이 있었다.
“동작 그만.”
“헙! 주미야. 놀랐잖아.”
“조용히 서재로 와. 나랑 잠깐 얘기 좀 해.”
“…….”
서재로 들어와 문을 닫은 주미는 소파에 앉아 앞을 가리켰다.
“언제까지 서 있으려고?”
주환은 털썩 앉으며 물었다.
“뭔데 그래?”
주미는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시카 다다리오.”
“어억! 네가 그녀를 어떻게….”
“맞네. 맞아. 그 여자도 미쳤지. 뭐가 좋다고 우리 오빠를….”
“어,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어. 어쩌려고 그 여자를 만나는 거야?”
“…허! 너 대체 날 어디까지 감시하고 있는 거야?”
“강 회장님께 부탁드렸어. 오빠가 얘길 안 하잖아.”
“야!”
“아버지 어머니 주무셔. 큰 소리 내지 마.”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잠깐 다시 본 것뿐이야.”
“결혼 생각은 없으시다?”
“…….”
주환은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그래. 없다.”
“제시카도?”
“…아버지와 어머니께 또 실망을 드릴 순 없어.”
“생각은 있다는 말이네?”
“아니라니까!”
“조용히 하시라고요….”
“아. 그래. 어쨌든, 그녀는 미국으로 곧 돌아가야 할 사람이다. 내가 미국에서 살지 않는 한 그녀와 이어질 일은 없을 거야.”
“미국이라…. 이 부분은 생각을 좀 해 봐야겠네. 한국 생활은 힘들겠지?”
“생각은 무슨 생각. 제시는….”
주환의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서재 문이 열렸다.
“제시가 누구냐.”
“……!!”
“……!!”
아버지 신정수 회장의 등장이다. 나이가 들면 잠귀가 밝아지는데, 아들이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니 잠들었을 리가 없었다. 어찌 되찾은 아들인데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아들을 찾으러 나온 아버지에게 서재에서의 대화가 들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들?”
“…예. 아버지.”
“제시라는 여자를 만나고 있어? 미국인?”
“아,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습….”
주미는 얄밉게 고자질했다.
“맞아요. 아빠. 제시카 다다리오라고 미국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여자예요. 미국에서도 만났고 귀국하면서 헤어졌다고 했어요.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한국으로 왔다고 해요. 간단하게 둘이 죽고 못 사는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야! 너는 알지도 못하면서….”
아직 주미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제시카의 할아버지는 미국 연방 하원 의원을 지냈고 그녀의 아버지는 뉴욕의 검사로 활동하고 있어요. 제시카의 향후 전망도 밝아요. 지금은 젊은 층에서 인기를 얻고 있지만, 연기력과 그동안의 필모를 보면 월드클래스 배우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요.”
“…그건 다 어떻게 아는 거야?”
아들의 입에서 긍정이나 다름없는 말이 나오자 신 회장은 짧게 한마디 했다.
“데려와.”
“……!!”
“얼굴이나 보자.”
“저, 저 그게….”
“오기 싫다던?”
“물어본 적이 없어서….”
“그럼 이제 물어보면 되겠네. 언제든 데려와.”
“…….”
“늦었다. 씻고 자라.”
“…….”
“주미 너도.”
“예. 아버지.”
주미는 오빠가 붙잡기 전에 얼른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도망쳤고, 주환은 복잡한 마음을 안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 * *
신정수 회장이 안방으로 들어오자 아내가 물었다.
“주환이 들어왔어요?”
“응. 얼굴 봤어. 술은 안 먹었고.”
어머니도 여전히 잠들지 않고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아들이 멀쩡하게 잘 들어왔는지 매일 확인하게 된다.
“당신 제시카 다…. 다리 뭐라고 했는데…. 혹시 아나?”
“제시카 다리미? 요즘은 세탁소 이름도 영어를 써요?”
“아니. 주환이가 미국인 여자애를 만난다고 하네.”
“옴마야.”
“내가 집에 데려오라고 했어. 얼굴 보자고.”
“…당신 괜찮아요?”
“…당신은.”
“난 다 포기했어요. 그냥 주환이와 서로 마음이 잘 맞는 짝을 만났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었어요.”
“…나도 그래. 제가 좋다는 짝 만나면 그걸로 됐지.”
“뭐 하는 애래요?”
“아! 할리우드 배우라는데?”
“…휴대 전화 가져와 봐요. 이름이 뭐라고요?”
“제시카 다리?”
“설마 애 이름이 다리겠어요?”
늦은 밤 노부모의 인터넷 검색이 시작되었다.
“혹시 얘?”
“제시카 다다리오. 맞아. 맞네. 아까 들었던 이름이 맞아.”
주환의 모친은 휴대 전화 속 아리따운 여자를 물끄러미 보며 남편에게 말했다.
“…얘가 뭘 보고 우리 주환이를 만나요? 이렇게 젊고 예쁜데.”
“그야 나도 모르지.”
그리고 당연한 걱정도 들었다.
“집에 오면 우리와 대화는 어떻게 해요? 한국말도 못 할 텐데.”
“…….”
“영어 학원에 다녀야 하나….”
“아들이 통역하겠지. 미국에서 유학도 했고 몇 년이나 살았잖아.”
“결혼하면요? 그때도 맨날 아들이 통역해요? 며느리 부르면 아들도 뛰어와야 해요?”
“…영어 선생이라도 부르자.”
아들의 국제결혼을 허락하는 것을 넘어서 미리 언어의 장벽까지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 * *
“날 주환 집에 초대하겠다고?”
“가고 안 가고는 제시 마음인데….”
제시카도 남자의 집에 초대된다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부모를 만난다는 것은 조금 더 진지한 관계로 나아간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여긴 한국이다.
“주환은 한국에서 뭘 한다고 했지?”
“…그냥 회사 다니지. 저스트 샐러리맨.”
“오케이. 가자.”
그녀의 눈이 위험하게 반짝이고 있었지만, 주환은 제시의 입에서 긍정의 말이 나왔다는 사실만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