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회로 (233/304)

국회로

“당신 정말 괜찮겠어?”

“그럼요. 나 쌩쌩해요. 드라마도 마지막 촬영이 끝나서 홀가분하고요.”

아현은 얼마 전 드라마 [수라간 장금이]의 마지막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셋째를 임신한 사실을 안지 불과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 정원이와 나현이에게 또 동생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시아버지의 선거 유세에 지원하기로 했다.

“운동 삼아 나선다고 미리 말씀드렸으니까 나 말리지 말아요.”

“아버지는 좋아하시겠네.”

“이제야 시간이 나서 아버님 뵐 면목이 없어요. 빨리 가요.”

“우리 안 가도 아버지 인기는 장난 아닌데….”

“안 가면 얼마나 서운하실지 모른다고요.”

우리당 대표가 아버지를 비례 대표로 모시겠다고 했지만, 기어코 서울 지역에서 출마를 선택했다. 아버지는 사전 선호도 조사에서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었다.

강운 그룹 총수가 정치판에 등장한 것만으로 관심이 쏠리는데, 정치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낮은 자세를 취했으니 얼마나 더 대단한 관심을 받고 있겠는가.

연예인보다 보기 힘든 사람이 대기업 총수였다. 아버지가 시민들 앞에서 자신을 선택해 달라고 유세를 시작하면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여기에 수안과 아현의 찬조 연설이 더해지면 평소의 경찰 병력으론 무리였다.

“회장님. 지시하신 경찰 병력을 신청해 놨습니다. 버스 차량 한 대가 더 온다고 합니다.”

“그럼 출발하지.”

“예.”

예상대로 아버지가 유세하기로 한 공원 근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차도까지 사람들이 밀려와서 차량 정체까지 빚어지고 있었다.

“…걸어가야 하나?”

“저희가 길을 트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강운 그룹 비서진 수십이 길을 만들면 편하게 유세장 앞까지 갈 수 있겠으나, 미리 자리 잡은 사람들을 밀쳐 가며 길을 만들면 무슨 소리를 듣겠는가.

“사람들 막 밀치면 큰일이야. 괜히 이런 일로 구설수 만들지 말자. 인원은 최소한으로 줄여.”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회장님과 사모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굴 가리고 가면 되잖아. 차는 유세장 뒤쪽으로 가져다 놔.”

“최 실장님께 여쭤보겠습니다.”

비서는 얼른 밖으로 나가 뒤에서 따라오던 최장호의 차로 갔다. 최장호는 비서실과 경호실로 나뉜 의전팀에서 경호실을 온전히 맡고 있었다.

“에헤이.”

“혹시 몰라서 그러잖아요. 이해해 줘요.”

“나도 알긴 아는데 이러다가 늦겠다 싶어서 그러지.”

철컥.

최장호가 문을 열고 들어와 앞 좌석에 앉았다.

“회장님. 저와 경호실 인원 셋이 맡겠습니다. 대신 회장님 뒤로 직원들이 따를 겁니다.”

“결국은 다 따라온다는 얘기네?”

“부탁드립니다.”

“알았어. 알았어.”

꽉 막힌 도로라 차를 멈춰도 상관없었다. 수안이 문을 열자 문밖에서 대기하던 경호실 직원들이 밀착 경호를 시작했고 사람들은 수안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깔리기 전에 네놈들에게 깔리겠다.”

몇 년 수안의 경호를 맡아온 직원들이라 이런 말에도 동요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뒤를 슬쩍 돌아보니 아현이 장호의 경호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다. 수안이 따로 말하지 않아도 누구를 더 챙겨야 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안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 경호실 직원들이 앞 사람을 좀 세게 밀친 모양이다.

“거! 좀 밀지 맙시다. 여기 사람 많은 거 안 보이나….”

“죄송합니다. 제가 저기 앞까지 가야 해서요.”

수안이 경호원들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말하자 화를 내던 사람도 금방 얼굴을 풀었다.

“아…. 이리로.”

“감사합니다. 어르신.”

“허허. 오늘 오길 잘했네.”

강운 그룹을 이끌었던 거인을 보러 왔는데, 현재 강운 그룹의 총수인 수안의 얼굴까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나치는 줄 알았던 수안이 말을 보탰다.

“뒤에 아내가 오니까 부탁 좀 드립니다.”

