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댁
“…저는 안 되는 건가요?”
“둘이 좋다는데 우리가 헤어지라 마라 할 생각은 없어요.”
“설마 봉투 같은 거 생각하고 나왔으면 줄 생각은 있지만.”
수안은 재킷 안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 아닙니다. 정말로 아닙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수안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손을 흔든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휴대 전화였다.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장 비서?”
-부회장님. 이후 일정을 위해 곧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랬나? 얘기 다 끝났으니 내려갈게요.”
전화를 끝낸 수안은 아현에게 먼저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당신은 더 있을 거야? 정희 씨가 불편한 것 같은데.”
“아뇨. 저도 가야 해요. 오늘 어머님과 미술관에 가기로 했거든요.”
수안은 조금 더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한 비서.”
“예. 부회장님.”
“우리가 걱정이 많아서 그래요. 오늘 일은 이해해 달라고 하지 않을게요. 우리가 실례를 하긴 했으니까.”
“…아, 아닙니다.”
“그래도 사과는 받아 줘요. 미안합니다. 사과는 형님한테도 할게요.”
“네, 네.”
부회장님께 사과받을 줄은 몰랐다.
“가자 여보.”
“네. 또 봐요. 한정희 씨.”
“부회장님. 사모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정희는 두 사람을 보내고 나서야 크게 숨을 쉴 수 있었다.
털썩.
“하아.”
처음 회사 면접 봤던 날보다 더 떨었다. 두 사람이 정신없이 몰아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너무 선명하게 기억난다.
“꺄윽! 거기서 왜 사랑스럽다는 말이 나오냐고!”
아직 영수에게 하지도 못한 말을 엉뚱한 사람에게 하고 말았다. 자기 전에 이불을 차야 할 흑역사의 추가 생성이다.
“제발 그 말은 전하지 말아주세요. 허응.”
* * *
영수는 오늘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며 문자를 날렸다.
[나 퇴근하려고 하는데, 정희 씨는 언제 나올 수 있어?]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일찍 퇴근했어요. 다음에 봐요.]
[몸이 아파? 어디가? 병원 가 봐야 하지 않나?]
[퇴근하니까 신기하게 괜찮아졌어요. 꾀병인가 봐요.]
[어쩔 수 없지. 그럼….]
영수는 쓰던 문자를 지우고 다시 썼다.
[그래도 보자. 내가 정희 씨 집 근처로 갈게. 잠깐 얼굴만 보여 줘.]
[알았어요.]
오늘도 급하게 퇴근하는 영수 뒤에서 부장과 팀원들이 속닥거렸다.
“방금 문자 하고 부리나케 퇴근했지?”
“아무래도 뭔가 있네요.”
“저 몰래 소개팅이라도 한 모양인데요?”
“박 과장에게 말도 없이?”
“제가 따로 물어보겠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려고 했는데 궁금해서 안 되겠어요.”
“나도 궁금하다. 박 과장이 출근하자마자 확인해 봐.”
“내일은 쉬는 토요일인 거 아시죠?”
“억! 주말 내내 궁금해서 어쩌지?”
“다음 주엔 꼭 파악하겠습니다.”
* * *
“…….”
정희는 집 앞까지 찾아와준 영수가 반가웠지만, 약간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본인이 부회장님과 사모님 앞에서 한 말 때문이다.
‘괜히 그런 소리를 해서는….’
덕분에 영수의 얼굴을 보기도 부끄럽다.
“몸은 괜찮아? 내가 묻기 좀 그런 건가? 여자들 그거 있잖아.”
“아니에욧!”
영수의 엉뚱한 말 덕분에 입이 트였다.
“기운은 넘치는 것 같네. 다행이다.”
또 저렇게 안심한 표정으로 봐주면 저도 모르게 헤실거리며 웃게 된다.
그 모습을 보던 영수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었다.
“정희 씨는 화장 안 한 얼굴도 귀엽네.”
“으앗! 아악!”
메이크업이라는 두꺼운 갑옷을 벗어 두고 나왔다.
‘아무리 반가워도 그렇지! 화장까지 지워놓고 어딜 나오니? 멍청아!’
“정희 씨 어디가?”
정희는 영수가 붙잡기도 전에 얼굴을 가리고 집으로 도망쳐 버렸다.
“…깜찍하네.”
밖에서 정희를 기다리던 영수는 바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어. 아현아.”
-오빠. 어디야?
“퇴근해서 밖이야.”
-잠깐 얘기해도 되겠네?
“뭔데?”
-엄마한테 얘기 들었어. 집에 여자랑 같이 왔다며.
“…….”
어차피 집에 데려갔을 때부터 여동생 귀에 들어갈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럴 땐 당당한 태도로 말해야 잔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
“응. 예전부터 마음에 뒀던 사람인데, 이제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어. 오래 끌 거 없잖아.”
-그래?
아현은 한쪽의 일방적인 마음이 아니라는 말에 조금은 안도했다.
-다행이네. 엄마가 나보고도 한번 만나 보라고 하더라고.
“네가 왜 만나? 이제 겨우 시작하는 단계야. 아현이 넌 오빠 결혼에 참견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오늘 남편이랑 만나고 왔는데?
