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돈과 선물
“한참 됐어. 엄마가 맨날 나한테 전화해서 하소연했거든.”
“장모님은 그런 내색 없으셨는데….”
“사위한테 어떻게 그런 얘길 하겠어. 어떻게든 둘을 떼어 놓으려고 했는데, 오빠가 적반하장격으로 나와서 아버지 귀에도 들어갔어. 그게 벌써 두 달 전이야.”
“주미야. 그런 일이 있었으면 오빠한테도 얘길 했어야지.”
“미안. 나도 이런 얘기 꺼내기가 쉽지 않았어.”
“…….”
아내가 부끄러운 집안 사정을 말하지 못하고 끙끙거렸을 생각에 수용은 더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기는 처가에 들어가 살아도 괜찮겠어?”
어머니 앞에선 다 얘기된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이 얘기도 논의되지 않았다. 주미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참 일찍도 물어본다.”
“…항상 내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다 보니까 오빠랑 상의할 생각도 못 했어.”
오빠의 일이 수면으로 올라와 아버지와 분쟁이 생겼을 때 주미는 바로 임신과 친가로의 복귀를 계획했다. 혹시 계획에 문제가 없는지 따지긴 했지만, 남편인 수용과 의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남편은 항상 자신의 의견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남편 대우를 제대로 못 했지?”
“흠흠.”
수용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미안.”
“앞으로 이렇게 중요한 일은 나랑 상의 좀 하자. 내가 탁월한 머리를 갖지는 못했어도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겠어?”
“지나고 보면 항상 오빠 말이 옳아. 난 꼼수만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렇게까지는 아니고….”
“맞아. 그래서 앞으론 오빠 말을 항상 먼저 들어 보려고.”
“듣기만 해. 듣기만. 결정은 지금처럼 자기가 하는 걸로 하자고.”
주미는 이런 남편이라 결혼을 주저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신랑은 잘 골랐지.’
“내가 임신하고 집으로 들어가면 아버지 어머니도 조금은 기뻐하시겠지?”
“조금이라니. 두 분이 얼마나 우리 아이를 기다리셨는데, 특히 아버님이 많이 좋아하실 거야.”
“자기는 집에서 오빠 없는 자리를 대신해 줘. 여기서 아버님, 어머님께 하는 정도만 하면 자기는 사랑받는 사위가 될 거야.”
“그래. 맡겨 줘.”
“그리고 교본 그룹에도 오빠가 와 줘야 할 것 같아….”
“아. 형님이 회사에 안 나온다고 하셨지?”
“응. 요즘 아버지가 통 기운이 없으셔. 자기는 믿음직하니까 들어와서 일 시작하면 아버지가 더 좋아하실 것 같아.”
“그래! 까짓거 해 보지 뭐!”
* * *
수안은 집으로 돌아와 주미를 서재로 불렀다.
“축하해요. 제수씨. 이제야 임신해도 될 때가 된 거죠?”
“…예. 아주버님. 조금 늦었습니다.”
“사돈총각은 결국 신 회장님과 충돌한 모양입니다?”
“…다 알고 계셨어요?”
“조금 짐작하는 정도였죠.”
“어머니는 사전에 오빠가 만나는 여자를 알고 어떻게든 떼어 놓으려고 했는데 소용없었다고 해요. 오빠가 두 달 전 집에 와서 그 여자와의 결혼 문제를 꺼냈고, 아버지는 당연히 노발대발하셨어요. 그날 이후 집은 물론이고 회사에도 나오지 않고 있어요.”
주미가 전략기획실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주환은 계속 업무지원실에서 일하며 불만을 키워왔다. 술을 먹고 집에 오는 날이 늘었고, 음주 운전이나 폭행 시비도 잇따랐다. 그러다 소위 텐프로라고 불리는 여성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녀들에게 대기업 맏아들인 주환은 돈 많은 호구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제대로 빠진 모양이네요.”
“덕분에 아버지는 오빠에게서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여기에 제수씨가 임신까지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오빠가 돌아와도 오빠의 자리는 없을 거예요. 남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테니까요.”
오빠의 빈자리까지 채울 계획이 있었다면, 수안의 예상대로 주미의 임신은 철저한 계획 아래에서 실행된 모양이다.
