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진짜야!
“이번엔 진짜라니까.”
“에이. 작년에도 그러셨잖아요.”
지금 수안은 장호를 앞에 두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작년에 번호 세 개는 맞았잖아.”
“그야. 그렇죠.”
바로 로또에 관한 대화였다. 삶의 기회가 다시 주어질 거라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면 무작정 로또 번호를 외웠겠지만,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나마 외우기 쉬웠던 당첨 번호 중에서 기억하는 번호가 하나 있었고 그 시기가 바로 이번 회차였다.
작년의 일은 400억대 당첨금이 나왔던 때를 말함이었다. 수안은 후반부 번호가 많이 나왔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 정확한 번호를 기억하지 못했고, 번호를 세 개밖에 맞출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달에도 이번엔 확실하다고 하셨었죠. 또 틀리셨고요….”
저번 달과 이번 달이 헷갈려서 생긴 문제였다. 당첨금까지 비슷해서 지난 회차에 나올 줄로 착각했었다. 그래서 수안이 양치기 소년이 되어 있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확실하게 기억하겠어. 하지만 이번엔 진짜라니까 내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번호는 원래 이거 하나밖에 없었어.”
“…죄송하지만, 다시 봐도 번호가 참…. 믿음직스럽지 않네요.”
수안이 적어준 번호는 1, 2, 3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저번에도 미심쩍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불러 준 번호를 샀지만, 제대로 낙첨이었다.
“번호가 이래서 당첨자가 딱 한 명 밖에 안 나왔어. 이번에 2장을 사면 결국 본래 당첨자와 셋이서 나눠 먹겠지만, 그 당첨자도 적당한 금액을 손에 쥐겠지. 우리 쪽에서 너무 많이 사면 그 사람은 무슨 죄야?”
“흐음…. 우선 알겠습니다. 그럼 회장님이 나중에 쓰시도록 잘 보관하겠습니다.”
장호는 수안이 자꾸 로또를 사라는 이유가 비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엉? 그걸 내가 왜 써?”
“네? 그럼 누가 씁니까?”
“최 실장 주려고 내가 머리가 아프도록 외웠다니깐?”
“저를요?”
“그동안 최 실장이 밖으로 나도느라 고생 많았잖아. 그 보상이라고 생각해 줘. 한 장은 두 아들 키우느라 고생하고 있는 아내에게 가져다주고.”
“…….”
그동안 대한민국의 사건 사고를 막으러 뛰어다닌 장호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었던 수안이 고민한 결과였다. 로또 당첨금을 안겨 준다면 작은(?) 선물이 되지 않겠는가.
“…우선 당첨이나 되면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이번엔 진짜라니까!!”
1, 2, 3, 그리고 4는 4이되 1이 붙은 14가 네 번째 번호였다.
다음 숫자는 3과 4가 더해진 7이며 2가 붙어 있는 27번이다.
마지막은 사(4)랑하는 이(2)들에게 주고 싶은 42번.
수안이 제시한 번호는 1, 2, 3, 14, 27, 42. 여섯 개의 번호였다.
예전 이 당첨 번호를 보면서 참 외우기 쉽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쓸 일이 생긴다.
“다시 얘기하지만, 1등 번호는 딱 2개만 사고 더 사지 마. 대신 2등은 더 사도 좋겠다. 보너스 번호로 바꿔서 8개 정도 더 사도 좋아. 보너스 번호는 39. 최대 살 수 있는 로또는 1등 2게임에 2등 8게임. 알았지?”
그 와중에 본래의 당첨자까지 생각해 많은 게임을 사지 못하게 하는 수안이다.
“…뭐 얼마 드는 것도 아니니 제가 손해 볼 것은 별로 없죠.”
“회장이 하는 말 좀 믿어보자. 최 실장.”
“회장님이 헛다리 짚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흐흐.”
“최 실장 두고 봐. 내가 허튼소리 하는 사람이 아니야.”
“푸흐흐. 되면 저야 좋죠.”
“진짜라니까!”
* * *
장호는 가벼운 마음으로 번호를 마킹하고 나머지는 2등 번호로 채웠다. 두 번째 용지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산 로또는 모두 2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 게임당 2천 원이던 시절이었다.
“어제 추첨이던가?”
금요일에 산 로또는 토요일 밤에 추첨을 끝냈다. 이미 두 번의 실패로 기대감이 희석된 장호는 나른한 눈으로 로또 번호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1, 2, 3…. 어, 어라?”