“야!!”
근처를 지나던 중년인이 깜짝 놀라서 영수를 쳐다봤다.
“아무리 네 남편이 강운 그룹 부회장이라도 그건 아니지.”
-남편이 가자고 한 게 아니라 내가 보고 싶어서 간 거야.
“내가 매제가 준 10억 달러 때문에 참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나 그 돈 없어도 충분히 먹고 살거든? 도로 가져가!”
-왜 그 얘기까지 나와. 그건 이제 오빠 돈이라고.
“그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만난다는데 왜 만나서 분란을 만드냔 말이야! 만나서 좋으면 허락하고 아니면 반대하려고? 내 결혼은 내가 결정해! 부모님도 별말 안 하셨는데 네가 뭐라고 참견이야?”
-안 그래도 사과하려고 전화한 거야. 오빠한테 얘기도 안 하고 만나서….
“됐어! 다시는 그 사람 보러 가지 마. 경고다.”
-에효. 어쨌든 미안해. 정희 씨 괜찮은 여자 같았어.
“당연하지! 내가 생각해도 바르고 성실한 사람이야. 누가 평가해도 마찬가지란 말이야!”
-나중에 봐. 정희 씨에겐 남편이 직접 사과하긴 했는데, 따로 만나서 나도 사과할게.
“끊어.”
영수는 오늘 정희가 왜 일찍 퇴근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늘 정희 씨 마음고생이 심했겠네.’
씁쓸한 표정으로 정희가 들어간 아파트를 올려다보지만, 보일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옆을 중년인이 지나쳐 들어가고 있었다.
* * *
정희는 풀 메이크업과 깔끔한 패션으로 다시 자신감을 얻고 내려가려던 참에 집으로 들어오는 아버지를 마주쳤다.
“아빠. 일찍 왔네?”
“넌 다 늦게 어딜 나가?”
“…….”
안 그래도 영수의 집에 다녀오고 미쳤냐는 소릴 들었는데, 밑에 그 남자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사람 만나러 가?”
“…응.”
그렇다고 콕 집어서 물어보는데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너와 같이 강운 무역에서 일한다고 했었지?”
“응.”
“혹시 강운 그룹 일가와 관련된 사람이니?”
“억! 아빠가 어떻게 알았어?”
“…….”
방금 밑에서 누군가의 통화를 듣고 올라오는 길이다. [강운 그룹 부회장]이라는 단어가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고, 특히 [10억 달러]라는 단어는 아찔한 감정을 선사했다.
“설마 너 돈 때문에 만나는 건 아니지?”
하나뿐인 딸. 부부는 애지중지 딸을 키웠다. 그런 딸이 돈 때문에 미래를 선택한다면 뜯어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돈으로 딸의 미래를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억만금을 준다 해도 딸과 바꿀 수는 없었다.
“아빠! 날 어떻게 보고 그래? 그 사람 돈 없어! 강운 그룹 인척이라도 나랑 똑같이 직장인일 뿐이야.”
“돈이 없어?”
방금 10억 달러를 돌려주느니 마느니 하고 있었다. 돌려준다는 말은 곧 받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10억 달러가 얼마나 많은 돈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대충 계산해도 1조 원. 매년 10억씩 쓴다고 해도 천 년 동안 쓸 수 있는 돈이다.
“부회장님 사모님이 영수 씨 여동생이지만, 부회장님이 직접 회사에서 혜택을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단 말이야. 사돈 관계라 자주 만날 일도 없다고 했어. 영수 씨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영수 씨 부모님도 엄마 아빠처럼 평범한 분들이고.”
회사에선 혜택이 없는데 개인적으로는 준다는 말로 들렸다.
“넌 그 사람 마음에 들어?”
“…응.”
“그럼 됐다.”
대충 통화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영수라는 사람도 생각이 바로 박힌 사람이었고, 강운 그룹 부회장 부부도 자기 딸을 좋게 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은 것은 딸의 마음이었는데, 방금 대답을 들으며 딸이 진심으로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딸이 좋다는데 그거면 됐지.’
“데리고 올라와.”
“…뭐, 뭐?”
딸은 그렇다 치지만, 그 도둑놈은 다시 확인해야 했다. 귓등으로 들은 말로는 진심을 알 수 없었다.
“밑에서 너 기다리고 있잖아. 데리고 올라와 봐.”
“……!!”
“올라오다가 봤어. 네가 언제 내려올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더라.”
“그, 그 사람인 줄 어떻게 알고….”
“척 보면 척이지. 얼른 데려와.”
“데려오면 어쩌려고?”
“애비가 네 남편 어떻게 할까 봐 걱정되냐?”
“남편은 무슨!!”
“술이나 한잔 먹여 보고 속마음 들어 보려고 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데려와.”
“…적당히 마셔. 데리고 올게.”
문제는 한정희도 부친도 영수의 주량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 * *
“오빠가 어제 누구한테 업혀 왔다고?”
-데려온 여자애 아버지한테 업혀서 왔다니까! 그 집에서 술 받아먹고 그 지경이 됐단다. 얘를 어쩌면 좋니. 내가 남사스러워서 정말.
