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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님 (174/304)

형수님

자재 창고 일은 예전부터 불안하게 여겼던 일이다.

당시엔 회사가 부도로 끝장나며 불이 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이번엔 회사가 회생 절차를 통해서 기업 활동을 영위하게 되었으니 위험한 일은 미리 막아둬야 했다.

김 과장은 자재 창고에 자신만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악용했다. 야근 때문에 남게 되면 자재 창고에서 가끔 라면을 끓여 먹으며 반주로 소주를 곁들였다. 수안은 예전에 몇 번이고 그런 모습을 봤었다. 가끔 김 과장에게 그러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김 과장은 더 당당하게 자재 창고에 출입했다. 고졸 생산직 직원이 대졸 관리직 상급자인 과장에게 얼마나 더 얘기할 수 있었겠는가. 제발 자신의 일터가 화마에 휩싸이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대놓고 면박을 줄 수도 있지.’

“김태형 과장 내 앞으로 오세요.”

“예….”

“이거 아무리 봐도 최근에 쓴 것 같은데, 누가 했을까요?”

“…….”

대답하지 않는다고 모르겠는가. 직접 확인한 과거가 있다.

“본인 맞지? 당신 말고 들어올 사람도 없잖아!”

“…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 자재 창고는 오로지 김태형 과장의 아지트였다.

텁.

수안은 김 과장 곁으로 가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동안 스릴 넘치고 재미있었겠네? 야근, 당직 때도 여기 와서 혼자 라면 끓여 먹고, 소주도 한 잔씩 곁들이고 말이야.”

“…….”

“누가 터치할 사람도 없고, 내 세상이잖아. 그렇지?”

“죄, 죄송합니다.”

수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위험한 짓을 했던 안일한 김태형 과장의 태도를 고쳐야 했다.

“저기 봐. 3번 자재 창고에 뭐가 쌓여 있나.”

수안의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는 제품을 포장하기 위한 골판지 박스와 비닐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리고 저거! 저게 있는데 여기서 버너로 라면을 끓여?”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인화성 물질인 톨루엔이 있었다. 벤젠이나 페인트, 코팅제, 접착제 첨가물로 사용하고 일부는 나일론, 플라스틱 음료수병, 폴리우레탄을 제조할 때 사용한다. 만약 저 톨루엔 통이 열려 있었고 유해 가스가 가득한 상태에서 버너에 불을 붙였다면 이 창고는 그대로 폭발이다.

“정신이 있어! 없어!”

“크흡.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나갔습니다.”

그렇다고 김 과장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생산직 직원들과 트러블이 있기도 했지만, 나름 융통성을 갖고 일을 풀어가는 직원이었다.

“그래. 사람은 사과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지. 그런데 사과했다고 알아서 행동이 교정될까?”

“앞으로 절대 자재 창고에서 엉뚱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수안은 김 과장의 말에 답하지 않고 박성호 차장을 불렀다.

“박 차장님.”

“예! 부회장님.”

“잠금장치부터 새로 바꾸세요. 열쇠를 아무나 못 여니까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직원들끼리 업무 공유도 하시고요. 한 사람이 없다고 회사가 멈춰 버리면 되겠습니까? 당장이라도 여기 김 과장이 안 나오면 3번 자재 창고는 누가 열어 줄 겁니까?”

“…지시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김 과장은 자신이 잘렸다고 생각했다.

“아….”

‘안 잘리는 게 이상하지….’

수안은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있는 김태형 과장에게 추가 주문을 했다.

“김 과장은 저거 다 챙겨서 나와. 냄비는 설거지해서 탕비실에 가져다 놓고 라면도 거기다 놔. 거기서 먹으면 박성호 차장이 김 과장을 잡아먹겠어?”

수안이 이렇게 말했으니 앞으로 탕비실에서 라면을 먹는 것은 허용이다. 자재 창고에서만 못 먹게 만들면 되지 않겠나.

김태형 과장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안 잘립니까?”

“잘못한 줄 알면 회사에 갚으세요. 당신 실수 하나로 회사가 날아갈 뻔했으니까.”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그리고 회사에서 술은 너무 하잖아. 술 고프면 여기 박 차장님한테 사 달라고 하시라고. 박 차장이 술 마다하는 사람이야?”

회사에서 라면은 허락해도 술은 허락 못 한다.

“예. 박 차장님이 술 정말 좋아하시죠.”

‘내가 술 좋아하는 걸 부회장님이 왜 아시는 건지….’

수안은 박성호 차장의 의문스러운 얼굴을 봤지만, 의문을 풀어 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 들어갑시다. 박 차장님.”