인터넷에서 검색한 82회 차 로또 번호 앞부분 세 개가 완벽하게 일치했다. 절대로 나오지 않을 번호라 생각했지만, 진짜 1, 2, 3이 나왔다.
“자, 잠깐.”
장호는 엊그제 산 로또 용지를 지갑에서 꺼냈다.
“후우. 후우. 후우.”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번호를 맞춰보기 시작했다.
“1번 맞고 2번 맞고 3번도 오케이….”
1, 2, 3은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번호였다.
“14. 이것도 오케이….”
네 번째 번호도 맞았다.
“27번. 허윽.”
다섯 번째 번호도 완벽하게 맞았다.
“42!! 와악!!”
마지막 여섯 번째 번호도 일치했다. 1등. 로또 1등이다.
“…헐. 청심환을 먹었어야 하는데….”
장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보너스 번호도 확인했다.
“보너스 39…. 이것도 맞았어.”
회장님이 기억했다던 로또 번호가 이번 회차가 확실했다는 말이다.
“저, 전부 얼마지?”
1등 당첨금이 48억 5천만 원이었고 2게임을 샀으니 97억이었다.
2등 당첨금이 8천 6백만 원이었고 2개의 로또 용지에 4게임씩 있으니 6억 9천이었다.
“104억. 억! 억!”
* * *
“일찍도 전화한다. 이제 맞춰 본 거야?”
-죄송합니다. 회장님.
“큭. 이제야 내 면이 사네. 월요일엔 출근할 필요 없어. 와이프랑 손잡고 당첨금 찾으러 가.”
-…정말로 제게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배 부회장은 이미 받을 거 다 받았어. 최 실장이 일하는 만큼 못 받았으니 이번에 주는 거야.”
-지금까지 받은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회장님.
수안에게 아파트와 3억 원의 무기명 채권을 받았었고, 이후에도 맡긴 일을 처리할 때마다 수고비 조로 돈을 받아 왔다.
“지금까지 준 건 활동비잖아. 업무 외로 하는 일이고 외부에 알릴 수 없는 일이니, 추가 활동비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지. 그러니 이번 건은 그간의 고생을 보답하는 의미야.”
-회장님….
“그렇다고 앞으로 일없는 거 아니야. 사람 구하는 데 기한이 어디 있어?”
-저도 보람 있었습니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보상을 왜 회장님이 하십니까. 구함을 받은 당사자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장호가 한 일은 상당했다.
2001년만 해도 많은 일이 있었다. 인간극장이 방영된 후 유명인이 된 영자의 집 근처에 잠복해 있다가 영자의 아버지를 살해하려던 범죄자를 잡을 수 있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교도소에서 보냈던 녀석은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야 했다. 여고생이 살해당한 후 미제로 남았을 사건도 제때 잠복한 장호가 여고생을 구하고 범죄자의 마수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또한 어린이 토막 살해 사건을 막아냈고, 아이를 구할 수 있었다. 살인은 미수에 그쳤지만, 납치 혐의 입증에 어려움은 없었다. 범인은 막 출소했던 상태라 가중 처벌이 가능했다.
모두 한 해에 일어난 일이었고, 다음 해엔 더했다.
2002년에는 초등학생 실종 사건을 사전에 막았고, 미선이 효순이는 미군 장갑차에 깔리기 전에 끼어든 차량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2003년엔 다른 무엇보다 대구 지하철 참사를 막아낸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장호를 포함해 몇몇 경호실 직원들이 칸마다 탑승해 있었다. 모두 전용 소화기를 끌고 다니고 있었기에 화재가 커지기 전에 불길을 진압할 수 있었다.
“그걸 누가 보답해? 내가 시킨 일이니 내가 끝까지 책임져야지.”
대구 지하철 사고만 해도 그렇다. 참사로 번지지 않아 정신병자나 다름없는 개인만 처벌받고 지역의 작은 사건 사고로 마무리되었다. 자신이 해당 사고로 죽을 운명이었다는걸 누가 알 수 있을까. 보답은 할 생각도 못 할 것이다. 어린이 실종의 경우 괜히 보호자에게 의심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장호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강운 그룹 명함으로 위기를 벗어나곤 했다.
-회장님 덕분에 경호실 직원들은 경찰서에서 주는 상 한 번씩은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막아낸 사건 사고가 수도 없이 많다. 지역 경찰이나 형사들과도 얼굴을 익힐 정도로 자주 경찰서에 드나들었던 경호실 직원들이다. 작년 있었던 유영철 살인사건에서도 경호실 직원들의 노고 덕분에 연쇄살인이 아니라 단 1건의 살인사건으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러니 경찰이 주는 표창장과 포상이 많을 수밖에.
