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털어먹기
수안은 배영성, 김현성 사장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우선 간단한 소비를 해 보기로 했다.
“먼저 예술품과 보석, 주류, 시계, 비행기, 골동품 등을 쇼핑해 보시죠.”
김현성 사장의 말을 배영성이 얼른 정정했다.
“김 사장님. 비행기는 제외해야죠.”
이미 전용기를 두 대나 구매하지 않았는가.
“아차. 비행기는 빼겠습니다.”
이후 소비 항목을 정하기 시작했고, 셋은 소비 물품을 두 가지로 분류했다. 하나는 예술품과 골동품을 묶어 경매로 분류했다.
“경매는 지금 실행할 수 없으니 제외하죠.”
경매는 당장 진행하기 어려운 감이 있어서 제외했다. 그리고 남은 항목은 보석과 시계다.
“그럼 전문가를 찾아두겠습니다.”
“굳이?”
“전문가가 설명해 줘야 그래도 알아듣지 않겠습니까? 저희도 그다지 전문적이지 않습니다.”
배영성은 300억을 BE 펀드에 투자하며 1천억 원에 가까운 재산을 갖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재산이라기보다 아내 몰래 모아 둔 비자금이었다.
그렇지만 수안과 마찬가지로 소비가 수익을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김현성 사장의 경우에도 취향이 부동산으로 고정되어 있어 돈을 재투자하는 방향으로 소비 패턴이 정해진 사람이었다. 부호의 소비에 관련한 일에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 전문가가 필요하긴 하겠다.”
“그럼 오늘은 계획을 미리 세워 두도록 하시죠.”
“다음은 뭐지?”
“나중에 클레이 사격도 하실 테니 국내에서 미리 해 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렇지. 뭘 해도 배우고 해야지.”
“호화 요트의 경우 미국으로 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국내에선 좀 어렵겠지.”
“미국의 이방효 사장에게 요트를 임대해 두라고 하겠습니다. 타 보시고 요트를 구매하실지 말지 결정하시면 됩니다.”
“음…. 이건 고민이 좀 필요하겠는데?”
배영성이 김현성 사장을 지원하며 나섰다.
“안 그래도 휴가가 짧다고 하셨으니 가족과 휴가를 겸하면 어떻겠습니까. 현재 회사에 진행 중인 중요한 프로젝트도 없습니다.”
“휴가. 휴가 좋지. 콜.”
수안의 가려운 부분을 제대로 긁어 준 배영성이다. 배영성은 분위기를 이어서 다른 분야를 꺼냈다.
“승마도 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승마?”
“다른 기업을 보면 많이들 배우더군요.”
“사촌 형들만 해도 그렇긴 했지. 그것도 콜.”
그 뒤로 스킨스쿠버를 비롯해 여러 종목의 스포츠가 정해졌다.
“이거 다 하려면 돈이 아니라 시간이 부족하겠다.”
“뭘 해도 돈이 부족할 일은 없습니다. 즐거운 인생을 위해 잠시 투자한다고 생각하시면 좋겠죠.”
“즐거운 인생….”
지금까지 수안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족만이 중요했다. 태어나서 만난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줄줄이 태어난 동생들. 결혼으로 이어진 아현과 아들 정원이와 딸 나현이까지….
가족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었다.
‘가족과 함께라면 다른 건 바랄 것이 없어.’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했다. 다만 세계적인 자산가로서의 위치조정이 조금 필요할 뿐이다.
“잠시간 집중적으로 투자해 선호 분야를 찾는 편이 평생 헤매는 것보다 낫습니다. 회장님.”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
수안도 지난 생을 살며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젊을 때는 뭐가 뭔지 몰랐다. 남들이 좋다는 것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며 살았다. 40이 되어서야 자신이 어떤 취향을 갖는지 파악하기 시작했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알게 되고 취향이 확고하게 변해갔다. 남들 시선에 휘둘리지 않을 자신만의 개똥철학이 생기기 시작하려면 한참의 인생 경험이 필요했었다.
취미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수안은 달리기와 골프 정도만 즐겨 하고 있었지만, 많은 경험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천천히 경험하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찾을지도….
‘나이 먹고 나서 찾으면 무슨 소용이야?’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인생의 즐거움을 찾으면 아쉽지 않겠는가.
젊어서 취향을 파악하면 남은 시간을 충분히 즐기며 살 수 있었다.
