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쳐지지 않는 습관
수안은 오랜만에 VIP룸에서 쇼핑을 시작했다. 막 들어온 명품 매장의 신상 의류들이 주르륵 들어왔다가 수안의 손짓에 다시 돌아갔다. 이렇게 돌아간 옷들만 수백 벌이다. 사지도 않을 옷 때문에 직원들만 고생하는 중이었다.
아현은 남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직원들이 나가고 나서 말했다.
“당신이 과하면 막으라면서요. 이러면 오히려 내가 권해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모르겠어. 내가 저걸 왜 사야 해? 내가 입을 것 같지도 않아. 집에 비슷한 옷들 많잖아?”
다 사 버리겠다고 했으면서도 막상 눈앞에서 옷을 보면 구매를 결정할 수 없었다. 단 한 번이라도 입는다면 모르지만, 비슷한 옷들이 집안 옷장에 가득했다. 저 옷이 아니어도 사계절 내내 입을 옷들이 많았다. 쓸모도 없는 옷들을 왜 또 사야 한단 말인가.
“…여보. 지금 입을 옷이 없어서 사러 온 거 아닌데 말이죠?”
“아. 그렇지.”
“오늘 당신은 과소비를 배우러 왔잖아요. 아직도 당신 마음속 구두쇠가 당신을 사로잡고 있어요.”
“이걸 대체 어떻게 해결하지? 쉬운 줄 알았는데, 절대 쉽지 않아.”
여동생들은 맨날 돈이 부족해서 쇼핑을 못 한다고 했었는데, 수안은 지금도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매번 뻔한 가방을 들고 와서 신상이라고 좋아하는데, 도대체 방 안에 넘치는 가방을 왜 또 산단 말인가! 물건은 많이 들어가지도 않고 내구성이 좋지도 않은 기이한 가방이 비싸기는 엄청나게 비쌌다. 수안에겐 질기고 튼튼한 실용적인 물건이 최고였다.
“그럼 옷은 그렇다 치고 다음에 들어오는 물건은 무조건 다 사 버려요.”
“다? 전부다?”
“질러 버려요. 시작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요!”
“그래. 휴. 알았어. 다음 들어오라고 해!”
수안은 마음을 다잡으며 적을 기다렸다. 직원들이 밀고 들어올 항목이 이번에 수안이 상대할 적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부회장님. 이번엔 저희 백화점 매장에 들어와 있는 시계 브랜드들을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기본 모델인 롤렉스를 시작으로….”
수안은 여직원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아내의 말대로 우선 질러 버렸다.
“여기 있는 전부 다 포장.”
“저, 전부요?”
“매니저가 가져온 상품 전부.”
“예, 예. 부회장님.”
가격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오너 일가인 부회장님에게 돈을 입에 올리는 일은 오히려 실례였다. 방금 전부냐고 되물었던 것도 명백히 실수. 더는 실수가 허용되지 않는다.
“다음은 액세서리류가 대기 중입니다. 바로 들어오라고 하겠습니다.”
“그것도 전부 포장.”
“예. 다음은….”
“그것도….”
이번에도 수안이 전부 사기 전에 아현이 나섰다.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여보?”
“응. 왜?”
“이럴 거면 쇼핑은 왜 해요? 최소한 구경은 해야죠.”
“아….”
“쇼핑은 나의 패션 감각을 올려주기도 하고 내 선호를 파악하기에도 좋아요. 어떤 디자인은 내 마음에 쏙 드는데 실제로 입어 보면 전혀 아닌 것들도 있어요. 색감이 맞지 않기도 하고 피부에 닿는 재질이 불편하기도 하죠. 쇼핑을 제대로 즐기려면 당신의 시간이 투자되어야 해요. 직접 보고, 느끼고, 입어 보고 해야죠. 질러 본 건 처음 시계로 충분해요. 시계는 선물해도 되고, 나중에 맞춰서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아현은 아직 자리를 뜨지 못한 직원에게 말했다.
“액세서리는 포장 아니니까 그냥 다시 보여 줘요.”
“예. 사모님.”
“…쇼핑 전문가는 필요 없었네. 예약 취소하라고 해야겠다.”
“쇼핑 전문가도 불렀어요?”
“조만간에 예약 잡겠다고 해서 미리 당신하고 쇼핑하면서 적응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당신이면 충분하겠어. 당신 아니면 누가 나에게 충고를 해?”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방금 눈앞의 전담 매니저만 해도 항상 VIP를 상대하는 베테랑이었는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하긴 내가 어머님과 여기 온 게 몇 번인데….”
