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샘플
강운 생명 과학이 소유한 빌딩 최상층의 회장 집무실.
김현성 회장은 며칠 전 중국에서 돌아온 임수호 차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임수호는 굳은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네 눈빛을 보니 일이 제대로 안 풀린 모양이군.”
“아닙니다. 회장님. 1순위로 생각했던 지우창 박사가 교수직을 정리하고 항주 바이러스 연구소로 간다고 확답했습니다.”
“하하하. 자네라면 해낼 줄 알았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이유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나?”
“…저는 개인적으로 지우창 박사를 대형으로 모시기로 했습니다.”
“허! 중국에서 제대로 꽌시를 맺고 돌아왔군.”
“마음이 맞는 분이셨습니다. 중국에 아직도 그런 분이 남아 있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자네 아버지가 중국분이셨지?”
“예. 중국에서 도망치듯 출국해서 한국에 정착하셨지요.”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던 1989년 6월.
당시 13살이던 임수호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한국으로 들어와 귀화했다. 중국말은 할 수 있지만, 중국에 대한 애착이나 애국심은 없었다. 자신이 한국에서 배운 중국은 하나같이 실망스러운 점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김현성은 중국 문화에 익숙한 임수호를 선택해 보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말해 보게. 내게 뭘 원하는가.”
“항주 연구소의 일은 생각보다 위험 부담이 크고 박사의 가족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중국 공안은 생각보다 많은 첩보 활동을 진행합니다. 특히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감염병 사태가 실제 발발하고 중국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면 흔적을 지우기 위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지우창 박사가 잡혀 들어가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우창 박사님께 더 많은 보상이 있길 원합니다.”
“내가 보상을 짜게 책정하긴 했지. 솔직히 그 돈에 한다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어.”
“……!”
“이번 일이 성공하면 추가 보상도 생각하고 있었네. 이렇게 중요한 일에 90억은 너무 저렴하지.”
“아.”
“자네가 생각하는 보상 금액은 얼마인가.”
“따로 생각한 금액은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추가되었으면 싶은 마음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꽌시는 그래야지. 게다가 대형으로 모시는 분이라면 더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해.”
“…회장님께서 이해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본사 강 회장님께 따로 여쭈어보고 얘기하기로 하지. 내게 전권을 주셨지만, 이런 일은 강 회장님의 재가가 필요하다네.”
“회장님께 부담을 드린 것 같습니다.”
“괜찮네. 자네의 대형을 위한 일이니, 이제 남의 일이 아니지. 게다가 인류를 위한 일이기도 하네.”
“…….”
“기다려보게.”
“감사합니다. 회장님.”
* * *
수안은 최근 감염병 바이러스에 관한 내용으로 김현성을 만나는 일이 잦았다.
중국 항주 연구소를 알아볼 것을 지시했더니, 상상 이상의 논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2015년에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실제 항주 연구소의 바이러스 조합은 그 전부터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김현성이 가져온 스정리 박사의 논문 요약본을 살펴보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수안은 일을 미리 진행하길 천만다행으로 여기며 김현성과 자주 만나 일의 경과를 듣고 있었다.
오늘도 그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김현성은 지금까지 진행된 내용을 보고서로 정리해 수안 앞에 내려놨다. 수안은 보고서를 들춰보며 김현성의 보고를 들었다.
“중국 칭화대 생명과학원 교수를 포섭했습니다. 지우창 박사는 바이러스 분야에서 스정리 박사와 비등한 수준의 석학입니다.”
수안은 지우창 박사가 아니라 보고서에 적힌 비용을 보고 놀라고 있었다.
“1년에 500만? 이 돈으로 포섭 가능했다고?”
“임수호 차장이 지우창 교수와 깊은 꽌시를 맺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호오. 임 차장이 인재였네.”
“임수호 차장은 위험부담이 있는 이번 일에 추가 보상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수안도 추가 보상에 동의하는 바였다. 수안은 지우창 교수의 가족들이 안전을 이유로 미국에 간다는 대목을 보고 말했다.
