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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둑 (253/304)

싹둑

“저녁도 여기서 드실 생각입니까? 아무래도 저녁엔 레스토랑을 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점심까지는 내부 인테리어 재배치를 핑계로 문을 닫을 수 있었지만, 저녁까지는 무리였다. 레스토랑에 저녁 식사를 예약한 호텔 VIP도 있었다. 아무리 강수현이 회장의 여동생이라도 나가줘야 했다.

“엇! 벌써 날이 어두워졌네?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났지?”

겨울이 가까이 와서 벌써 어둑해진 창밖이다. 시계를 보니 진짜 저녁 시간이다. 수현은 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상대에게 푹 빠져 있었다.

“이만 일어날까요? 수현 씨?”

“힝. 아쉽다.”

“오늘만 날이 아니지 않습니까.”

“진태 씨는 내일 뭐 해요?”

“별다른 일정은 없습니다. 얼마 전에 영화를 끝내고 쉬고 있었거든요.”

“잘됐다! 내일 영화 보러 갈래요?”

“아하하. 저와 영화 보러 가긴 쉽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국내 인기 배우인 그가 극장에 나타나면 그 극장을 포함해 근방이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이다.

“아. 밖에선 어렵겠네요.”

“아가씨. 그렇게 아쉬우시면 객실이라도 잡아 드릴까요?”

박 팀장의 말에 수현이 반색했다.

“오! 진짜요?”

“……!”

진태는 갑작스러운 농담에 놀랐고, 그에 긍정하는 수현의 말에 더 놀랐다.

“농담입니다. 아가씨. 좋아하지 마세요. 저 잘리고 싶지 않습니다. 누굴 실업자로 만들려고 그러세요?”

“나, 나도 농담이었어요.”

“진심인 것 같던데요?”

“쳇! 박 팀장님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요?”

수현의 말에 박 팀장은 진태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강 대표님이 이렇게 연기를 잘합니다. 하하하.”

“아…. 배우 하셔도 되겠네요.”

“오늘 즐거우셨다니 무척 기쁘답니다. 하지만 시간이 참 촉박하군요.”

박 팀장은 시간을 보며 그들을 재촉했다.

“지금 일어나셔야 다른 분들과 마주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알았어요! 간다고요!”

둘은 결국 레스토랑에서 쫓겨나듯 일어나야 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다음엔 고려 호텔 말고 뉴월드 호텔이 좋겠습니다.”

이리로 오지 말라는 뜻이다.

“이왕 전세 낸 거 하루를 다 내줘야지. 오빠는 정말 센스가 없다니까.”

만나기 전엔 밥도 안 먹고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했던 사람이 하는 말이다.

“그래서 레스토랑에 사람들이 없었군요? 덕분에 정말 편했습니다.”

“오빠가 날 위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진태 씨를 위해서 그랬던 모양이네요. 그럼 센스는 조금 있는 걸로 할까요?”

“회장님께 감사 전화라도 드려야겠는데요? 오늘 식사도 너무 즐거웠어요. 이렇게 편하게 밖에서 먹어 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네요.”

헤어지기 전 수현은 한 번 더 들이댔다.

“오늘 어땠어요?”

“정말 즐거웠습니다. 오늘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쉬울 정도로요.”

“어쩜 그렇게 말도 잘해요. 나 방금 드라마 여주인공이 된 줄 알았잖아요. 아! 그런데 왜 연락처 달라고 안 해요? 나 차였어요? 말로만 아쉬운 건가요?”

대답하기도 전에 연달아 나오는 질문에 진태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하하. 이제 막 달라고 할 참이었습니다.”

진태는 재벌가 아가씨가 화끈해도 너무 화끈하다 생각했다.

“그럼 얼른 줘 봐요.”

진태의 휴대 전화를 빼앗듯이 들고 가서 자신의 번호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진태 씨 번호 겟! 내 코코아톡 아이디도 친구 추가해욧!”

“예~ 물론이죠.”

번호를 교환하고 코코아톡 친구까지 추가했지만, 수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흠.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우리 아쉬운데 맥주 한잔할까요? 딱 한 잔만!”

“그럴까요? 그런데 저는 아는 곳이 없어서요.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면 좋겠죠?”

“음. 언니네 집으로 쳐들어갈까나?”

“네? 수현 씨 언니네 집이요? 하하하.”

진태는 농담으로 생각했지만, 수현은 농담이 아니었다.