“미쳤어. 왜 거기서 술을 마셔?”
-얘가 강 서방보다 더한 놈이야. 만난 지 며칠 지났다고 여자 집에 쳐들어가냔 말이야. 그러고 와선 아직도 자빠져 자고 있어! 으이그 이 화상아. 일어나!
짝짝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잠든 오빠 옆에서 전화한 모양이다.
“이제 깨우면 뭐 해? 회사 갈 시간은 한참 지났는데.”
-다행히 이번 주 토요일이 격주 휴무라고 어제 그 여자애가 같이 와서 알려 주더라.
“걔는 뭐래? 왜 영수를 집에 데려간 거야?”
아현은 어제 그 순진한 모습도 연기가 아니었나 생각했다. 빨리 결혼하기 위해 뭣도 모르는 오빠를 집으로 꼬여 데려간 것이 틀림없었다.
-영수가 갑자기 집 앞까지 찾아왔는데 여자애 부모님이 보신 모양이야. 인사만 드린다고 들어갔는데…. 소주 몇 잔에 그 모양이 됐단다. 어휴 이 썩을 놈.
또 찰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잠에서 깨면 등이 왜 이렇게 따가운지 궁금할 것이다.
“…답도 없다 증말. 술은 처음부터 못 마신다고 했어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한 비서나 한 비서 집에서 잘못한 것은 없었다.
아현은 어머니와 통화를 마치고 머뭇거리다가 다시 휴대 전화를 들었다.
뚜르르. 뚜르르.
* * *
“여보세요?”
-한정희 씨 전화 맞나요?
“누구….”
-임아현이요. 우리 어제 봤죠?
“헙. 안녕하십니까.”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벌떡 일어나 인사하게 된다.
-어제 오빠가 실례가 많았다고 들었어요.
“아. 네….”
예의상이라도 아니라고 해야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취해 버렸다. 아버지도 고작 소주 두 잔에 그렇게 될 줄은 몰랐기에 많이 놀라셨고,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신 어머니도 깜짝 놀랐다. 물론 정희도 많이 놀란 참이다.
“술이 그렇게 약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술은 안 먹기로 했었는데….
“다행히 제가 댁에 가 봐서 모셔다드릴 수 있었습니다.”
-고마워요. 또 다른 실수는 뭐가 있었죠? 오빠가 술 마시면 기억을 자꾸 못 해서요.
“…취하신 것 외에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정희는 차마 어제 일을 설명할 수 없었다. 영수가 큰 소리로 정희를 부르며 주정을 부린 일과 아버지와 어머니께 갑자기 장인 장모님이라고 부른 일, 아파트 위아래 양옆에서 시끄럽다고 찾아온 일 등….
‘그래도 아빠 덕분에 영수 씨 진심을 알았지….’
처음 정희를 보고 관심이 있었는데, 차마 그동안은 말도 붙이지 못했다고 했다. 취중에 아버지에게 한 말이니 거짓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둘은 서로에게 진심을 전하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에게 고백한 것까지 비슷했다.
“갑자기 집으로 모셔서 죄송합니다. 사모님.”
-아니에요. 거기까지 갑자기 찾아간 오빠 잘못이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우리끼리 편하게 봐요.
“다, 다음이요?”
본사 강 부회장님의 아내이자 연예계를 강타하고 있는 여배우를 어떻게 편하게 본단 말인가.
-사과의 의미로 내가 식사라도 대접할게요.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나 불편하죠?
“…조금.”
-가족이 될 수도 있는데 계속 불편하면 안 되잖아요. 내가 스케줄 여유 있을 때 연락할게요. 알았죠?
“네. 사모님.”
-나중에 만나면 그냥 편하게 불러요. 알았죠?
“…노력해 보겠습니다.”
끊어진 전화를 한참이나 들고 있던 정희는 조심스럽게 휴대 전화를 침대맡에 내려놓고 벌러덩 누워 버렸다.
“이거 영수 씨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부회장님이나 사모님이나 너무 불편해서 숨도 못 쉴 지경이다.
“히힛.”
그래도 사모님이 가족이 될 수도 있다 말한 것과 앞으로 편하게 부르라고 한 부분에서 기분이 좋았다. 제대로 데이트도 못 했는데, 벌써 가족이 된 기분이다.
* * *
“기억나? 안 나?”
도리도리.
영수는 한참 늦은 아침에 일어나 취조당하고 있었다.
“나… 실수 많이 했겠지?”
“그러게 거기까지 가서 왜 술을 마시니?”
“어르신이 주는데 어떻게 안 먹어.”
“네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처음부터 못 먹는다고 확실하게 말 하는 게 술 먹고 주정 부리는 것보다 낫잖아.”
어머니는 한참 잔소리를 쏟아 내고 북엇국을 끓여 놨다며 나가셨다.
“에효. 처가댁에서 점수 왕창 따고 싶었는데….”
거하게 실수를 했을 테니 앞으로 수습할 일이 걱정이다.
“어흑. 등은 또 왜 이렇게 아파? 나 어제 무슨 짓을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