“수용이는 당연히 따르겠네요. 제수씨가 3년이나 시댁에서 살았으니, 수용이도 처가살이를 해 봐야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버님.”
“사돈총각은 언제쯤 구제하면 되겠어요?”
수안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화류계 여성을 떼어 놓고 주환을 잡아 올 수 있었다.
“놔두세요. 제 아이가 태어나고 부모님과 정을 붙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남편이 아들을 대신해 회사에 자리 잡을 시간도 필요하고요.”
“…….”
수안은 주미의 독심을 듣고도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대화도 가족이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결국은 수용이네 가족이 잘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럼 최대한 기간을 늘리는 방향으로 하죠.”
일의 해결도 가능하지만, 일을 더 심각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물며 기간을 늘리는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다. 적당한 자금을 꾸준히 지원하면 돈 떨어졌다고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아, 아닙니다. 그냥 놔두셔요. 혹시라도 제가 나중에 아주버님을 원망할 수도 있잖아요.”
수안은 작은 미소를 보였다. 그래도 아직 형제의 정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가끔 근황만 파악하겠습니다. 소식이 궁금하면 나한테 물어봐요.”
“감사합니다. 아주버님.”
“그나저나 수용이는 또 공부를 시작해야겠네요.”
“…네. 이번엔 금융사를 관리, 경영하는 데 필요한 공부를 시켜보겠습니다.”
나중에라도 통신사를 경영하기 위해서 대학원에 진학했던 수용은 얼마 전에야 2년 석사 과정을 끝냈다. 이번에 도전할 분야는 금융이었다.
“푸흐흐. 제수씨 덕분에 우리 수용이가 열심히 공부할 일이 또 생기네요.”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이번엔 크게 고생하지 않을 겁니다. 실무를 통해 배워나가면 됩니다.”
“밑바닥부터 굴리진 말기로 합시다. 그래도 다른 회사에선 대표까지 역임하는 사람이잖습니까.”
“남편이 저보다 직급이 낮으면 안 되죠. 아버지와 협의해서 적절한 직급과 부서를 찾겠습니다.”
확실히 주미와 대화하면 뭔가 시원했다. 수용과 대화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그럼 제수씨는 수용이를 교본 그룹 차기 경영자로 밀고 싶다는 말인가요?”
“…….”
본래 남편의 형이자 강운 그룹 회장인 수안에게 좋은 말만 할 수도 있었다. 나중에 진짜 경영자 자리를 자신이 가져오는 방법으로 선회하면 얼마든지 남편에게 경영권을 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자리는 제가 갖고 싶어요.”
‘아주버님은 적이 아니야. 이제 나도 강운 그룹 가족이고.’
훗날을 생각하면 거짓보다 진실이 낫다.
“푸흐흐. 그 얘길 뭘 그렇게 어렵게 합니까. 나도 수용이보다 제수씨가 교본 그룹 경영자 자리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수용은 그냥 믿을 만한 가족 정도로만 생각합시다. 가끔 제수씨가 자리를 비우면 잠시 결재를 맡아 줄 정도? 딱 그 정도 위치가 좋겠네요.”
“항상 절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마음 같아선 교본 그룹 그만두고 강운 그룹으로 모시고 싶은 분입니다. 제수씨는 본인 능력에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돼요.”
“호호호.”
“조카가 생긴다는데 뭘 드리면 좋을까 생각해 봤어요.”
“어머. 저도 주세요?”
지금까지 조카가 생길 때마다 형제에게 선물을 챙겨 줬다. 첫 조카인 하린이가 태어났을 때는 하린이 앞으로 작은 건물 하나를 챙겨 줬다. 물론 그 과정에 발생하는 세금도 수안이 납부해서 처리했다. 작년에 태어난 하린이 동생도 하린이 건물 근처에 비슷한 빌딩을 선물했다. 수현과 진태 사이에서 태어난 조카는 별장을 선물했다. 그 별장은 수현이 가족이 앞으로 활용하게 될 것이다.
주미도 아이들이 받은 선물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하죠. 수용이가 아빠가 된다는데 제가 가만있을 수 있나요.”
“하지만 오빠가 별로 내켜 하지 않을 텐데….”
“수용이는 매번 그렇다니까요.”
여전히 수용은 형에게 받는 무언가를 극도로 꺼려 했다. 강운 그룹 주요 지분을 넘기며 받아 온 세기 통신이 자꾸만 성장해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예전에 준 용돈은 쓰지도 않는 모양이고….”