“…예. 부회장님.”

수안은 운 테크에 몇 년을 일하면서 들어와 보지 못한 사장실에 오늘 처음 들어왔다.

눈에 들어온 것은 소파와 탁자 그리고 사장 전용 책상과 주변을 둘러싼 가구들이다. 하나 같이 비싸 보이는 가구들이었고, 바닥엔 푹신한 양탄자까지 깔아놨다. 창가엔 골프 퍼팅을 연습할 수 있는 초록색 퍼팅 매트도 깔려 있었다.

“소파도 고급이네. 가구도 비싼 가구로 들여놨고. 골프? 아주 가관이네.”

사무실을 이렇게 꾸며놓고 지내면서 직원들 휴게실 신설 품의는 기어코 반대하던 전 사장이다. 직원들이 왜 공장 구석구석에서 담배를 피워 대겠는가. 제대로 된 휴식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휴게실을 만들어 줬다면 애초에 공장 구석구석에 박혀서 담배 태울 일이 없다.

“제, 제가 산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습니다.”

“압니다. 박 사장님이 사장실 쓴 지 얼마나 됐다고요.”

수안은 사장실에 들어와서야 익숙했던 박 차장을 버리고 박 사장으로 호칭했다.

“사장 아니고 차장입니다.”

“임시라도 사장은 사장이잖습니까.”

“아, 아닙니다. 저는 잠시 직원들을 대표할 뿐입니다.”

“다음 사장 올 때 얼른 비워 주려고 그러십니까?”

회사가 자리 잡기까지 3, 4개월만 사장 자리를 임시로 맡기로 했었다.

박 차장은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충분히 지금 위치에 만족하고 있었다.

“예. 괜히 헛바람 들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제 강운 자동차 계열사로 편입되어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박 차장은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했다. 충분히 더 많은 능력을 보일 수 있으면서 안정에만 목을 맨다. 이런 사람은 높은 자리를 줄수록 책임감에 본연의 능력을 드러내는 편이다.

“오는 길에 다른 사장 내려보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2년간 박 사장님 일하시는 성과를 보고 부사장으로 내릴지 사장으로 유임할지 선택하려 합니다. 그동안은 확실히 사장이니 괜히 직원들 헷갈리게 하지 말고 차장 직함은 빨리 떼 버리세요.”

성과가 부족해도 최소한 부사장은 시켜 준다는 뜻이다.

“제가…. 2년 동안 사장이라고요?”

“집에 가서 아내에게 사장 됐다고 자랑하셔도 됩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2년간 사장직은 유지시켜 드릴 생각이니까요. 이후에도 대운 자동차에 납품하는 물건들에 별문제 없으면 계속 이 자리에 계실 겁니다. 물건만 확실하면 본사인 강운 자동차에서 박 사장님 호출할 일도 없을 테고요.”

“…….”

어벙한 표정의 박성호에게 수안이 웃으며 말했다.

“지호랑 유진이가 아빠 사장 됐다고 난리를 치겠지요?”

박성호는 아들, 딸을 한 명씩 낳은 성공한 아빠였다.

“하하하. 정말로 그렇…. 우리 애들 이름도 아십니까?”

“부회장쯤 되면 사장들 신상은 다 외우고 있어야 하거든요. 내가 기억력은 기가 막힌 사람이라.”

가끔 지호와 유진이를 보기도 했다. 술이 많이 들어가면 자신의 집에 초대하는 술버릇이 있는 박성호 차장이다. 그럴 때마다 형수님 얼굴 보기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이야~ 외울 사람이 한둘이 아니실 텐데….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대신 박 사장님이 내 자식들 이름 기억해 주면 되겠네요. 아들은 정원이고 둘째는 딸 나현입니다.”

이젠 자신도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다.

“아. 정원 도련님과 나현 아가씨. 저도 기억하겠습니다.”

수안은 박 차장이 자신의 아이들을 도련님과 아가씨로 부르지 않았으면 싶었지만, 이는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다.

“오늘 집에 늦는다고 하십시오. 나랑 술이나 한잔합시다.”

“제가 부회장님과 술을요?”

“왜요. 싫습니까? 좋은 술로 사드릴 텐데요?”

박성호의 목울대가 울렁인다.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 술이 고프다는 뜻이다.

“오늘 다른 협력사 안 갑니다. 여기가 끝이에요. 갑시다. 오늘은 내가 삽니다.”

항상 얻어먹기만 했기에 이번엔 꼭 사 주고 싶었다. 박 차장이 좋아하던 술을 거나하게 대접하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

.