“그거라도 받았으니 다행이네.”
-이번 과실 치사 건을 잘 막아주셔서 감사할 뿐이죠.
유영철은 교도소로 돌아가지 못했다.
범죄 현장에서 이를 막으려는 선량한 시민(?)들과의 몸싸움 끝에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사망했다. 대한민국 법은 기이하게도 정당방위를 잘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강운 그룹 법무팀은 경호실 직원들이 정당한 방어행위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죽을 놈은 죽어야지.”
단 1건의 살인은 바로 유영철 본인의 죽음을 말함이다. 그가 둔기로 살해하려던 노부부는 살아남았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당했을 많은 이들이 미래를 보장받았다. 이제 수안은 머뭇거리지 않는다.
-연쇄 살인범은 숨 쉬는 공기도 아깝습니다.
그런 수안의 지시를 수행하는 사람은 최장호였다. 수안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장호였다. 수안이 연쇄 살인범이라면 연쇄 살인범이다. 죽이라면 죽이고 살리라면 살린다. 유영철은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했고, 장호는 사건 현장에서 녀석의 목을 비틀어 버렸다.
“최 실장 덕분에 내가 마음 놓고 경영만 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주는 보상은 거절하지 말고 받아 둬.”
-…예. 회장님.
“경호실 직원들하고 자주 회식도 해. 법인 카드 좀 쓰라니까 왜 그렇게 아껴?”
-저 돈 많습니다.
로또가 아니어도 지금까지 수안이 주식 정보를 전해 주며 자산을 불려왔다. 특히 닷컴 버블에서 백배 이상 오른 IT주 덕분에 이번에 받은 로또와 비슷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던 장호다. 실장급이라 법인 카드를 받았지만, 법인 카드를 쓰지 않고 자신의 돈으로 회식비를 내곤 했다.
“지금 내 앞에서 돈 자랑 하니?”
-저 이제 로또 당첨된 사람입니다.
“내가 지금 최 실장하고 통화하는 사이에 자산이 수십억은 늘었거든?”
-수십억이 아니라 수백억이겠죠.
숨만 쉬어도 돈이 불어나는 중이다.
“잘 아네.”
-그래도 제가 사는 세상에선 충분히 부자라고 해도 됩니다.
“우리가 어디 딴 세상에서 살아?”
-흐흐.
“동해 별장으로 가게 배 부회장하고 시간 잡아 봐. 우리끼리만 만난 지가 언제야 대체?”
-진짜 반가운 소식이네요. 하하하.
유부남들에겐 합법적인 외박의 기회였다. 회장이 부른다는데 안 갈 수 없지 않겠는가.
수안도 가끔 집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었다.
“나도 겸사겸사 좀 쉬자. 흐흐.”
-외부 일정 없이 놀고먹는 시간표로 짜보겠습니다.
“집에는 우리 워크숍 간다고 하는 거다. 알았지?”
-저희야 그렇게 얘기한다지만, 회장님은 이실직고하시죠?
“…그래야겠지?”
그룹 회장이 무슨 워크숍이란 말인가. 통하지도 않을 변명이라면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좋다.
-사모님이 이해 못 하실 분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 셋째 임신했거든.”
-아…. 어렵겠는데요.
이해 못 할 수도 있었다. 장호는 방법을 찾다가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진짜 워크숍을 하시죠. 회사 중역들과 같이 가시면 됩니다.
“사장단은 못 불러. 그 사람들이 좀 바빠?”
-다 부를 필요 있습니까? 이방효 사장과 차진호 사장만 부르시면 됩니다. 예전처럼 낚시도 하고 소주에 회 한 점씩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무게감 있는 분들이 오시니 사모님도 어쩔 수 없으시겠죠.
“오오. 역시 최 실장은 잔머리가….”
-임기응변이 뛰어나다고 해 주시죠.
“임기응변이 뛰어나군.”
-크흐. 어쨌든 배영성 부회장과 일정 잡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케이. 부탁해. 최 실장.”
-감사합니다. 회장님.
“앞으로도 잘해 보자. 최 실장.”
배영성과 함께 수안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다.
-쫓아내지만 않으시면 죽을 때까지 따르겠습니다.
“그래. 같이 가자. 사직서를 내도 내가 반려할 거야!”
-생각해 보니 그건 좀 별로네요. 나이 들면 편하게 살아야 하는 법인데….
“야!”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