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당신!
“자네들도 마찬가지야. 가족이 우선이지 회사와 회사 경영주가 무슨 상관이야? 회사는 돈을 줄 때만 의미 있을 뿐이지 돌아서면 남이야. 직장 동료는 직장에서나 동료지 회사 나서면 아저씨고 아줌마야. 회사에 인생 바치지 마. 일한 만큼 받아 내면 끝이야. 회사 일은 개인적인 삶에 끼어들면 안 되는 거야. 도대체 날 어디까지 알고 싶은 건데? 내 마누라라도 되고 싶은 거야?”
남 치고는 너무 과하게 챙겨 주는 사람이 바로 자신들이 모시는 상사였다.
‘말씀만 저렇게 하시고 본인도 못 지키시면서….’
김현성은 수안이 자신을 포함한 여기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배영성 부회장의 경우 정말 친한 죽마고우로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최장호 실장은 오히려 나이가 많음에도 수안이 동생처럼 챙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방효 사장과 차진호 사장의 경우엔 친한 친척 형, 동생 정도….
‘난…. 내가 진짜 직장 밖에서 아저씨로 불릴 사람이지.’
자신도 수안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뜻에 반한 것도 모자라 자기 뜻을 관철하려 뒷공작까지 했으니 마음에서 떨어져 나간 것도 당연했다.
“회장님의 경영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말씀이네요. 흐흐.”
“꼭 기억하겠습니다.”
“…….”
“김현성 사장은 할 말이 많아 보이네? 요즘도 회사에서 야근했어? 내가 더블 스타 자주 못 간다고 또 퇴근 늦어지는 거 아냐? 얼굴이 부쩍 힘들어 보여.”
예전엔 항상 남의 눈치를 봤었기에 상대의 기분 변화에 민감한 수안이다.
“아닙니다. 일찍 퇴근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직원들도 제때 퇴근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놀라는 말은 아니다. 특히 차 사장.”
“억울합니다! 마냥 여자들과 놀지 않았습니다. 일도 열심히 합니다.”
“나 여자라고는 안 했다. 괜히 찔려서는….”
“아.”
“그리고 김 사장.”
“예. 회장님.”
“요즘 새로 오픈한 골프장 가 봤는데 코스 좋더라. 이번 주말에 같이 라운딩?”
“허허. 좋죠.”
김현성은 수안이 이렇게 챙겨 주는 것도 감지덕지한 마음이었다.
“우린 왜 빼십니까? 저도 골프 좋아하는데요.”
“가서 일하시라고요. 차 사장님.”
“아 몰라요. 저도 데려가세요!”
“저기…. 저도 조금 더 쉬죠. 뭐.”
차진호에 이방효까지 붙었다.
배영성은 그런 다툼에 끼지 않고 좋은 말만 했다.
“2 대 2로 딱 좋네요. 비서실에 예약해 두라고 하겠습니다.”
“뭐야. 부회장님은 회장님 측근이라 이런 건 별로 대수롭지 않다 이거죠?”
“…….”
“맞습니다. 우린 회장님과 이렇게 운동할 기회도 거의 없단 말입니다.”
“…….”
배영성은 왜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이 향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일전에 내가 다녀왔다는 그 골프장을 부회장이랑 다녀왔거든. 그러니까 별로 관심이 없지. 게다가 이번에 잘 안 맞는다고 100타 넘겼지 아마?”
“저런….”
“기운 내십쇼. 부회장님.”
“뭐 하러 타수까지 기억하고 그러세요?”
“아. 쏘리 쏘리.”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배영성도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거기 완전 제 취향이 아닙니다. 그린 근처에 해저드들이 너무 잔인해요.”
배영성은 걸핏하면 모래 해저드에 빠졌고, 연못 해저드에 빠진 것도 여러 차례였다. 말이 길어지기 전에 최장호가 들어와 알렸다.
“식사 준비 끝났다고 합니다. 가시죠.”
“이제 저녁 먹으러 가자. 오늘 셰프는 자연산 장어를 기가 막히게 조리하는 사람이거든. 특히 장어 간 꼬치구이는 대박이라는 말로도 부족해.”
“오오! 장어 좋죠!”
“차 사장은 스태미나 음식이라고 너무 좋아한다?”
“하하하.”
이방효가 차진호에게 주기적으로 시알리스를 보낸다고 들었다.
“시알리스 작작 좀 먹어. 그러다 뼈 삭아.”
“어휴. 그거 안 먹으면 힘이 안 납니다.”
