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곡소리 (274/304)

곡소리

“…….”

“…….”

수안과 수용이 얼굴을 마주하고 어디서부터 대화가 잘못됐는지를 생각했다.

“너 아까 단위 빼먹었지.”

“형도 빼먹었잖아.”

“네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나도 그렇게 얘기했지.”

“에이. 어쨌든…. 다시 할게.”

수용이 주미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보. 50억 원이 아니야. 단위가 달라.”

“엔화야?”

엔화로 계산하면 500억이다. 처음에 용돈으로 10억 엔을 줬다면 상당하다고 할 수 있었다.

“우아. 용돈 한번 대단하네.”

“아니. 달러.”

“으응?”

“50억 달러라고.”

“…….”

“요즘 환율로 계산하면….”

수용의 말에 수안이 먼저 계산을 끝내고 말했다.

“지금은 5조 7천억 정도? 자투리가 더 있으니까 6조 원에서 조금 못 미치겠다. 환율이 상승국면으로 접어들었으니까 다음 달에만 환전해도 6조가 넘을 가능성이 크지. 내년 3월에 1,500원 이상으로 올랐다가 내려오니까, 달러당 1,400원 선에서 정리하면 딱 좋겠다.”

“그 정도 된다네?”

주미는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다.

“…….”

“여보?”

멍하던 주미의 눈빛이 조금씩 생기를 되찾았다.

“…아주버님. 어떻게 동생 용돈을 1조나 줄 생각을 하셨어요?”

분명 처음에 10억 달러를 줬다고 했으니 대충 계산해도 1조 원이다.

“그때 갑자기 돈을 많이 벌어서 그랬죠. 부모님 포함해서 우리 가족들이 전부 받았습니다. 해당 자금은 BE 인베스트먼트에서 관리하고 있고요.”

기가 막힐 노릇이다. 보통 재벌가 총수의 자산이 6조라고 해도 기함할 정도였는데, 이 집안은 전부가 다 그 정도를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 정말.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제수씨 산모가 너무 격한 감정을 느끼는 것도 그리 좋지 않아요. 심호흡 좀 하세요.”

“후읍. 후우. 후읍. 후우.”

주미는 잠시 심호흡을 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수용아. 제수씨 방으로 모셔라. 많이 놀란 모양이야.”

“어. 형.”

“괜찮아요. 이제 좀 나아졌어요.”

“괜히 용돈 얘길 드렸나 봅니다.”

“아녜요. 좋은 일이잖아요.”

“내가 깜빡하고 얘길 못했어. 여보. 정말 일부러 숨기진 않았다니까?”

주미는 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봤다.

“…….”

수안이 앞에 있어서 차마 뭐라고 하지 못했을 뿐이지 눈으론 욕을 하고 있었다.

“제수씨는 받고 싶은 선물이나 생각해 보세요. 수용이 너도 같이 고민 좀 해.”

“또 무슨 선물?”

“조카 태어나면 줄 선물.”

“오오. 알았어. 나 비싼 거 사 달라고 한다?”

“제발 좀 그래라.”

“크흐흐.”

주미는 태어날 아기의 선물은 안중에도 없었다. 머릿속엔 50억 달러만 가득했다.

* * *

수용은 주미와 함께 방으로 들어와서도 좌불안석이었다. 아내의 표정이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깜빡할 돈이 따로 있지 50억, 아니 6조를 깜빡해?”

“…내 돈이 아니다 싶어서.”

“그 돈이면 교본 그룹 지분을 얼마나 많이 확보할 수 있었는데….”

지분 물려받겠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냥 사 버리면 되니까.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지 않나?”

“내가 이런 당신을 믿고 무슨 일을 하니?”

“…미안.”

“…….”

돈이 많다는데 미안할 일이던가. 주미는 언제나 자신에게 져 주는 남편의 자상함을 떠올렸다.

“…….”

태어날 아이를 생각해서 공부하라니까 대학원까지 다닌 사람이다. 지금도 저렇게 미안한 얼굴로 자신의 기분만 생각하는 남편에게 도리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리 와 봐요.”

주미는 남편을 꼭 끌어안았다.

“오빠가 있어서 내 삶이 이렇게 변했어. 내가 미안해. 당신한테 괜한 소리를 했어. 안 그러려고 했는데, 또 이랬네.”