“조카 하린이 얼굴도 볼 겸, 잘생긴 진태 씨도 소개해 줄 겸. 겸사겸사?”

“하하하. 수현 씨는 정말 재미있어요. 오늘 수현 씨 덕분에 많이 웃어요.”

둘이 도란도란 대화하는 사이 최장호가 나타났다.

두둥.

최장호는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헙! 최 실장님?”

“아가씨. 여기 호텔입니다. 누가 볼까 무섭습니다. 차로 가시죠.”

“지금까지 절 기다리셨어요?”

“원래 이런 일은 제 담당입니다.”

오래전 강수진의 맞선도 최장호가 자리를 지켰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렇게 안 나오시나 했습니다.”

“…….”

수현이 말이 없자 진태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방금 맥주를 마시자는 말도 들었던 최장호다.

“오늘 만남은 끝입니다. 술은 어림없습니다.”

“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맥주 한 잔도 안 돼요?”

수현의 물음에 장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안 됩니다.”

“헐. 너무 단호해서 단호박인 줄.”

“일전에 수진 아가씨도 맞선남과 맥주 마시러 갔다가 회장님이 달려오셨죠. 그날과 같은 일이 벌어지길 바라십니까?”

“…언니가 그랬어요?”

“첫째 아가씨와 결혼하신 지금 그분과 맞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진 아가씨께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아. 어렴풋이 들었던 것도 같네요.”

‘형부가 뭐라고 했더라….’

형부는 오빠가 등장해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다고 했었다. 이제야 하나씩 기억난다.

‘언니가 강운 그룹 딸인 줄도 몰랐었는데 오빠를 보고 알았다고 했었지? 그리고 그날 오빠가 잡은 어깨에 시퍼렇게 멍 자국이 생겼었다고….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고 했던가? 아!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냐.”는 말을 들었다고 했었어! 형부는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했지!’

“……!”

수현은 진태에게 다음에 보자는 말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오빠가 엄해서….”

오빠 주먹에 스치기만 해도 저 잘난 얼굴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하하. 아빠가 엄하다는 말은 우스갯소리로 종종 들었던 것 같은데, 오빠가 엄하다는 말은 처음이네요.”

수현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만 날이겠는가! 내일도 있었다.

“그럼 맥주는 내일….”

“내일도 안 됩니다.”

수현은 최 실장이 안 된다는 말에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럼 언제 먹어요?! 나보고 어쩌라고?”

“내년에나 드시죠.”

“아악! 나 진태 씨랑 도망갈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지금 내가 몇 살인데 이래요?”

“아무리 그러셔도 어림없습니다. 오늘은 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차도 갖고 왔단 말이에요! 내 차는 어쩌고요?”

“그러면서 술을 드시려고 했습니까? 차는 경호팀에서 챙길 겁니다. 저 말고도 몇 더 있습니다. 도주 시 바로 검거 작전 돌입합니다. 포기하고 얌전히 돌아가 주세요.”

장호는 수현에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수안이 어려서부터 함께한 장호는 수현이 어렸을 때부터 얼굴을 익혀온 사람이다. 게다가 지금은 수안을 대신해 이 자리에 있는 경호 실장이라 수현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히잉.”

“수현 씨 다음에 보죠. 오늘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네요.”

“쳇! 그럼 나 다음엔 방 잡고 만나요? 그래도 말릴 건가요?”

“…그러십시오. 대신 회장님이 머리를 밀어 버려도 모릅니다. 전 분명히 전달했습니다.”

“미, 미쳤어. 정말!”

수현은 장호에게 붙잡혀 집으로 들어갔다. 오빠가 머리를 민다고 하면 정말 밀어 버릴 수도 있었다.

* * *

BE와의 연락을 위해 늦게까지 일하던 수안은 장호에게 있었던 일을 전화로 보고받을 수 있었다.

“뭐어?!! 수현이가 먼저 술을 먹자고 해?!”

-예. 자꾸 말리면 나중엔 방을 잡고 만나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장호는 수안의 불호령을 생각해 전화기를 귀에서 조금 멀리 떼어 놓고 있었다.

하지만 웃음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크흐흐. 녀석이 드디어 임자를 만났네. 역시 얼굴이 먹어 줘야 통한다니까. 잘했어. 미남몬!”

-……놔둘까요?

수진이 연애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래. 이제 다 컸는데 알아서 해야지.”