“대신 오늘 장어 꼬리나 많이 먹어.”
“하하. 감사합니다. 회장님.”
* * *
수안은 워크숍에 가서 정말 원 없이 쉬었다. 돌아와서 다시 곧장 일이 시작되었지만, 푹 쉬고 온 탓인지 기운이 넘친다.
“어디까지 왔으려나?”
기다리던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소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똑똑.
아직도 수안의 곁에서 일하고 있는 장세진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앤디 루빈이 아래 로비에 도착했습니다. 회장님.”
“드디어 왔구나! 정중히 모셨지?”
“물론입니다. 비서실에서 둘이 붙어 있습니다. 김 사장님과 박 사장님도 회의실에서 대기하고 계십니다.”
예전에 앤디 루빈은 국내에 들어와 가장 먼저 삼디 전자에 방문했었다.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를 공급하기 위함이었다. 앤디 루빈은 안드로이드사(社)의 CEO였다.
‘그리고 제대로 퇴짜를 맞았지.’
10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스마트폰 운영 체제를 개발하고 있던 안드로이드와 달리 삼디 전자는 당시 2천 명이 넘는 인원을 투입해 스마트폰 운영 체제를 개발하고 있었다. 안드로이드에 관심이 있었다면 오히려 이상할 일이다.
지금은 당시와 다르다. 국내 휴대 전화 제조사 중에서 강운 전자가 가장 앞선 상황이었고, 수안은 그가 찾아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방문한다고 알렸을 때 강운 전자는 두말하지 않고 일정을 잡았다.
‘우린 당신을 홀대할 생각이 없어. 루빈.’
“모바일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두 사장님과 회의실에서 같이 대기 중입니다. 오늘 회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람이니까요.”
“내려가자.”
“예.”
.
.
.
“환대에 감사합니다. 스티븐 회장님.”
루빈은 BE 인베스트먼트의 소유주로 유명한 스티븐 회장이 로비까지 마중 나와줬음에 기꺼운 마음이었다.
‘시작부터 느낌이 좋아. 오늘은 잘될 것 같아.’
약속을 흔쾌히 허락한 일부터 느낌이 좋았는데, 상대의 밝은 표정을 보니 다른 회사와 다른 진척이 있을 것 같았다.
“하하. 루빈 씨 반갑습니다. 시차 적응은 괜찮습니까?”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프레젠테이션에 문제는 없을 겁니다.”
수안은 프레젠테이션이라는 말에 엉뚱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프레젠테이션이요?”
“예. 프레젠테이션이요.”
“그걸 왜 합니까?”
“…스티븐 회장님이 내 프레젠테이션을 들어야 우리 회사가 만들고 있는 운영 체제의 우수성을 이해하시지 않겠습니까.”
“미안하지만, 괜한 준비를 했습니다.”
앤디 루빈은 강운 전자에서 자신의 프레젠테이션을 들을 생각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나를 돌려보내기 위해 스티븐 회장이 나왔구나!’
스티븐 회장이 직접 나와 반겨 주고 사과와 함께 돌려보낸다면 기분 나빠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제가…. 크게 착각했군요.”
“맞습니다. 피곤할 텐데 괜히 프레젠테이션하느라 힘 빼지 말고 바로 회의부터 시작합시다.”
“……?”
루빈은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말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장 비서. 김 사장하고 박 사장 왔다고 했지?”
“예. 아까 회의실에 도착했다고 연락받았습니다.”
“잠깐 무슨 회의를 말합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다니 먼저 들어갑시다. 같이 오신 분들도 다 들어오세요.”
루빈은 어어 하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완벽하게 프레젠테이션 준비가 된 회의실에 도착했다.
‘프레젠테이션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저….”
“앉읍시다. 지금부터 강운 전자 스마트폰의 운영 체제를 확인해 보시죠.”
“스마트폰?”
“휴대 전화라고 부르기엔 너무 발전해 버렸으니까요.”
휴대 전화와 PDA 기능을 결합했다고 끝이 아니다. 미디어 플레이어 기능이 들어 있고 카메라, 터치 스크린, 웹 브라우저, GPS 내비게이션, 와이파이가 가능한 휴대 전화는 이제 스마트폰이라는 이름으로 대체 될 것이다.
“좋습니다. 그런데 운영 체제를 확인하라는 말은 또 뭡니까?”
운영 체제는 자신들이 팔려고 하는데, 왜 방문한 휴대 전화 제조사의 운영 체제를 확인해야 한단 말인가.