“호호. 오빠한테 용돈도 주셨어요? 저 이런 얘기 들을 때마다 엄청 부러운 거 아시죠?”
수안은 용돈 얘기를 꺼냈다가 수용의 돈을 아직도 BE 인베스트먼트에서 운용하고 있음을 떠올렸다.
“아! 수용이 용돈은 이번에 교본 증권으로 옮기라고 해야겠네요. 처가댁에서도 증권사를 갖고 있는데, BE에서 관리하는 건 아니다 싶네요. 조만간 교본 그룹으로 들어간다니 미리 옮기는 편이 좋겠습니다.”
“호호. 용돈 정도야 뭐. 괜찮겠죠. 안 그래도 남편은 교본 증권에 적을 두는 편이 좋겠다 싶었어요.”
“…….”
수안은 주미가 수용의 용돈 규모를 짐작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바로 전화를 들었다.
“수용아.”
-어. 형. 집에서 왜 전화야?
“너 내 서재로 와. 제수씨랑 얘기하다가 네 얘기가 나와서.”
-또 난 알아듣지도 못하는 얘기 하는 거 아냐?
“아니야. 네 용돈 얘기야.”
-아. BE에 묵혀 둔 거?
“너 거기 얼마 들었는지 알긴 아니?”
-모르지. 가끔 회사 우편으로 뭐가 오긴 했는데, 별로 관심이 없어서 파쇄기에 넣어 버렸어.
“끄응. 어쨌든 빨리 와.”
-알았어.
수안이 전화를 끊자 주미는 무척 궁금한 얼굴로 수안을 바라봤다.
“…….”
주미는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오빠는 왜 불렀어요?’
“…수용이 오면 얘기할게요.”
“우아. 용돈이 좀 많았나 봐요?”
“뭐. 적당히?”
“오오. 기대해도 되는 거죠?”
수안과 주미의 적당히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벌컥.
이미 통화한 참이라 수용이 서재 문을 열고 훌쩍 들어왔다.
“어. 형.”
“BE에서 관리하는 네 자금을 교본 증권으로 옮기는 게 어때?”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진즉에 옮길걸.”
“넌 네 돈이 얼만지도 모르고, 관리도 안 하고….”
“관리는 BE에서 알아서 해 주잖아. 알아서 펀드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니까 내가 굳이 관리까지 할 필요가 있나.”
“에효. 어쨌든 제수씨한테 얘기하고 옮긴다?”
“그렇게 하지 뭐.”
“아주버님 얼마예요? 당신 정말 얼만지 몰라?”
수용은 아내의 질문에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형. 처음에 10억으로 시작했지?”
“맞아. 10억.”
“아…. 10억. 용돈으로는 좀 많네요. 호호.”
생각보다 적은 금액이라 주미는 김빠진 표정이었다. 조카들에게 선물한 건물이나 별장 수준보다 부족했다.
“이게 그냥 많아? 난 이제야 이 돈이 얼만지 감을 잡아간다니까?”
수안은 수용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어휴. 감이 잡히긴 하셔? 지금은 다섯 배로 불었다 인마.”
“헉. 언제 그렇게 불었어?”
“이번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때문에 난리 났잖아. BE 공매도에 그 펀드가 쓰였으니까 또 불었지.”
“빨리 빼야겠다. 더 불어나면 골치만 아파.”
“옮기기 전에 넌 교본 증권에 계좌나 만들어 놔. 거기 투자본부와 미리 사전 협의도 해 놓고…. 아니다. 이 부분은 제수씨가 해 주는 편이 좋겠네요. 이 녀석이 아직 교본 그룹에 들어간 것도 아니니까요.”
“아. 예. 제가 해야겠죠.”
10억에서 다섯 배로 불었다고 해도 고작 50억이다. 50억이 큰돈이긴 하지만, 투자본부에까지 통보할 필요는 없는 수준의 금액이었다.
“아마 따로 팀을 꾸려야 할 겁니다. 워낙에 덩치가 크다 보니….”
“…저기. 아주버님?”
수안이 의아한 눈으로 보자 주미가 솔직하게 말했다.
“보통 천억 이상은 되어야 투자본부에서 관심을 가질 텐데요. 50억은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