“어머니가 쇼핑 자주 데려갔나?”
“당신이 회사로 가면 집에서 뭐 하겠어요. 어머니랑 미술관도 가고 쇼핑도 하면서 지내죠.”
“오오. 나와 다른 삶을 살았네?”
“당신이 이상한 거라고요. 어머니가 당신 얘기 나오면 학을 떼요. 도무지 돈 쓸 줄을 모른다고요.”
“흐흣. 그러니까 오늘 교육 좀 부탁해.”
“맡겨 줘요. 그리고 하루 이틀로 안 되는 건 알죠? 쇼핑도 자주 해야 늘어요.”
“이걸 자주까지 해야 하나?”
짧게 끝내고 싶었지만, 앞으로도 쇼핑이 이어져야 하는 모양이다.
“그럼요. 그래야 보는 눈이 생기고 앞으로 나 없이도 당신이 자연스럽게 쇼핑을 할 수 있어요.”
“에효. 여보.”
“왜요?”
“어차피 난 다 필요 없다고 느껴질 것 같은데, 한 비서라도 부를까? 여기서 가까운 데에 있잖아.”
근처에 강운 무역 사옥이 있었다.
“한 비서라면… 올케언니?”
아직 영수와 결혼하진 않았지만 몇 개월 지나면서 아현도 한정희를 올케로 대우하고 있었다.
“당신보다 세 살 어리지 않나?”
“우리 집에선 올케언니죠. 그래도 집 밖에서는 편하게 대하기로 했어요.”
“결혼 전까지는 한 비서지. 어쨌든 한 비서 부르자. 필요한 거 있으면 사 주게.”
“그것도 나쁘지 않죠. 어차피 교육용 소비니까 올케언니 갖고 싶은 거 다 사 주면 되겠다.”
수안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 * *
“지, 지금이요?”
-백화점까지 얼마 안 멀어. 얼른 나와.
“아직 저는 근무 시간이….”
-수안 씨가 조금 전에 김성우 사장님과 통화했대.
딸깍.
사장실에서 김성우 사장이 얼굴을 내밀고 손을 젓고 있었다. 얼른 가라는 뜻이다. 한정희가 영수와 열애 중이라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다.
“…….”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숙인 한정희는 얼른 퇴근을 준비했다.
* * *
한정희는 VIP룸에 들어가기 직전 콤팩트 거울을 보며 얼굴에 화장 스펀지를 두드렸고, 화장을 다 고친 다음 안으로 쏙 들어갔다. 수안은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그 모습을 보고 뒤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 부회장님. 안녕하세요.”
“한 비서. 오라 가라 해서 미안.”
“갑자기 부르셔서 조금 놀라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정식 땡땡이잖아요.”
회사에서 이렇게 마음대로 외출할 수 있는 것도 특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보다 이번엔 화장품 쪽이니까 올케언니가 잘 봐줘.”
“네, 네? 화장품?”
“오늘 이이가 쇼핑한다고 해서 도와주려고 해. 아! 올케언니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다 골라봐.”
예의상 하는 말도 없었다.
“…진짜 다 고를지도 모르는데요. 괜찮을까요?”
그 말에도 아현은 웃기만 했다.
“그러라고 불렀으니까 빼지 말고 다 고르기.”
“진짜요? 오예!”
한정희와 그간 몇 번 더 만났다. 아현은 수안보다 자주 만난 모양이고 수안도 때때로 얼굴을 익혔기에 예전보다 더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정희도 이젠 부회장 내외를 만나는 일에 큰 부담을 갖지 않고 있었다.
수안은 화장품 종류가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듣기만 했다.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 종류가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 달라는 대로 다 사 주고 있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렇게 얼굴에 많이 바르면 피부가 숨은 쉴 수 있어? 비누로 씻기기는 해?”
“호호호.”
“정말 부회장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
“화장품도 종류마다 다른데 피부에 바르고 오래 지나면 좋지 않기는 해요. 화장을 지우는 화장품이 따로 있고요. 화장을 지우는 전용 비누, 그러니까 클렌징폼도 따로 있잖아요.”
“…그보다 궁금한 거 있어. 한 비서는 얼굴에 쿠션으로 톡톡 바르던데 왜 여기 화장품 중에는 같은 게 없어?”
“아~ 아까 들어오기 전에 보셨어요? 제가 만들었어요. 그러니 없죠.”
