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면
“와아. 당신이 회사에 오니까 회사가 환해지는 느낌이야.”
지금까지 아현이 회사에 방문한 일은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현은 남편의 환대에도 딱딱하게 말했다.
“앉아 봐요. 할 말이 있어서 급하게 왔어요.”
“전화로는 힘든 일이었나 봐?”
“오빠에 관해서 상의할 일이 있어요.”
“형님?”
자리에 앉은 수안이 포도 주스를 입에 가져가자 아현이 말렸다.
“우선 내 얘기부터 듣고요.”
협찬받은 옷에 주스를 뿜었다간 오늘 녹화에 차질이 있을까 걱정한 아현이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걱정되게.”
수안이 잔을 내려놓자 아현은 오빠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제 오빠가 결혼할 사람을 집으로 데려왔다고 하네요.”
“오오! 좋은 일이잖아?”
“어디서 배웠는지 어제 진지하게 만나기로 해 놓고 바로 집으로 데려왔다고 해요.”
“풉!”
“이게 웃을 일이에요? 다 당신 보고 배운 거라고요.”
“크흐흐. 형님이 상 남자였네.”
“후우. 당신이 오빠가 데려온 여자를 확인해 줘요. 왜 오빠에게 관심을 보이고 집까지 따라왔는지 뒷조사가 필요해요. 만약… 돈을 보고 접근했다면,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얼른 떼어 놔야 해요.”
아현이 걱정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오빠의 결혼을 바라는 바이지만,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가족이 생기는 것은 사양이다.
“뭐. 확인이야 어렵지 않지. 이름, 나이, 직장이 있다면 직장도 알려 줘. 정보가 많을수록 조사가 쉬우니까.”
“이름 한정희, 나이는 27살.”
“형님이랑 4살 차이면 딱 맞네. 볼 것도 없어.”
“더 들어 봐욧!”
“넵.”
“지금 일하는 곳은 강운 무역. 정확하게는 사장 비서실 직원이라고 해요.”
“오오. 회사에서 만난 거야? 지나다가 보긴 했을 건데 잘 기억이 안 나네.”
“조사가 어렵진 않겠죠?”
“별거 아니야. 회사 직원이라면 간단하지.”
“조사 끝나면 나랑 같이 보러 가요. 당신은 사람 잘 보잖아요.”
“내가?”
“…당신은 날 알아봤으니까요.”
부끄러운지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하는 말이 수안에겐 상당히 기분 좋게 들렸다.
“푸흐흐. 당신 그 말 너무 사랑스럽게 들리는데?”
“흠흠. 어쨌든 확인 부탁해요. 나는 갈게요.”
“벌써? 같이 점심이라도 먹고 가.”
“녹화 있어요.”
“그럼 저녁은 어때? 괜찮은 식당으로 예약할게.”
“애들은 어쩌고요. 안 그래도 매번 아주머니께 맡기고 나올 때마다 나현이가 눈물 바람인데….”
한참 엄마를 찾을 나이였다. 정원이는 그나마 의젓하게 아쉬움을 표현하지만, 나현이는 울고불고 엄마에게 매달리는 바람에 아현까지 같이 눈물을 흘려야 했다. 녹화 일정으로 이렇게 헤어지는 아침은 아현에게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아차차. 어쩔 수 없겠네.”
“대신 내일 점심 같이해요.”
“오케이. 그전까지 조사 끝내 놓을게.”
* * *
수안은 강운 그룹 비서실을 동원해 한정희의 조사를 지시했고 퇴근 전에 보고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보고서를 들고 온 사람이 최학주 사장이었다.
“어휴. 최 사장님까지 나서실 일은 아닌데요.”
“아닙니다. 사모님 가족에 관련된 일이니 제가 나서야죠.”
수안은 얇은 보고서를 들춰보며 문제가 있는지 살폈다.
“간략하네요?”
“한정희 씨의 부친은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고, 모친은 평범한 가정주부입니다. 조부모도 시골에 생존해 계시고… 조사 결과만 보면 아주 평범한 집입니다. 너무 평범해서 문제지요.”
수안에게 평범한 것은 문제가 아니다. 집안이 잘사는 것보다 사람이 중요했다.
“형제 없이 한정희 씨 혼자네요?”