이를 위한 짧은 시간 투자는 꼭 필요했다.
“사모님도 요즘 방송을 쉬고 계시니 함께하시죠. 저희와 함께하시는 것보다는 사모님과 함께하시면 지루하지 않으실 겁니다.”
“역시. 배 사장이 날 잘 아네.”
아현과 함께한다면 시간과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 수안이다.
곁에서 김현성 사장이 배영성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이고 있었다. 자신을 빼 줘서 고맙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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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이어지는 일정은 취향을 찾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결혼 전 아현과 못다 한 데이트의 연장이나 다름없었다.
아현과 함께 배우는 모든 것이 색다른 자극이었다.
“당신 말을 상당히 잘 타는데?”
“사극에서 말 타는 신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 조금 배웠죠.”
“오오~ 그랬구나?”
승마는 나름 재미있었지만, 딱히 오랜 취미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수안은 자신이 높은 곳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높이에서 고소공포증을 느껴요?”
고소공포증이 아니었다.
“무섭진 않은데 말에서 떨어져서 다리를 다칠까 걱정되더라고.”
“아. 맞아요. 낙상 사고로 허리나 팔다리를 다치는 일이 많죠. 게다가 당신 다리가 보통 다리인가? 금메달을 몇 개나 딴 다리인데 보물같이 여겨야죠.”
“그럼 승마는 패스.”
스킨스쿠버를 배우기 위한 수영을 배울 때는 정말로 버거워했다.
“으으…. 난 물이 싫어.”
“당신이 물을 싫어하는 줄은 처음 알았네요.”
수안은 아직 수영을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나도 잘 모르겠어. 왠지 물은 겁나더라.”
그래도 발차기부터 시작하는 수영도 꾸준하게 참석하며 배워나갔다. 수영장은 둘 외에 아무도 없었다. 매번 수안과 아현이 수영장에 올 때는 수영장을 비우고 있었다. 성인 둘이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발차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요즘은 이렇게 아무도 없는 게 편해요. 당신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야죠.”
“그래도 아직 나보단 당신을 더 많이 찾지.”
수안보다 인기 배우인 아현을 더 많이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랑 같이 배우기로 한 건 잘한 듯해요.”
“왜?”
“예쁜 수영 강사님이 당신한테 꼬리칠 생각도 못 하게 내가 관리할 수 있잖아요.”
수안은 슬쩍 고개를 돌려 사무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늘씬한 수영 강사를 봤다.
“감히 우리 마누라와 누굴 비교해? 당신 없어도 그럴 일은 없어.”
“훗. 듣기는 좋네요.”
“거짓말 아냐. 아무리 돈 쓸 데가 없어도 남들처럼 여자한테는 안 쓰려고.”
“힛.”
올해 수안의 나이 29. 벌써 두 아이의 아빠지만, 한창 팔팔할 나이였고, 실제로 몸도 건강했다. 단단한 근육으로 포장된 수안의 몸은 언제 봐도 매력적이다. 누구와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현은 재벌가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어머니를 통해 들어왔다. 특히 재벌가에서 툭하면 발생하는 혼외 자식 문제가 걱정스러웠는데 남편의 말을 들어 보니 걱정할 일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당신 걱정되면 우리 수영 건너뛰고 다른 거 배울까?”
“아뇨.”
아현은 가까이 다가온 수영 강사의 예쁜 얼굴과 몸매도 걱정스럽지 않았다. 남편은 예나 지금이나 가족이 최고인 사람이다.
“수영은 안전을 위해서라도 꼭 배워두는 편이 좋겠어요. 스킨스쿠버까지는 좀 생각해 봐요.”
“사모님. 좋은 말씀이세요. 생존을 위해서라도 수영은 꼭 배워 두세요.”
“다음은 자유형이었던가요?”
“네. 음파 호흡법부터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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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현은 새로운 경험을 함께하는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우리 뭐 해요?”
남편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새롭고 재미있었다.
“백화점 털어먹기.”
“네?”
“오늘은 작정하고 지르는 거야.”
“훗. 평소엔 그럼 작정하고 안 샀어요?”
“나도 모르게 필요 없는 걸 왜 사나 싶은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
“저런…. 당신이 왜 그랬을까 궁금하네요? 어려서부터 아껴 살라는 말을 듣지도 않았을 텐데….”