“한 비서가?”
수안은 저 화장 쿠션이 한국에서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사용될 제품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는 것도….
‘2007년에나 개발이 될까 말까 한 제품인데….’
한정희는 7년이나 먼저 콤팩트에 화장 쿠션을 사용하고 있었다.
“제가 집에서 직접 스펀지를 잘라서 만들었어요.”
“화장 쿠션을 누가 또 알고 있지?”
이미 외부로 유출되었다면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이렇게 쓰면 화장도 잘 먹고 편해서…. 안 그래도 직장에서 동료들이 만들어 달라고 해서 몇 개 더 만들어 같이 쓰고 있어요.”
“한 비서. 사업 하나 하자.”
“사, 사업이요?”
“형님하고 같이 화장품 회사 하나 만드는 건 어때?”
“회사를요?”
“회사 별거 아니야. 아이템만 좋으면 얼마든지 가능해. 화장품 회사 일으키고, 제조 시설 만들어서 조건만 맞추면 끝. 판매는 걱정할 필요도 없어.”
“…….”
수안의 급발진에 정희는 무슨 소리인가 하고 있었다.
“강운 패션에서 뷰티 편집숍 운용하고 있는 거 알지? 이후엔 영 & 뷰티에서 다 알아서 해. 거기 입점하면 알아서 팔아 줄 테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오빠도 화장품은 몰라요. 회사 세우면 괜히 고생만 하지 않을지….”
“회사에서 남 밑에서 일하는 거랑 직접 회사를 일으키고 경영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지.”
“…….”
“직접 회사를 경영하는 위치에 있어야 놀기도 편해. 윗사람 눈치 보면서 휴가 가려고? 애라도 태어났다 치자. 집에서 애 봐주던 시어머니가 애 아프다고 빨리 오라는데 야근 안 한다는 보장 있을까? 하나부터 열까지 불편한 일투성이일 텐데?”
공감할 만한 말이지만, 그런 이유로 회사를 설립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갑자기 왜 화장품 회사를 말씀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아까 정희 씨가 쓰던 화장 스펀지와 콤팩트를 묶어서 특허 내고 바로 시판하면 어떻게 될까? 내 생각엔 엄청나게 팔린단 말이지.”
하지만 아직 정희의 마음은 사업으로 돌아서지 않았다.
“많이 팔린다고 해도 사업 시작하는 데 돈이 많이 들잖아요. 괜히 돈 빌려서 사업하다가 위기를 겪느니….”
“돈을 왜 빌려? 여보. 정희 씨가 형님 돈을 아직도 모르나?”
“…그러게요. 오빠가 아직도 얘길 안 했나 보네. 조만간 결혼한다면서….”
“그 많은 돈은 언제 쓸 건데? 미리 얘기하고 같이 써야지. 그러려면 사업 아이템이 있을 때 빨리 시작해야 한다니까.”
“자, 잠깐만요. 영수 오빠 돈이요?”
“…….”
“…….”
얘길 꺼내놓고 보니 영수가 직접 얘기하지도 않은 일을 왜 꺼냈나 싶은 둘이다.
“못 들은 걸로 해 주면 안 될까?”
“오빠가 언제 얘기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얼마나 되죠?”
수안은 아현의 얼굴을 본 다음 입을 열었다.
“10억….”
“전엔 3억밖에 없다고 하더니 10억을 숨겨놨네요. 왜? 왜 그랬을까요?”
아현이 또 말을 짧게 한 수안의 대답에 보태며 말했다.
“10억이 아니라 10억 달러라서 그랬겠지….”
“10억이나 10억 달러나 마찬가지… 가 아니라.”
버럭 하려던 정희는 금방 표정을 회복했다. 회복으로 끝이 아니라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10억 달러…. 10억 달러가 얼마였죠? 가, 갑자기 계산이 안 되네요.”
“1조 1천억 원 정도 될 건데?”
“히익!!”
“쉽게 말 못 하지. 형님이 얼마나 고민이 많겠어? 정희 씨도 이해하지?”
“오, 오빠가 왜…. 돈이 왜….”
그만한 돈이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사정은 나중에 들으시고 오늘은 쇼핑이나 합시다. 우리 한 비서 사 주고 싶은 게 많아. 알았지?”
수안은 괜히 입을 나불거렸다는 미안함에 정희의 두 손에 가득 선물을 들려 보냈다. 한꺼번에 다 사 버린 시계도 몇 개를 따로 빼서 정희의 손에 들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