“외동딸이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는 자기소개가 있습니다. 보고서 뒤쪽에 한정희 씨가 입사할 때 제출한 이력서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장점을 강조하는 이력서엔 그녀의 대학교 학점과 자격증, 그간의 대외 활동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래도 업무 능력은 상당하네요.”
회사에서 평가한 그녀의 평점이 상당히 높다는 점 외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대기업 사장의 비서실 직원이라면 당연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주시면 더 자세한 조사가 가능합니다. 오늘 보고서는 급하게 요청하셔서 표면적인 내용만 파악한 1차 보고서입니다.”
“최 사장님은 개인적으로 어떻게 보세요? 이런 여성이 최 사장님 며느리로 들어온다고 가정했을 때요.”
“음….”
잠시 고민하던 최학주는 자기 생각을 풀어놨다.
“만약 한정희 씨가 강운 그룹과 엮이고 싶은 생각에 머리를 썼다면 이번처럼 일을 진행하진 않았을 겁니다. 어떻게든 먼저 잠자리를 갖고 아이부터 가졌겠죠.”
별의별 일을 다 겪는 재벌가 사람들이다. 실제로 그런 여성이 들러붙어 고생했던 집안도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순수하게 시작한 인연이라면 찬성입니다. 사모님 입장에서도 조건만 좋은 집안 자제는 불편할 테고요. 사람 됨됨이를 파악해야겠지만, 우선은 그렇습니다.”
“순수라…. 강운 무역에서 일하는 직원 중에 형님이 강운가 친인척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요?”
아내 앞에선 호탕하게 말했지만, 수안이야말로 가장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부분은 2차 조사에서 밝혀질 겁니다.”
“2차 조사는 진행하세요. 저는 직접 만나 보고 평가해 보죠.”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조사를 마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최 사장님.”
* * *
다음 날 아현과 점심을 같이한 수안은 강운 무역 근처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여긴 가끔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내주는 곳이야.”
“아~ 외부의 시선을 피해서 만나기 좋겠네요.”
“김 사장이 한정희 씨 데리고 온다고 했어.”
“조사는 아직 안 끝났죠?”
“1차 조사는 완료. 아직까지 깨끗해.”
“흐음.”
“2차 조사는 진행 중이야. 오늘은 대면 평가해 보고 2차 조사 결과를 보면 될 것 같아.”
“알았어요.”
* * *
“한 비서.”
“예. 사장님.”
“같이 외근 나가자. 중요한 손님이 오셔서 같이 가야겠어.”
“네? 예. 알겠습니다.”
한정희는 영문도 모르고 김성우 사장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의외의 장소에 도착했다.
“오피스텔? 사장님!”
“아. 오해는 금물이야. 회사에서 중요한 손님을 모실 때 사용하는 장소거든.”
“아.”
“진짜 오해했어? 내가 그럴 놈인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잖아요. 저 경찰서에 신고할 뻔했어요.”
“푸하하.”
정희는 마음을 풀고 화통하게 웃는 김성우 사장을 따라갔다. 회사 소유라는 오피스텔 안에는 끝판왕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어서 와요.”
“서 있지 말고 앉지?”
‘사모님! 부회장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부회장님.”
“김 사장은 가 보세요. 여기 한 비서는 이대로 퇴근이니까 그렇게 아시고요.”
“예. 부회장님.”
한정희는 사장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싶은 심정이다.
‘사장님! 날 여기 혼자 두고 가시면 어떻게 해요.’
김성우 사장은 빙긋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이고 도망쳐 버렸다.
“아,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난 봤죠?”
강운 무역에 가끔 얼굴을 비췄던 수안이다. 강운 무역에서 못 봤다고 해서 몰라볼 사람도 아니었다.
“예. 부회장님.”
“나도 TV로 봤을 테고….”
불과 얼마 전에 종영한 동의보감 허준이다. 지금도 TV만 틀면 관련한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예. 사모님.”
“우리 얘기 좀 할까요?”
“네에….”
영수와 진지하게 만나기로 하고 불과 사흘이 지났다. 첫날은 영수 씨 집에 가서 인사했고 어제는 바빠서 문자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오늘은 첫 데이트를 하기로 했는데, 이번에도 가족과의 데이트(?)가 먼저였다.
‘그것도 부회장님과 사모님이라니! 평소에 얼굴도 못 본다면서!’
“이렇게 갑자기 일터로 찾아와서 놀랐죠?”
