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소
김현성은 수안의 험악한 말에 목을 움츠렸다.
그래도 물어볼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정말 우리가 안 합니까? 돈이 되는데요?”
“우리가 할 거였으면 내가 왜! 굳이! 우리가 지원하는 신생 벤처 기업체들에 연구를 맡겼겠어? 머리 좋고 말 잘 듣는 회사 직원들에게 맡겼겠지.”
한참 뒤에나 나올 비트코인을 5년이나 앞당겨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직접 코인을 개발하는 주체가 될 생각은 없었다.
가상 화폐가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열변을 토했어도 실제론 나라에서 화폐처럼 사용하지 않는 한 가치가 없다는 김현성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가치도 없는 가상 화폐를 만들고 이를 거래하는 사람들에게 손실을 입힌다면, 그 악감정은 고스란히 가상 화폐를 창조한 강운 그룹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관련이 있건 없건 나중 문제였다.
그렇게 되면 훗날 대선에 도전할 아버지의 정치 인생에 흠집을 남기게 된다. 강운 그룹 지분과 직함을 모두 던졌어도 여전히 강운모는 강운 그룹과 한 몸이다. 강운 그룹이 도덕적인 문제에 직면하면 표심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어야 사람들을 살릴 수 있어.’
아버지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하는 목적. 이는 감염병 사태를 원활히 처리하기 위함이 가장 컸다. 또한 감염병 사태를 막아서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가족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기에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수안의 입에서 가상 화폐를 벤처 기업에 맡겨 놓고 여기서 다시 이 주제를 꺼낸 이유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까 주식 얘길 했잖아. 내가 왜 주식과 가상 화폐를 비교했겠어? 둘의 성격이 정말 비슷하기 때문이야.”
지금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이방효가 나섰다.
“투자입니까? 투자라면 욕먹을 일이 없겠죠.”
“그래. 물론 거래를 해서 이득을 얻어야겠지.”
가상 화폐가 100원 이하로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때도 온다. 그 사이에서 수익을 노린다면 당연히 엄청난 수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만 정답이야.”
“혹시….”
최장호가 뭔가를 알아챈 모양이다.
“증권 거래소? 그러니까 이번 건으로 말을 만들면 가상 화폐 거래소가 되겠군요.”
“정답! 여기서 최 실장이 제일 낫다!”
“오!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기막힌 생각인데요?”
증권 거래소는 정부 행정 기관 산하에 있었기에 개인이 거래소를 만든다고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거래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손해를 보지 않으니까!”
“주식 매매처럼 거래할 때마다 수수료를 조금씩 차감하면….”
가상 화폐의 가치가 아무리 널뛰기해도 결국 거래소는 이득을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증권 거래소도 마찬가지다. 주식이 휴짓조각이 되건 반 토막이 나건 증권 거래소는 손해 볼 일이 없다.
“그리고 아까 지나가는 말로 설명했지만, 개발 중인 가상 화폐는 중앙 서버 방식을 사용하는 은행과 달라.”
아직 가상 화폐의 개념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금융에 빠삭한 이방효와 차진호조차 반쯤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편할 거야. 지금은 중앙 서버 하나만 쓰지만, 나중엔 전 세계의 모든 서버가 동일한 권한을 갖게 돼. 그중에 하나라도 틀어지면 가상 화폐의 소유자가 아닌 거야.”
여전히 이해한 눈치가 아니었다. 사실 수안도 블록 체인과 가상 화폐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매체를 통해서 본 대강의 정보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도 벤처 기업 전문가들에게 가상 화폐의 개념을 이해시키는 데는 문제 없었다. 비전공자에게 가상 화폐의 디테일까지 설명할 수준은 아니라는 뜻이다.
“나도 가상 화폐가 나와 봐야 알 것 같으니까 자세한 설명은 패스하자. 중요한 것은 전 세계에 가상 화폐 서버가 필요하다는 말이야. 곧 전 세계에 거래소가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해. 이걸 우리가 선점한다면?”
“오!”
선점은 항상 돈이 되는 법이다.
“추가로 가상 화폐 거래소를 만든 경험으로 후발 거래소까지 우리가 만든다면?”
“오오!”
후발 주자에게 시장을 빼앗길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새로운 기업은 만들면 그만이니까.
