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수 확보
군부대 내에서의 자살이나 탈영은 시시때때로 벌어지고 가혹 행위는 말할 것도 없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특히 전방에 근무하는 병사들이 가혹행위를 당하면 총기를 난사하는 일까지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부대에서 애초에 불만을 표할 방법조차 마땅치 않았고, 위로 올라가도 쉬쉬하며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문제가 커지는 것이다.
휴대 전화를 허용하게 되면 군의 문제가 외부에 전달될 수 있었다. 특히 언론을 통해 공론화되면, 군에서도 가혹 행위에 더 신경 쓰는 방향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줄줄이 옷을 벗어야 할 테니까.’
“…….”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장병들 대부분이 K폰을 쓰겠지. 이 부분은 밀어 붙여보지.”
아들은 회사의 이득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장병들에게 휴대 전화 사용을 허가하면 이득이 적지 않았다. 강운 전자의 K폰과 수용의 세기 통신, 한송 그룹의 한송 텔레콤과 SK 텔레콤까지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범 강운 그룹이 휴대 전화 시장을 너무 크게 차지하고 있어. 반발이 좀 있을 게다.”
대통령 본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기업들이다. 반발을 감안하고 일을 시작해야 했다.
-언론에서 지원 사격을 할 겁니다. 군 장성들의 비리부터 시작하지요. 자료를 부탁드립니다.
검찰과 국정원, 기무사에서 묵혀 두고 있을 장성들의 비리 자료를 요청하는 것이다. 논란을 논란으로 덮어 버리겠다는 뜻이다.
“…장성들이 몸을 사리겠구나.”
-이번에 물갈이도 좀 하시죠. 군비를 눈먼 돈 정도로 생각하는 놈들이 너무 많습니다. 강운 그룹에서 대는 국방 개발비조차 줄줄 새어 나갑니다.
“바빠서 그놈들 정리하는 걸 뒤로 미뤄놨었지.”
-…별들이 우수수 떨어지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조만간 방미 일정이 있다. 너도 같이 갈 수 있겠어?”
-오바마 보러 가십니까?
“그럼 미국까지 가서 관광이라도 하고 오겠느냐? 당연히 정상회담이 잡혀있지.”
-그럼 저는 빠지렵니다.
“얌마! 너는 애비가 부탁하는 건 단칼에 자르냐?”
-…….
어차피 다음 미국 대선을 위해서라도 가 보긴 해야 했다.
-…에효. 알겠습니다. 가죠. 갑니다. 대신 언론에 얼굴을 비추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그건 네 마음대로 하고. 물론 장담은 못 한다.”
-…….
다른 대통령이라면 모르겠는데, 아버지가 하는 말씀이라 거절도 어렵다.
.
.
.
수안은 전화를 끊고 아버지가 일러 준 방미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미국에 가서 좀 쉬다 와야겠네.”
수안은 아현에게 전화해 오랜만에 휴가를 가자고 했다. 단둘이 가는 휴가였다. 세 아이들은 이제 다 커서 아빠 엄마 없이도 충분히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나이였다.
막내 시원이도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라 잘 다녀오라는 인사만 남겼다.
하지만 나현이는 아직 아닌 모양이다.
“나도 데려가야지!”
학교에서 돌아온 나현에게 엄마와 미국에 간다고 했더니 이 모양이다.
“넌 학교나 가시지? 그리고 아빠는 일정이 있어서 가는 거야.”
“그럼 엄마는!”
“엄마는 당연히 같이 가야지. 부부동반 파티가 있으니까.”
“나도 파티 갈 수 있어. 이브닝드레스도 몇 벌이나 있는데!”
“백악관에서 열리는 디너 파티야. 넌 못 가.”
“…히잉. 엄마. 엄마가 아빠한테 말 좀 해 줘잉.”
딸의 투정에 엄마는 마음이 약해졌다.
“여보. 그냥 데려가죠? 백악관 디너 파티라도 아이 하나는 더 동반해도 되잖아요.”
“…….”
“아빠앙. 나도 같이 가자. 응?”
“오랜만에 엄마랑 아빠가 단둘이 다녀오겠다는데….”
“나 조용히 있을게. 응?”
“…그래. 너 하나 데려가는 거야 뭐.”