“아, 아닙니다. 사모님.”
“솔직히 우리가 급하게 움직이긴 했지. 형님도 너무 성급하셨고.”
“…네에.”
수안의 말속엔 뼈가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표정은 무표정이다. 정희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엊그제 집에 다녀갔다고 들었어요.”
“네. 사모님.”
“집에서는 뭐라 안 하세요?”
“…….”
당연히 미쳤냐는 소리를 들었다. 당일에 만나 집에 데려가는 미친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한 소리 들었고, 좋다고 따라간 너는 더 미쳤다고 또 한 소리를 들었다.
“조금 놀라긴 하셨지만, 괜찮습니다.”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괜찮을 리가 있나. 결혼 적령기의 아가씨가 남자 집에 먼저 인사를 가면 어쩌라고? 형님도 참. 가려면 여자 쪽에 먼저 찾아갔어야지. 날 보고 배우려면 더 나아져야….”
“여보?”
아현이 조용히 하라는 눈빛을 보내자 수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말할게요. 난 순진한 오빠가 걱정스러워요. 정희 씨가 어떤 사람인 줄도 모르고요.”
“순진이요?”
순진한 건 자신이었다. 영수는 노련한 사냥꾼처럼 자신을 공략해 당일에 집에도 데려가지 않았는가. 어제도 자다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화들짝 놀라 이불을 차고 일어났다.
‘지금까지 내게 눈길도 안 준 사람인데….’
거기다 집에까지 데려갔으면서 오늘에서야 데이트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늦어도 어제는 둘이 만나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어야 맞다.
설령 감정 확인을 나중에 하더라도 데이트 신청은 해야 했다!
‘오늘 데이트도 내가 만나자고 했어요! 나 아니었으면 언제 볼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요!’
크게 소리치고 싶지만, 부회장님과 사모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영수 씨는 충분히 똑똑하고 냉철한 분이세요. 순진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
“…….”
수안과 아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 봤다.
“형님이 냉철하고 똑똑했나?”
“내가 친오빠를 모르겠어요? 몇 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콩깍지….”
“벌써?”
“아니면 말이 안 되잖아. 형님이 능력자였네. 어떻게 사람 마음을 단숨에….”
“조용히 해 봐요.”
아현은 정희를 보고 다시 물었다.
“오빠가 냉철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똑똑하고요?”
“사장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시야도 넓고 업무 능력이 상당하다고요.”
“…….”
“이야. 당신이 모르는 면이 형님께 있었나 봐?”
“어, 어쨌든 그렇다 치고.”
아직 눈앞의 상대에 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기 전에 수안이 말을 잘랐다.
“에헤이. 품위 좀 지킵시다. 여보. 누가 들으면 당신이 시어머니 자리에 있는 줄 알겠네.”
“…알았어요.”
수안이 작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너무 걱정할 거 없어요. 우린 몇 가지만 얘기하려고 왔으니까.”
“네. 부회장님.”
“영수 형님이 여기 제 아내의 오빠 되는 사람이라는 건 아실 테지만, 솔직히 집안에서는 친인척이라는 가족관계로 끝이에요. 앞으로 이권을 준다든가 회사에서 중요한 보직을 준다든가 하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괜찮겠어요?”
“…이미 들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부분은 제가 환영하는 쪽입니다.”
“들었다고요?”
“영수 씨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강 부회장님이 앞으로 혜택을 줄 일이 없다고 못 박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앞으로 회사원으로나 살아야 할 사람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수안은 아현을 보며 눈빛으로만 말했다.
‘느낌 나쁘지 않은데?’
‘아직은….’
“평범한 사람이라도 괜찮다는 뜻이죠?”
“괜히 돈 많은 사람들처럼 문란한 것보다는….”
“…우선 난 문란하지 않다는 것을 밝힙니다.”
“아, 부회장님이 그렇다는 얘긴 아닙니다. 죄, 죄송합니다.”
“어쨌든 평범한 사람이라서 좋다?”
“…처음엔 강운가 친인척이라는 말에 관심이 생긴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래 지켜본 영수 씨는 매력적인 사랑스러운…. 아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여보. 형님이 매력적이래. 게다가 사랑스럽다는데?”
“…놀랍네요.”
얼굴이 붉어진 정희는 두 손을 모으고 떨림을 감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