.

그날도 수안은 박성호 차장의 집까지 가야 했다.

“부회자앙님. 우리 예쁜 마누라와 애들 보셔야 한다니깐요. 정원이 나현이 만큼 예쁘다고요오.”

“알았습니다. 지금 가고 있습니다. 같이 승강기에 탔잖아요.”

잔뜩 취한 박성호는 자다 깨기를 반복하고 있다. 지금은 장세진이 부축하고 있었고, 수안은 먼저 나가서 박성호의 집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성호 형님 모셔왔습니다….”

뒤에 형수님이라고 붙이고 싶었지만, 지금은 부를 수 없는 호칭이다.

-…네.

문이 열리고 형수님 얼굴이 보였다. 형수님은 익숙한 듯이 취한 형님을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자주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형수님은 성호 형님을 침대에 던져 놓고 나왔는지 금방 나와서 말했다.

“들어와서 음료수라도 한 잔씩 들어요. 그냥 가면 섭섭하잖아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수안은 의례상 하는 거절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장세진도 어쩔 수 없이 수안을 따라 들어왔다.

“회사 직원? 두 분은 젊네요?”

“하하. 직원 맞습니다.”

“…예.”

수안이 먼저 직원이라고 인정해 버렸으니 장세진도 동의해야 했다.

“신입이신가 보네.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죠?”

“…예.”

장세진이 일을 시작한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이니, 신입은 신입이다.

“근데 이쪽은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어려 보이긴 하는데….”

수안을 보고 하는 말이다.

“어디서 봤더라….”

수안은 맞춰 주길 기대했지만, 형수님은 도무지 기억해 내질 못했다.

“…기억이 안 나네. 너무 잘생겨서 내가 착각했나 봐요. 어쩜 그렇게 뽀얗고 예쁘장하게 생겼어요?”

“감사합니다. 형수님.”

수안은 지금이야말로 기회라 생각하고 형수님을 불러 봤다.

가끔 이곳에 오면 밥도 챙겨 주셨고 아이들과 놀기도 했었다.

성호 형님 집에서는 가족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고아인 금용이 어디에서도 느끼기 힘든 포근한 가족의 향기였다. 그런 향기를 이 아파트에서 느끼곤 했다. 금용에겐 대리 만족의 시간이다. 다른 사람의 가족을 통해 가족을 가진 행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기회였다.

‘그땐 성호 형님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술 먹고 집에 돌아오면 걱정해 주는 아내가 있었고, 형수를 닮은 잘생긴 아들과 누굴 닮았는지 모를 정도로 예쁘고 귀여운 딸도 있었다. 대출이 끼어 있지만, 적당한 평수의 아파트도 갖고 있었고 주말엔 가족이 함께 놀러 가기도 한다. 시골에 내려가면 부모님이 계셨고 김장철이 되면 김장 김치도 얻어온다. 금용을 생각해 챙겨 주신 형수님 덕분에 김장 김치 맛을 볼 수 있었다. 작은 원룸에 가져온 김장 김치를 뜨끈한 밥과 먹으면 속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속이 든든해지면 형수님에 대한 고마움도 마음에 가득해졌었다.

“벌써 형수님? 잘생긴 총각이 넉살도 좋아. 그런데 왜 우리 애 아빠만 저렇게 술을 먹였어요? 젊은 분들이 너무하네.”

“하하하. 죄송합니다. 성호 형님이 오늘 좋은 일이 있으셔서 좀 드셨습니다.”

“우리 애 아빠가 좋은 일이 있었어요?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온다는 얘긴 들었는데….”

“성호 형님 깨시면 직접 들어 주십시오. 저희가 형님 즐거움을 빼앗으면 안 되죠.”

“궁금하지만 참아야겠네. 알았어요.”

“지호랑 유진이는 잠들었죠? 불청객인 저희는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애들 깨면 다시 잠들기 힘들지 않습니까.”

“아휴. 애 아빠가 애들 이름도 얘기했어요? 주책이야 정말.”

“아닙니다. 궁금해서 저희가 물었지요. 형수님 미모를 타고나서 딸이 그렇게 예쁘다고 하셔서요.”

“이이는… 아차. 내 정신 좀 봐. 음료수 내준다는 걸.”

“아닙니다. 오늘 너무 늦어서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형수님.”

“미안해서 어쩌죠? 다음엔 내가 제대로 대접해 드릴게요. 대신 약속 잡고 오기예요?”

“감사합니다. 형수님. 꼭 다시 오겠습니다.”

성호의 아내는 다음 날 아침까지 수안의 정체를 기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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