“시장의 파이가 커지고 가상 화폐가 많이 거래될수록 돈은 쌓여만 가겠지. 가격이 올라? 가격이 떨어져? 무슨 상관이야. 우린 거래 수수료만 받아먹으면 되는데. 욕먹을 일도 없지. 주가가 갑자기 폭락한다고 해서 증권 거래소를 욕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
“…….”
“…….”
“미래에 가상 화폐 시장을 지배하는 주인공은 바로 우리야.”
수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사업성은 충분히 알아들었기에 다들 기대하는 눈초리였다.
“난 우리가 개인적으로 거래소를 설립하고 지분을 나눴으면 해. 아! 물론 지시가 아니라 제안이야. 빠지고 싶으면 빠져도 좋아. 솔직히 난 최 실장이 맡은 회사가 없어서 최 실장이 시작했으면 했거든. 다른 사람들은 지분 참여 정도로만 생각했으면 했고….”
본래 최 실장에게 가상 화폐 거래소 법인을 넘겨주고 싶었다. 시작은 미약해도 나중엔 하루에 수백, 수천억의 수익을 내는 공룡으로 자라날 가상 화폐 거래소였다.
“투자하지 말라시면 빠지겠지만, 그냥 빠지긴 좀 아쉽습니다.”
“맞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어 보니 당장은 아니더라도 향후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큰 사업입니다.”
“하여튼 이 사장하고 차 사장이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아.”
“하하….”
“감사합니다.”
투자 회사를 경영하는 둘에겐 칭찬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그래도 가장 먼저 거래소 의견을 낸 사람이 최 실장이야. 최 실장은 내 지분을 추가로 받아. 여섯 중에 두 명분의 지분이니 우수리 떼고 33% 지분은 최 실장 몫이야.”
“회, 회장님. 잠시만….”
“지금은 그냥 입 다물고 듣기만 해.”
“아….”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강경한 태도였다.
“그리고 나머지 네 명은 각각 16%로 결정한다. 그럼 우수리로 뗀 3%가 남아. 이것도 최 실장 몫으로 넘긴다. 그럼 최 실장이 36% 나머지가 64%. 합이 100%.”
“…끄응.”
자꾸만 자신의 지분이 커지고 있었다.
“최 실장은 우리 중에 유일하게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야. 최 실장이 가상 화폐 거래소를 맡으면 괜한 오해는 피할 수 있어. 회사를 설립하는 시점엔 강운 그룹과 연이 없는 것처럼 적을 옮겨야 할 거야.”
“아.”
“역시 이유가 있으셨군요.”
“하, 하지만 회장님 지분은….”
“내가 지분 얻어서 어디 쓰겠어? 지금 있는 돈도 다 못 쓰고 죽을 텐데.”
수안은 여전히 불편해 보이는 최장호의 어깨를 툭 쳤다.
“최 실장은 괜히 미안한 얼굴 하지 말고 당당하게 허리 펴.”
“…예.”
수안에게 최장호는 뭘 해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다. 수안이 중요하게 생각해 왔던 일의 대부분을 대신 맡아서 처리하고 고생해 온 사람이라 뭘 해 줘도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사람 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어?’
좋은 일을 하면 죽어서 복을 받는다고 하지만, 수안은 당장 그 복을 주고 싶었다.
“오늘 내 제안은 여기서 끝. 아직 가상 화폐 나오려면 좀 더 있어야 해. 벤처 회사에서 개발이 좀 늦더라고.”
본래 일본인 학자가 5년 후에나 개발하려던 비트코인은 국내 벤처 기업에 의해 개발되고 있었다. 그 외의 알트 코인(비트코인 외의 가상 화폐)도 국내 벤처 기업에 의해 개발될 예정이었다.
시간은 많다.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다.
하지만 수안을 제외한 나머지는 아니었다. 벌써부터 가상 화폐 거래소에 관해 대화하며 일을 진행시키려고 했다.
“전 세계에 거래소 지점을 만들어야겠어요. 홈페이지 도메인도 관련 이름으로 미리 등록해 놓으면 선점당할 염려가 없죠. 요즘 도메인을 선점하려는 자들이 있다지 않습니까.”