“아, 아냐. 내가 정신없이 산다고 그 돈을 잊어버리고 있었어. 당신 말대로 그 돈이 있었으면….”

“지금 그 돈은 어차피 쓸 데도 없어. 그냥 교본 증권에 맡겨 놔.”

“응.”

“그리고 이번 기회에 교본 증권 주인이 누군지 확실하게 알려 주겠어. 다 집합이야.”

“…집합?”

“회사는 내가 알아서 할게. 자기는 몸만 들어와. 일은 천천히 배우면 되니까.”

“당신은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임신 초기인데 회사와 집에 너무 신경 쓰고 있잖아.”

형제가 여자 문제로 다투고 집까지 나갔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 형 말대로 임신 중에 이런 충격적인 사건은 피해야 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오빠 집 나간 게 벌써 두 달 전이야.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건 더 오래됐고. 그래서 지금은 괜찮아.”

“처남은 어쩌자고 그런 여자랑….”

수용은 결혼하고도 처남과 친해지지 못했다. 아내의 오빠라고 깍듯하게 대우했지만, 상대가 도통 받아 주질 않았다. 자주 만나기라도 해야 정이 쌓일 텐데, 수용의 얼굴도 보기 싫어했던 사람이다.

“오빠 얘긴 이제 꺼내지 마.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

“어휴. 그래. 여보는 생각하지 말고 편히 있어. 나도 다시는 얘기 안 꺼낼게.”

수용은 낮에 수안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아. 내가 뭐 해야 해? 형에게 물었더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당신 말만 들으래.”

“푸흡. 역시 아주버님이셔.”

“내가 엉뚱한 거라도 사 올까 봐 그랬을 거야.”

“오! 정답.”

수용은 두꺼비처럼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

“우리 자기는 토라진 얼굴이 제일 귀여워.”

“쳇! 쳇!”

“호호호. 또 해 봐. 또.”

사랑의 결실인 아기의 존재를 알게 된 날, 부부는 미래를 그리며 오랜 시간 대화했다.

* * *

교본 증권은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구둣발 소리로 시끄러웠다.

“박 차장. 이따가 나 찾는 전화 있으면 오후에 다시 걸라고 해. 알았지?”

“예. 부장님.”

지나가던 다른 팀 차장이 박 차장에게 물었다.

“…너희 부장님은 어딜 저렇게 바쁘게 가셔?”

“부장급 이상 회의 있다더라. 너희 팀장도 갔을걸?”

“부장, 팀장에서 어디까지 참석인데?”

“사장님과 부사장님도 긴장하는 회의라고 했어.”

“어엉? 회장님이 오셔?”

“아니. 우리 아가씨 오신대.”

“아가씨라면…. 신주미 상무님? 우아. 위세 한번 대단하네.”

“생명 보험에 계신 도련님이 회사 안 나온다더라. 그러니 알아서 기어야지.”

신주환의 무단결근이 벌써 두 달이다. 그 전에 신 회장이 아들 주환을 퇴사로 처리하기도 했으니 사내에서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헙! 여동생이 오빠를 밀어낸 거야?”

“스스로 걸어 나갔다는데, 진실은 아무도 몰라.”

“이사들 줄 서느라 장난 아니겠다.”

“너도 입조심하고 줄 잘 타라. 우리 투자본부 금융 2팀 부장님이 라인을 제일 잘 타는 거 알지?”

“큭. 그것도 자랑이냐?”

우두머리가 존재하지 않는 사무실에선 차장이 왕이었다. 둘은 부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노가리에 여념이 없었지만, 부장들이 들어가 앉아 있는 회의실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 * *

“갑자기 소집해서 죄송합니다. 긴급한 사항이 생겨서 정 사장님께 제가 요청했습니다.”

명목상 오늘 소집은 교본 증권 정 대표의 지시로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여기 앉아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늘 회의실을 장악한 사람은 교본 생명 보험의 신주미 상무이사였다.

“정 사장님. 교본 증권 작년 운용 자금이 얼마입니까.”

주미는 자연스럽게 정 사장에게 물었고, 교본 증권 사장도 당연하다는 듯이 주미에게 보고했다.

“예. 상무님. 저희 교본 증권의 작년 조달 자금과 운용 자금을 더하면 3조 원가량, 영업 수익은 4천 7백억으로….”

“거기까지면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나중에 듣죠.”

“예. 상무님.”