“루빈 씨는 안드로이드라는 휴대 전화 운영 체제를 팔러오지 않았습니까?”
“…아직 우리의 운영 체제 이름은 말한 적도 없습니다만.”
“루빈 씨가 여기저기 회사를 돌아다녔으니 우리 귀에도 들어 왔겠죠.”
“흠흠. 그럴 수도 있겠군요.”
“어쨌든 우리는 당신과 동료들이 함께 개발한 안드로이드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당신들을 포함해 회사 자체를 인수할 생각이거든.’
“……!!”
“조건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 운영 체제부터 설명을 듣고 대화는 그 이후에 해 봅시다. 시작하세요.”
수안의 지시에 회의실 내부가 어둡게 변하며 중앙 발표자만 주목받았다.
“그, 그럼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모바일 소프트웨어 사업부의 채주운 과장입니다.”
딱 봐도 공돌이로 보이는 안경 쓴 직원이 발표를 시작했다. 시작 전에는 그룹 회장과 경영진 때문에 주눅이 들었지만, 발표를 시작하자 자신 앞에 누가 있는지도 잊고 열정적으로 운영 체제를 설명했다. 처음엔 시큰둥했던 앤드 루빈도 채 과장의 발표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발표가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우리 소프트웨어의 강점은 이것입니다.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는 확장성! 경쟁사에도 오픈 소스를 제공할 수 있는 열린 자세! 와우! 우리는 전 세계의 표준이 될 겁니다!”
채주운은 자신의 발표에 스스로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단점도 빼놓을 수 없겠죠. 스마트폰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핵심 인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하지만 오늘부로 그 단점도 사라질 것 같군요. 바로 당신이 여기 왔으니까요. 앤디 루빈.”
“……!!”
갑자기 자신이 호명될 줄은 몰랐던 루빈은 화들짝 놀랐다.
수안은 말없이 채주운 과장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이고 있었다.
‘준비한 대로 완벽했어.’
오늘의 발표는 상당히 오래 준비한 결과물이었다. 채주운은 오늘 자신의 맡은 역할을 충분히 해 줬다.
채주운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루빈 씨. 우린 당신이 필요합니다.”
“…저렇게 대단한 소프트웨어를 이미 만들지 않았습니까? 발표도 인상적이었고요. 상당히 재미있는 친구네요.”
오랜 기간 개발한 모바일 소프트웨어는 앤디 루빈의 눈에 그리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특히 자신을 정확하게 가리키며 말하는 그의 눈빛은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지금은 발표를 끝낸 후폭풍이 몰려와 손발을 벌벌 떨고 있었지만….
“우리도 무료로 공개해 안드로이드를 세계 표준으로 만드는 것을 기본 전제로 깔고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우리와 같군요.”
“비슷하든 같든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이 회사로 온다면 마음대로 바꿔도 좋아요. 안드로이드를 분해해 저 소프트웨어에 이식해도 좋고 저기서 필요한 부분을 떼어 안드로이드의 성능을 높여도 좋습니다.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할 수 있어요.”
“…정말 우리의 안드로이드 소프트웨어와 직원들을 원합니까?”
“그래요.”
“당신은 안드로이드에 관한 내 발표를 듣지도 않았어요. 그런데도 안드로이드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당신들이 만들었다면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죠. 난 안드로이드사와 당신들 전부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무척!”
“너무…. 솔직하지 않습니까?”
나이가 어려도 BE 인베스트먼트의 회장이자 큰 기업의 회장이다. 노회한 사업가들을 많이 상대했을 스티븐 회장이라 덜컥 의심부터 들었다.
“내가 비싸게 부르면 어쩌려고요.”
“가격을 흥정하려고 했다면 내가 관심이 없는 척해야 맞겠죠. 하지만 난 당신과 당신의 직원들까지 전부 원한다고 말했어요. 이런 감정을 숨기기란 정말 쉽지 않아요. 얼른 당신이 원하는 금액을 말해 봐요. 난 많은 양보를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 비싸게 부를 겁니다!”
“하하.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내가 바로 BE 인베스트먼트의 최대 주주이자 대한민국 최고 기업의 회장입니다. 누가 누굴 걱정합니까?”
“…으윽.”
루빈이 막 입을 떼려고 할 때 함께 온 직원들이 루빈의 팔을 붙잡았다.
“루빈! 잠깐 얘기 좀 해.”
“아!”
너무 열을 올렸다 싶었다.
<『재벌가에 끼어들었다』 1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