“가족들을 해외로 보내는 것도 우선 우리가 다 부담해. 그냥 돕는 게 아니라 생활비까지 전부 지급하는 방식으로 하자. 이후 미국 망명을 선택할 수도 있으니 관련 절차도 미리 알아봐.”
“예.”
“그리고 500만은 너무 짜. 전 세계인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정말 항주 연구소에서 전염병이 유출되어 퍼져 나갈까요?”
임수호 차장에게는 실제 발생할 일처럼 말하긴 했지만, 김현성은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지. 분명 그렇게 될 거야. 중국이잖아.”
수안은 스정리 박사가 올린 일련의 논문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감염병 바이러스는 자연 발생 바이러스가 아니라 연구소에서 탄생한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 바이러스는 항주 연구소에서 유출되어 야생동물 시장으로 전해진 다음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1년 보상을 천만 차이나 위엔으로 올려. 그리고 일이 성공하면 추가 보상으로 천만 달러를 지급한다고 해.”
“예. 알겠습니다.”
“중국에 파견된 국정원 직원들이 있어.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거야. 아버지께 말씀드려놓지. 이럴 때나 아버지 빽을 써 보지 않겠어?”
“국정원이 함께한다면 믿을 수 있지요.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수안은 이렇게까지 일을 진행하게 만드는 원흉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이것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바이러스를 조합하고 제대로 관리도 못 하는지….”
“아직 확실치 않은 일입니다. 유출이 되지도 않았고요.”
김현성은 모르지만, 수안은 확신한다. 막을 수 없는 일이라 답답할 뿐이다.
“확 불 질러 버릴까?”
“…….”
“그냥 해 본 말이야.”
연구소에 테러라도 해서 감염병을 원천 봉쇄하고 싶지만, 항주 연구소가 아니라도 어디서든 다시 연구를 시작할 놈들이다.
“진심이신 것 같은데요?”
“농담이야. 연구소에 불 지른다고 바이러스 연구를 그만둘 놈들이 아니야.”
“불을 질러 막을 수 있다면 하시겠다는 생각이셨네요.”
“…그야 그렇지.”
“앞으로 항주 연구소를 면밀히 감시하겠습니다. 내부에 들어가지 않아도 외부에서 얼마든지 감시는 가능합니다.”
“들키지 않게 조심해. 그리고 파견된 직원들은 마스크 꼭 가지고 다니라고 해. 손 소독도 자주 하고.”
김현성은 수안의 염려가 심상치 않음을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수안이 걱정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안이 걱정하는 일이나 예상한 일은 언제나 현실이 되었다.
“확실히 교육하겠습니다.”
* * *
지우창 박사는 스정리 박사팀에서 큰 환대를 받으며 합류했다.
“지우창 박사님이 오셨으니 저희 연구가 더 탄력을 받겠습니다.”
“별말씀을. 스정리 박사님이 이미 다 해 놓으셨겠지요. 저는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바랄 뿐입니다.”
“정말 이름이 올라가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입니다. 나라에 득이 되는 일인데, 제 이름을 알리는 것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박사님.”
“정말 마음이 든든합니다. 박사님.”
그제야 스정리 박사는 환한 웃음을 보여 줬다. 박쥐 여인다운 웃음이었다.
한참 뒤 지우창은 스정리 박사팀의 바이러스의 ‘기능 획득 연구’가 생화학 무기 개발의 일환으로 연구되고 있음을 확신했다. 스정리 박사 팀에서 1년이나 함께하며 확인한 정보였다. 그간 자신을 믿지 못해서 중요 정보를 공개하지 않다가 이제야 정보를 공개하기 시작했기에 알 수 있었다. 스정리 박사가 박쥐 샘플을 수집한다며 광산 갱도로 가서 자리를 비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걸 내가 도와야 한다고?’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바이러스의 치명성과 감염력을 극도로 강화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또한 동물에게서 발견된 바이러스를 인간에게 전염되는 바이러스로 바꾸는 연구가 진행 중이었고, 이후 유전자에 따라 치명력을 달리하는 방향까지 연구 계획에 잡혀 있었다.