“오예! 코코아 스토리에 미국 간다고 자랑해야지!”
“으휴.”
아내와의 오붓한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기대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 * *
수안에게는 새로울 것도 없는 파티였다. 참석자 대부분이 BE의 소유주인 스티븐 강 회장과 친분을 나누고 싶어 했고, 수안은 얼굴에 경련이 일 정도로 계속 웃으며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나현은 눈을 반짝이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었다.
“Lady. Visitors are not allowed to take photographs in here.”
그런 나현은 당연히 대통령 경호원들의 눈에 띄었다. 백악관 기자들 외에 방문자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히잉.”
“조용히 있기로 했잖니. 사진은 전부 지우고 보여 줘.”
“네에.”
나현이 휴대 전화 사진을 전부 삭제했음을 보여 주자 경호원이 돌아갔다.
“Thank you for your cooperation.”
하지만 아현은 여전히 팔짱을 끼고 나현을 보고 있었다.
“다 지웠잖아요.”
“휴지통으로 들어간 사진도 제대로 삭제해야지? 지금은 복원할 수 있잖니.”
아현도 K폰을 사용한다. 앨범에서 사진을 삭제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쳇.”
“추억으로만 남기렴. 사진은 나중에 백악관에서 나가면 찍어.”
“알았어요….”
그래도 사진 한 장은 건질 수 있었다. 물론 직접 찍은 사진은 아니고 수안과 아현이 오바마 대통령 내외와 사진을 찍을 때 백악관 홍보 기자가 찍어 준 사진이었다.
* * *
“사람이 정이 있어야지 말이야.”
강운모가 오바마와 만나고 호텔로 돌아와 하는 말이다.
“…….”
수안은 아버지와 오바마 사이에서 할 일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사적인 친분이야 얼마든지 다질 수 있지만, 정치·외교·군사적인 대화가 오가는 공적인 일에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오바마는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주한 미군 방위비라고 해 봐야 얼마 되지도 않잖아요. 매년 들어가는 돈이 1조도 안 되죠?”
내년 주한 미군 예산이 또 올라간다고 한다. 하지만 수안에겐 1조 원이 1억 원과 비슷하게 들렸다.
“그럼 네가 세금이라도 더 내든가. 방위비 또 늘어난다고 하면 여기저기서 물어뜯어.”
“안 그래도 해외 자금 들여와야 하니까 이번 기회에 싹 가져오죠 뭐. 가져오는 돈의 상당한 부분은 세금으로 내야 할 겁니다.”
“…대체 얼마나 모아 놨어?”
아버지도 아들이 들여올 자금의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다.
“여기저기 써도 자꾸 들어와서 한 7천억 되네요.”
BE 인베스트먼트 미국과 일본에서 들어오는 배당금으로 축적된 금액이다.
“…달러지?”
이젠 예전처럼 속지 않는다.
“그럼요.”
“그럼 세수를 최소 350조는 확보한다는 뜻이네?”
대한민국 한 해 예산과 비슷한 금액이었다.
“해외에서 납부한 세금은 빼주셔야죠.”
“그래도 300조는 낼 거잖아?”
예전 같으면 아들 돈이라도 세금으로 나가는 돈이 아까웠을 것이다.
“…매년 1천억 달러 정도만 나눠서 들여오겠습니다. 한꺼번에 들여오면 외환 시장에 충격이 너무 큽니다. 필요에 따라 금액을 조정하면 되겠죠.”
“큭. 앞으로 예산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겠구나.”
하지만 아들이 가진 자산이 어디 한두 푼이던가. 세금으로 자금의 상당 부분을 납부해도 수백 조였다. 숫자에 불과한 돈으로 뭐라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또한 수안도 아버지께 7천억이라고 했지만, 지금까지 BE 인베스트먼트에서 들어온 돈은 어딘가에 또 투자되고 있었다.
강운모도 아들이 다른 주머니가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녀석이 가진 자금이 7천억 달러가 전부일 리가 없지.’
“이러려고 지금까지 묵혀 뒀죠. 아버지께서 국정을 운영하시는데, 도움이 된다면 전부라고 못 내주겠습니까.”
“큭. 복지 예산을 크게 늘려도 되겠어. 국방 예산도 더 배정할 수 있겠고.”