“…그러게.”
생존을 위해 아껴 살았던 정금용의 습관이다. 쉽게 지워지지 않을 꼬리표였다.
“그래서 오늘은 작정하고 막 사보려고. 과소비 체험하는 날이야.”
“호호호. 난 뭘 도와주면 돼요?”
“진짜로 내가 사지 말아야 할 걸 사려고 할 때 막아 주는 역할? 과하다 싶을 때 막는 거지.”
“쉽네요.”
“백화점 털어먹으러 가자!”
“호호호.”
한참 전에 뉴월드 백화점에 얘길 해 놨더니, 수안과 아현은 길게 늘어선 직원들을 볼 수 있었다. 수안과 아현이 내리자 직원들 전원이 허리를 접었다.
““어서 오십시오. 부회장님.””
양쪽으로 늘어선 직원들 끝에 뉴월드 백화점의 김도진 사장까지 나와 있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그리고 사모님.”
“김 사장님. 환영에 감사합니다. 직원들이 괜히 고생이네요.”
직원들 앞이라 말을 돌려 했지만,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이런 짓을 했냐는 질책이었다.
“자발적인 신청자만 나오라고 했습니다. 부회장님과 사모님 얼굴 보고 싶은 사람만 나오라고 했는데 저렇게 많이 나왔습니다.”
“설마….”
“직원들은 이럴 때 아니면 부회장님 얼굴도 못 뵙지 않습니까. 직원 중에 회장님이나 부회장님과 말도 한 번 못 섞어 보고 퇴직할 직원들도 있을 겁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요. 제 얼굴 봐서라도 오늘은 넘어가 주십시오. 부회장님. 허허허.”
수안은 그 말에 아현에게 눈짓하고 뒤로 돌아섰다.
아현은 남편 수안을 뒤따랐다.
“앞으로 자주 올 테니 얼굴 좀 익힙시다. 반갑습니다.”
“인사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회장님. 매니저 염동희입니다.”
수안은 자신을 마중 나온 직원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악수하고 있었다. 자신을 보겠다고 자리해 준 직원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저도 잘 부탁해요.”
“예, 옙! 사모님. 감사합니다.”
아현도 수안의 뒤를 따라 직원들과 인사했다. 직원들은 부회장 수안과 악수하는 것을 황송하게 생각했지만, 수안의 아내인 아현과의 악수를 더욱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보는 눈은 대부분이 비슷했다.
‘아아. 진짜 우아하게 아름답다. 실물이 백배는 더 나은 듯!’
직원들과 인사가 끝나고 김도진 사장이 수안 곁에서 작게 말했다. 작게 말했어도 곁에선 아현의 귀에는 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부회장님.”
“말씀하세요.”
“사모님이 저희 뉴월드 백화점 광고를 맡아 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광고 모델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수안은 왜 자길 보고 말하느냐는 식으로 김도진 사장에게 아현을 손짓했다.
“직접 물어봐요. 내가 하란다고 하는 사람은 아니란 말이지.”
“아! 죄송합니다. 사모님. 제가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부회장님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사모님은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현은 평범한 재벌가 며느리와 달랐다. 수안이 그렇게 만들기도 했고, 아버지 강운모 회장의 뜻이기도 했다.
“처음이니 실수도 이해할 수 있어요.”
아현은 남편의 태도와 김도진 사장의 사과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다음부턴 조심하겠습니다.”
“그래요. 백화점 광고는 좀 생각해 볼게요. 지금 여기 들어오면서 내 광고 사진 몇 개를 봤거든요? 다른 화장품 광고와 의류 광고가 이렇게 많은데 내 광고가 꼭 필요하겠어요? 안 그래도 요즘 이미지 소비가 심해서 광고를 줄이고 있어요.”
합리적인 거절이었다. 그리고 배려도 잊지 않았다.
“대신 다른 백화점 광고는 안 하고 있을게요. 나중에도 생각 안 바뀌거든 더블 엔터로 다시 연락하면 돼요.”
“예. 사모님. 감사합니다. 나중에 사모님 광고가 적어지면 더블 엔터를 통해 정식으로 광고 제안서를 넣겠습니다.”
“그때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오늘은 일보다는 쇼핑이 우선이라…. 안내 부탁해도 되겠죠?”
“예. 사모님. 부회장님과 VIP룸으로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