이 연구가 지향하는 바는 명확했다.
‘미친 작자들. 스정리와 당국은 판도라의 상자를 만드는 것을 넘어서 아예 열어 버릴 생각이야.’
도대체 얼마나 미쳤기에 중국인을 제외한 인류를 말살할 생각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연구소에서 나간다는 선택지는 고를 수 없었다.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는 이 바이러스 샘플을 확보해 백신을 개발하도록 돕는 데 있었다.
진짜 염려스러운 것은 연구원들이었다.
“이거 내다 팔면 용돈이라도 벌겠지?”
“그거 실험 진행한 녀석 아니야? 살처분하기로 되어 있잖아.”
“어차피 인간한테는 전염되지 않아. 야생 동물 시장에 팔고 술이라도 먹어야지.”
“…내 것도 한 마리만 빼줘 봐.”
“걸리면 어쩌려고? 나 혼자는 티가 안 나지만 너까지 하면 문제가 되지.”
“어차피 스정리 박사님도 안 계시잖아. 내가 살처분했다고 표시해 둘게.”
“오오! 동지.”
지우창은 이런 일이 자행되는 것을 눈뜨고 지켜봐야 했다.
‘무조건…. 무조건 유출될 거야.’
아직 인간에 전염되는 단계가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바이러스는 스스로 진화하는 녀석이다. 언제 인류를 위협하는 바이러스로 변할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인간에게 전염이 가능한 바이러스로 진화하면 그 즉시 지옥이 펼쳐질 거야.’
지우창은 휴가를 허락받고 연구소에서 나왔다. 외부로 유출할 샘플도 이미 잘 챙겨서 나왔다. 이제 접선을 통해 전달만 하면 된다.
예상과 달리 지우창은 기차역으로 향했다.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표를 구해 기차에 올랐다. 애초에 휴가를 낸 것도 오랜만에 칭화대 동료 교수들을 만난다는 핑계였다.
기차에 탑승해 신문을 보고 잠을 자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려 베이징에 도착했다. 1천 킬로가 넘는 거리였다.
지우창은 정말 베이징의 칭화대 동료 교수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즐겁게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다시 항주 연구소로 향했다.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고 뭔가를 주고받은 적도 없었다.
“…의심할 구석이 하나도 없군.”
그런 지우창을 감시하던 공안도 보고서를 작성해 상부에 올려보냈다.
[지우창 박사의 동향 보고서: 특이 사항 없음.]
* * *
임수호 차장은 베이징의 한 호텔 안에서 국정원 직원과 마주하고 있었다.
“지우창 박사를 감시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계속 따라오더군요.”
“공안입니까?”
“사복을 입었지만, 공안이 확실합니다. 중국 비밀 정보원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감시가 조금 허술했습니다.”
“그럼…. 샘플은 확보하지 못했습니까?”
“제 해외 파트 경력만 7년입니다. 그럴 리가 없죠.”
이미 연구소의 바이러스 샘플은 무사히 확보한 다음이었다.
국정원 직원은 자신이 신은 구두를 벗어 굽을 분리했다. 그 안에는 작은 플라스틱병이 들어 있었다.
“사전에 이 구두를 제공한 것도 저희였지요.”
임수호는 지우창과 국정원을 연결해 주고 한발 물러서 있었다. 괜히 둘이 얽히게 되면 지우창의 가족을 빼돌리는 일이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기차 안에서 지우창 교수의 구두와 바꿨습니다.”
둘은 같은 사이즈의 같은 구두를 신고 있었고, 지우창이 신발을 벗은 틈에 서로 바꿔 신은 것이다.
임수호는 무사히 샘플을 확보했다는 안도감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제 이걸 한국으로 가져가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