“증권사 시스템을 활용하면 가상 화폐 트레이딩에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강운 증권과 BE 인베스트먼트에서 전문가를 투입하면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보안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잘못하면 해킹으로 가상 화폐를 다 날릴 수도 있잖습니까.”
“그건 더블 스타 산하 컴퓨터 백신 전문 회사인 안랩에 맡기면 되겠습니다.”
“실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면 가상 화폐의 가치 상승에도 도움이 되겠죠. 실제 현금과 동일하다는 생각을 할 테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본사는 조세 피난처에 만드는 편이….”
탕탕.
수안은 회의실 책상을 내려치며 모두의 입을 막았다.
“아직 멀었다니까. 그런 고민은 가상 화폐 개발이 성공하고 나서나 하고 지금은 밥이나 먹자. 가서 오늘 저녁 준비 얼른 해 달라고 해. 아니면 주방장 손가락을 씹어 먹을지도 몰라.”
“옙!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최장호가 바람처럼 회의실 밖으로 내달렸다.
“으이그. 부끄럽다고 저렇게 내빼네.”
“회장님의 사랑이 너무 뜨거워서 그렇겠죠.”
“다들 기억해. 내가 정해진 보상 이상으로 챙겨 주는 사람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야. 항상 해 준 것보다 더 많이 돌려받으니까 나도 더 챙겨 주지 않을 수 없잖아.”
해 준 것보다 더 많이 돌려받았다는 수안의 말에 이방효는 문득 의문이 생겼다. 다른 사람들은 회사의 성장과 높은 투자 이익이라는 실적으로 증명했지만, 최장호 경호실장의 경우 어떤 실적이 있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저희는 그렇다 치는데, 최 실장은 그동안 무슨 일을 한 겁니까?”
“그건….”
미안하지만 모두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사람까지 죽여가며 한 일이라 공유할 수 없었다.
말문이 막힌 수안을 배영성이 변호하고 나섰다.
“어허! 이 사장. 회장님이 말씀을 안 하시면 그냥 그런 줄 알아야지.”
“아. 예. 죄송합니다.”
배영성의 잔소리는 끝이 아니었다.
“회장님이 곁에서 비위를 맞춰 주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런 호의를 보이실 분이 아니잖아.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만 알아 둬야지.”
“…부회장님은 아시는 모양이죠?”
배영성은 수안과 잠시 눈을 맞추고 동의를 구했다. 안다고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끄덕.
수안의 허락에 배영성은 최소한의 사실만 말했다.
“나도 조금은 알아. 하지만 모두에게 할 얘긴 아니야.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일이니까.”
“…….”
“…….”
“…….”
이방효, 차진호, 김현성은 회장에게 자신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다.
“이것도 자네들 아끼는 마음에 말씀을 안 하시는 거야. 그러니 괜히 나만 빼고 따돌린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회장님의 믿음은 변함없으셔.”
“옆에 있는데 왜 내 마음까지 대변하고 있어?”
수안이 배영성을 옆으로 살짝 밀치고 셋 앞에 섰다.
“…내가 마냥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야.”
분란을 일으키기보다 자신이 못된 놈이 되면 설명될 일이다.
“이런 자리에 있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어. 항상 정상적으로 대응하기도 무리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에도 강운 그룹의 부회장이었고 지금은 회장이 되어 이끌어 가고 있었다. 잡스러운 일도 많을 것이고, 불미스러운 일도 종종 생길 것이다. 불과 몇 년 전에 살인 청부 업자의 위협을 받았던 수안이다.
“최 실장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내 손발이 되어 주는 사람이라 난 뭐든 더 챙겨 주고 싶어. 그렇다고 내밀한 일까지 자네들에게 공개해서 불편해지고 싶지 않아. 혹시나 최 실장 힘으로 안 되는 더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자네들에게 부탁할게. 그때 내 부탁 거절하면 나 운다? 바닥에 드러누워 손발 휘저으면서 펑펑 울 거야.”
“푸흐.”
“아이고. 회장님.”
“하하하.”
농담으로 끝맺음한 수안의 말 때문에 다들 웃음이 터져 버렸다.
“괜히 누가 더 회장과 가까운 측근이었네, 난 머슴이었네, 따질 필요 없어. 나한테는 다 남이야.”
차가운 말이었지만, 얼굴을 굳히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