주미는 회의실에 착석한 부장 이상의 임직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교본 증권이 운용하는 자금이 고작 3조밖에 안 됩니다. 상당히 실망스러운 수치입니다.”

모두가 주미의 눈을 피해 수첩만 쳐다봤다.

“정 사장님. 하나 더 묻겠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교본 증권에 운용 자금을 6조 원 추가해도 운용할 수 있습니까?”

“유, 육조!”

“여기 회의실에서 가족 얘기는 민망하지만, 다들 아시는 것처럼 제 남편이 강운 그룹 막내아들입니다.”

6조 언급에 이어 곧장 남편을 언급했다. 임직원들은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저절로 그려졌다.

‘그럼 6조 원의 주인이….’

“남편이 BE 인베스트먼트에 맡겨놨던 50억 달러를 교본 증권으로 옮긴다고 합니다. 난 이 자금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지 정 사장님과 여러분께 묻고 있어요.”

“……!!”

“……!!”

“커흑.”

“50억 달러라니….”

“정 사장님? 아직 제 물음에 답하지 않으시네요?”

“죄,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어서….”

“…이해합니다.”

주미도 얼마나 놀랐던가. 교본 증권의 모든 자금을 박박 긁어모아야 3조에 불과한데, 한 사람이 6조를 맡긴다니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 자금이 넘어오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라도 준비하세요. 50억 달러의 관리를 위해 추가 투자본부를 신설하고 해당 자금을 담당할 인력을 배치하세요. 각 팀에서 능력이 출중한 직원들을 차출해서라도 신본부를 만들어 내야 할 겁니다. BE는 단 몇 년 만에 수백 퍼센트의 수익률을 기록했습니다. 교본 증권은 그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비슷한 수준은 달성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 사장님. 그렇죠?”

“예! 상무님. 꼭 달성하겠습니다.”

교본 증권 회의실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려 6조다. 이 돈이 들어오면 기존의 두 배를 더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럼 시작합시다. 여기 국제금융팀장님 회의에 오셨습니까?”

“예. 상무님. 국제금융팀 진우식 부장입니다.”

“국제금융팀은 올해 달러화 변화를 어떻게 예측합니까.”

오늘 환율은 최근 4년 중에 가장 높은 환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원달러 환율이 급격하게 치솟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환율을 유지할지는 예측이 어렵습니다. 만약 50억 달러가 입금되면 바로 환전을….”

“현재 1,150원 대의 환율이 1,400원까지 오를 확률은요?”

“1% 미만입니다.”

확신에 가득한 말에 주미는 피식 웃고 다리를 꼬며 말했다.

“하. 진 부장님. 강수안 회장님은 간다고 하던데요?”

“……!!!”

“내년 3월이 최고점이라고 말씀하셨고, 정확한 수치도 말씀하셨어요. 원달러 환율이 1,400원도 훌쩍 넘어 1,500원까지 찍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회사가 제대로 예측한 거 맞습니까?”

“다,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투자의 귀재인 강 회장의 예측이라면 이번 교본 증권의 예측은 무조건 틀렸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알려준다.

“본인이 모르면 부하 직원들 얘기라도 들어요. 그것도 힘들면 전문가를 모셔 오고요. 아니면 강운 증권과 BE 인베스트먼트에 협조를 받아도 좋겠습니다. 하지만! 괜히 잘났다고 혼자 뻗대다가 회사를 말아먹지는 맙시다. 환율 예측은 기본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상무님.”

진 부장은 강운 증권과 BE 인베스트먼트에 협조를 얻으려면 신주미라는 통로가 필요했기에 부탁한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인정이 빨라 다행이네요. 당장 사표를 받아야 하나 했더니….”

“히익!”

“다음은 채권팀과 트레이딩센터….”

누구도 상무이사가 주재하는 회의에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당장 자신의 코가 석 자였다. 여차하면 국제금융팀 꼴이 날 수도 있었다. 주미는 몇몇 팀장들과 대화를 나누고 바로 그 윗급을 찾았다.

“투자본부장님?”

“예, 예. 상무님.”

대답하는 사람도 주미와 같은 상무이사였지만, 지금은 사장도 바짝 얼어 있는 현실이다.

“지금 대화해 보니 팀장들의 업무 전문성이 좀 떨어지는 것 같은데, 파악하고 계셨습니까?”

“…시정하겠습니다.”

이제 투자본부 이하 팀장과 팀원들은 곡소리 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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