“자, 장금이?”

예진 아씨에서 장금이로 이름을 바꾼 아내였다.

“길을 비켜라. 거기 길 터!!”

아군은 순식간에 숫자를 불리기 시작했다. 아현의 얼굴을 확인한 시민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켜 줬고, 아버지가 계신 유세 차량까지 대로가 열렸다.

“…….”

“사모님이 앞에 가시는 편이 좋았겠습니다.”

“그러게….”

사람들이 터준 길로 편하게 유세 차량에 다가간 수안과 아현은 유세 차량 뒤에서 아버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왔어?”

“예.”

노란색 점퍼에 기호 3번과 강운모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평생 저런 촌스러운 옷을 입어 보지 않았던 분이지만, 오늘은 상당히 잘 어울린다.

“아버님 저희는 뭐 할까요?”

아현은 의욕에 넘쳐서 물어봤지만, 아버지는 손사래만 쳤다.

“하하하. 그냥 뒤에 서 있기만 해.”

수안과 아현이 병풍처럼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도 저희가 한마디는 해야죠.”

“…그걸 하지 말라는 말이야.”

영등포구 갑에서 국회의원이 되겠다며 유세를 벌이는데, 현 강운 그룹 회장이 나와서 찬조 연설을 한다? 무슨 말을 하건 상대 당에서 물고 늘어질 수 있었고 언론에서도 시끄럽게 만들 여지가 있었다.

“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야. 괜히 언론에 논란거리 만들어 주지 마.”

“…그럼 얼굴만 보여 줘요?”

“그걸로 충분해. 탄핵 정국으로 우리당이 유리한 데다가, 네 말대로 우리당 의장 놈의 입단속도 제대로 시켜놨어.”

.

.

.

수안은 우리당 의장의 주둥이를 열지 못하게 만들라고 아버지에게 조언했었다. 그리고 실제 강운모는 우리당 의장과 독대해 각별하게 경고를 남겼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남성이나 여성,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 구분 없이 모두 다 한 표의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개혁을 논하고 실제 개혁에 성공해도 노년층의 표심은 우릴 향하지 않아요. 새로운 투표 법안을 통해서 투표 상한 나이를 정해야 하는 건 아닌지….”

“정 의장!!”

“예, 예.”

“이번엔 당신이 모르고 한 말이라 여기겠소. 그러니까 내 말을 잘 들어요.”

“…….”

떨떠름한 표정의 정 의장은 끽소리도 못하고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남성과 여성, 청년과 장년, 노년까지…. 우리가 누구는 노리고 누구는 포기해야 합니까? 내가 말한 사람 중에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사람이 있냐는 말입니다!”

“…말이 헛나왔습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포기하면 나라를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우리당이 노년층에 약한 지지율을 갖고 있다지만, 노년층의 투표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돌려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노년층은 투표하지 않아도 좋다는 식으로 헛소리를 하려거든 아무도 들리지 않는 곳에 가서 혼자서 떠드세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잘합시다. 당신 입으로 인해서 우리당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세요.”

예전처럼 노인은 선거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해서 공분을 살 일은 없었을 것이다.

.

.

.

“이번 선거 끝나면 아버지가 의장 하세요.”

“그래도 너무 이르지 않니? 의장도 나름의 인기가 있는 사람이다. 당을 장악하진 못했지만, 탄탄한 지지기반이 있어.”

“4년 후에 누군가는 대선으로 가야 하죠.”

“…….”

“그렇다면 누군가는 등을 떠밀려 단두대로 가겠군요.”

현 의장을 보내서 잘라내 버리라는 뜻이다. 아버지와 뜻이 맞는(강운 그룹과 뜻이 맞는) 의원들이 합심하면 정 의장을 대선에 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큼. 벌써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 없다. 그보다 너희 옷은 제대로 입고 온 거지?”

아들과 며느리의 옷을 살펴보는 강운모였다.

“한 벌에 수천씩 하는 옷 입고 왔으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해.”

“아버님. 이이가 다 챙겼어요.”

수안은 여동생 수진에게 말해서 강운 패션의 SPA 브랜드 옷을 부탁했다. 지금 수안과 아현이 입고 있는 옷 전부를 더해도 50만 원이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것도 네 녀석이 알려 줬었지.”