나이 서른이 넘었으니 알아서 할 일이다. 둥지를 떠난 지 한참이나 지난 녀석이었다.

“성인이니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할 거야. 그리고 진태 씨도 사람이 괜찮잖아. 쉽게 상처 주고 할 사람은 아닌 것 같더라. 괜히 뒷조사를 했을까.”

알려진 것도 많은 연예인이었고, 사전 조사도 확실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모든 것이 낱낱이 파헤쳐졌다. 분석 결과는 합격. 그러니 수현과의 맞선이 성사되지 않았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녀석이 수현이 상처 주면…. 내가 어디 가만두나?”

-그, 그렇겠죠. 절대 함부로 못 합니다.

수현을 함부로 했다간 연예계 생활을 그대로 접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풀어 주긴 하지만, 여동생을 아끼는 마음은 예전 그대로였다. 서른이 넘었어도 여동생은 죽을 때까지 여동생이다.

-두 분은 상당히 화기애애했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결과를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최 실장이 감시 똑바로 해. 경호 팀원들도 수현이 놓치면 각오하라고 해.”

-예. 회장님.

“내가 지켜보고 있다고 녀석에게 얘기해 놔. 허튼짓은…. 책임질 각오로 하라고 해.”

-…예.

‘아가씨가 연애는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남자가 저런 말을 듣고도 연애를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아무래도 진태 씨가 허튼짓(?)한 다음에 얘기해 줘야겠네.’

일을 치른 다음이면 무르지도 못하지 않겠는가. 목숨이 아까우면 무조건 결혼해야 할 것이다.

‘아가씨 이 최장호가 아가씨의 연애 전선을 지켜 주고 있습니다!’

수현의 연애 전선이 맑고 쾌청하다고 예보하는 최장호였다.

‘파이팅!’

* * *

수현은 연애를 시작했고, 나름 달콤한 연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엔 일방적인 관심으로 시작했어도 자주 만나다 보면 정이 쌓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수현은 통통 튀는 매력이 있었고, 밑바닥에서 기업과 사회를 경험하며 쌓은 세월이 있었다.

뉴월드 호텔에서 경험한 일들도 있었지만, 요즘 커피 프랜차이즈를 일으키며 새로운 경험을 쌓아가고 있었기에 배우 이진태와 말이 잘 통하는 편이었다. 마냥 철부지 같은 재벌가 딸이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최장호의 자의적 허락이 더해졌으니 어른들의 연애가 뜨겁게 발전, 유지될 수 있었다. 물론 책임질 일(?)이 있고 나서 배우 이진태는 최장호를 만나 무시무시한 경고를 들어야 했다. 자연스럽게 살기를 뿌리는 최장호의 말은 살인 예고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좋았으니 앞으로도 좋아야겠지요? 책임질 일을 했으면 책임을 지세요.”

“…….”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으면 회장님의 경고를 무시하지 말아야 할 겁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벗어난다고 진태 씨가 살 수 있을까요? 저는 힘들다고 봅니다. 회장님은 해외에서 PMC를 소유한 분이라 국외의 일은 저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거긴 제 담당이 아니거든요. 아시겠습니까?”

연예계 활동을 중단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왜 대답이 없죠?”

“예, 예.”

“연예인이라 평소 행동거지를 조심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회장님의 관심은 계속 이어질 겁니다. 저와 좋지 못한 곳에서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수현 아가씨를 놔두고 괜히 이상한 곳에 드나들지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안가겠습니다.”

“안 가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 거기 달린 중요한 걸 잘리고 싶지 않으면.”

“허읍.”

절로 사타구니에 손이 갔다.

“연인을 배신하고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는 일이 발생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하면…. 저는 회장님이 보이실 진노를 상상하고 싶지 않군요.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겁니다. 그땐 죽여 달라고 빌어도 절대 죽이지 않으실 겁니다.”

“딸꾹.”

“우리 앞으로 잘해 봅시다.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대답.”

“예읍. 딸꾹.”

“괜히 오늘 얘길 전해서 아가씨에게 걱정 끼치지 맙시다. 좋게 만나면 좋은 일만 있을 겁니다.”

“옙. 딸꾹.”

당연히 수현에게도 경호 실장을 만나 들었던 말을 전할 수 없었다.

최장호는 검지와 중지로 가위를 흉내 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잘 드는 가위를 사 두겠습니다. 싹둑. 싹둑.”

“……!”

진태는 약속을 어기지 않을 생각이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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