“대통령 중임제 통과됐어도 다음 당선까지 확실한데 아쉽습니다.”
“해 보니까 5년이 딱 좋은 것 같더라. 이 짓을 5년이나 더한다고 생각하면 아찔해.”
권력의 맛이 달콤하다지만, 아버지는 이미 강운 그룹에서 총수로 지내 온 시간이 있어서 그렇다. 규모만 더 커졌을 뿐이다.
“앞으로 헛발질만 안 하시면 역사에 남을 대통령이 되실 겁니다.”
“청와대에 머리 좋은 놈이 한둘인 줄 알아? 걔들 말만 잘 들어도 헛발질할 일이 없어.”
청와대에서도 부하 직원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능력은 여실히 발휘되고 있었다. 게다가 여당과 야당의 지원을 동시에 받는 최초의 대통령이다. 수안이 이현창에게 끝까지 거액을 안겨 준 이유 중에 야당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함도 있었다. 그리고 정우현을 끌어들이며 박재문 전 대통령을 따르던 친박 계파를 손에 넣었고, 기존 김대준의 동교동 계파는 전부터 아버지가 틀어쥐고 있었다.
원하는 법안은 서로 적당히 분쟁을 일으키는 척하며 다 통과시켜 준다.
현대판 절대 권력자의 탄생이다.
그런데도 밖에는 그리 표가 나질 않는다. 아버지가 과도한 관심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안은 노자의 도덕경이 떠올랐다.
“역시 아버지는 유지(有之)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지도자세요.”
유지(有之)는 도덕경에 나오는 이상적인 리더를 칭함이다.
太上, 不知有之: (태상, 불지유지)
가장 좋은 리더는 그가 존재한다는 것만 아는 정도의 리더이고,
其次, 親之譽之: (기차, 친지예지)
그다음 좋은 리더는 사람들이 친밀감(친애)을 느끼고 따르는 리더이다.
其次, 畏之: (기차, 외지)
그다음 리더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리더이고,
其次, 侮之。(기차, 모지)
가장 안 좋은 리더는 사람들이 업신여기고 욕을 하는 리더이다.
네 종류의 리더 중에서 첫째가는 좋은 리더가 바로 유지(有之)였다.
“허. 이제 내 앞에서 도덕경을….”
강운모 또한 노자의 도덕경을 알고 있었다.
“뭐야? 나 보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는 뜻이냐?”
“존재감이 없어도 존경심이 생기고, 절로 믿음이 가고, 민중의 사랑을 받는 지도자라고 생각해서 말씀드렸지요. 오해는 금물입니다. 제가 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아시잖습니까.”
“하여튼 말은 잘 가져다 붙여.”
“하하하.”
“가서 나현이나 오라고 해. 내 새끼 용돈이나 주게.”
“…아휴. 버릇 나빠져요. 자꾸 용돈 주지 마세요.”
“미국까지 와서 애 돈도 못 쓰게 할 거야? 사고 싶은 게 많을 거야. 어서 오라고 해.”
“…예.”
나현이는 할아버지가 부른다는 말에 얼른 달려갔다. 그리고 한껏 기쁜 얼굴로 돌아왔다.
아현은 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음을 보고 물었다.
“넌 뭘 했기에 땀을 흘려?”
“푸히히. 할아버지가 용돈을 주셔서 지금까지 연습한 요염한 춤사위를 보여 드렸지. 한참이나 즐겁게 웃으셨어.”
수안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었다.
“…얼마나 받아서 춤까지 추고 와?”
“비밀. 할아버지가 물어봐도 대답하지 말랬어.”
“…….”
“아버님은 얘가 돈 쓸 일이 뭐가 있다고 자꾸 용돈을 주시나 모르겠어요.”
부모와 움직이면 어디 가서 돈 쓸 시간은 없을 것이다.
“이래저래 아버지는 돈만 뜯기네.”
미국에서 뜯기고 손녀에게 뜯기고 그에 대한 벌충은 자신에게 했다.
“내일 오바마 잠깐 만나 보고 올게. 그리고 우린 요트 타러 가자.”
“알았어요. 비서진에 얘기해 놓을게요.”
“우리 요트 타러 가는 거야? 거기선 사진 찍어도 되지?”
“마음대로 찍어도 좋아.”
“오예! 전부 남겨 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