수안은 아버지가 정치인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기준을 장황하게 설명했었다. 외부에 보이는 옷의 브랜드와 가격도 그중 하나였다.

“버스비, 지하철 요금, 택시 기본료, 자장면 가격도 기억하시죠?”

“매일 확인하니까 걱정 마. 이제 나가자. 너희들 때문인지 사람들이 오늘따라 더 난리다.”

“강운모! 강운모! 강운모!”

영등포구 구민들이 강운모를 연호하고 있었다.

강운모가 양손을 번쩍 들고 앞에 나서자 환호가 더욱 거세졌다.

“와아아아! 강운모! 강운모!!”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제 능숙하게 유권자를 대하는 정치인 한 명이 수안 앞에 서 있었다.

“…한신당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국회를 무력화했습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탄핵하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대통령이 무엇입니까! 바로 국민이 선택한 지도자입니다. 5년에 단 한 번 국민이 가진 고유 권한인 투표권을 활용해 나라 행정의 지도자를 선택했고 우리는 그의 인상적인 활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단 말입니까! 그가 불법 선거 운동을 했다고요? 그럼 지금까지 정당에 소속된 전직 대통령들은 뭡니까? 전직 대통령들이 재임 중이던 과거에는 괜찮았고 지금은 법이 달라지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우아아아~!!!”

“그리고! 대통령이 불법 자금을 수수했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 전직 강운 그룹 총수인 나 강운모가 있습니다. 누가 누구 돈을 받는단 말입니까!! 여러분!!!”

“강운모! 강운모!!”

아현은 시아버지의 열성적인 유세를 들으며 옆에 선 남편에게 말했다.

“정말로 우리는 필요 없으셨겠어요.”

“아버지가 회장직에서 내려오셨다지만, 그 카리스마가 어디 가겠어?”

국회의원 후보의 일정은 바쁘게 흘러갔다.

공원 유세를 시작으로 자리를 옮겨 길거리 유세를 이어 갔고, 시장에 들러 바닥 민심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서도 현 대통령의 탄핵에 불만을 갖고 있는 성난 민심을 확인할 수 있었고, 강운모는 그들의 감정을 보듬어 주면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야휴. 곱다. 고와. 우리 장금이는 언제봐도 예뻐.”

“감사합니다. 어르신.”

아현은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아버지는 수안이 아닌 아현을 옆에 두고 시장 사람들과 악수했다.

“제 며느리입니다. 하하하.”

* * *

시간이 흘러 총선 결과가 나오는 선거 당일.

우리당 당사와 한신당 당사에서 후보로 나왔던 각 당의 의원들이 개표 방송을 지켜보고 있었고, 사람들도 TV 앞에 모여 결과를 확인하고 있었다. 곧 투표 마감 시한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투표 시간이 끝나자마자 개표 방송을 진행하는 방송국에서 출구 조사 결과와 그동안의 여론 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곧 아버님 결과도 나오겠어요.”

“그래. 곧 나오겠지.”

TV를 통해 지켜보던 수안은 언제쯤 영등포 갑의 출구 조사 결과가 나올지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영등포 갑의 자료가 나오기 시작했다.

-영등포 갑! 우리당의 절대적인 존재감을 보이고 계신 강운모 후보님의 출마하신 곳이죠. 예상 득표율은? 결과 나왔습니다. 출구조사에서 77%의 득표로 무난하게 강운모 후보님이 승리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여론 조사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후보들은 나머지 23%의 표를 나눠 가질 것으로 보입니다. 강운모 후보님의 존재감이 우리당의 전체적인 표심을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가히 선거의 왕답습니다.

아버지가 이번에 얻은 별명이다. 선거의 왕.

예전엔 한신당 당의 여성 국회의원이 받았던 별명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거의 여왕. 그 여자는 국회 근처에 와 보지도 못했다. 이현창에게 가장 조심하라고 했던 잠룡(?)이었다. 이현창은 그녀와 그녀 주변을 낱낱이 해부해서 무수히 많은 약점을 잡았다. 그녀가 국회에 발을 디디는 순간 그 약점들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물론 그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자! 아버지가 당선이닷!!”

“어머님. 축하드려요.”

“오호호홋. 국회의원 정도가 뭐 대수라고. 호호호호호.”

말하는 내용과 다른 경박한 웃음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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