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테크
수안은 이방효에게 칼슨의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보고받은 다음, 관련 계좌의 자금 중 일부를 그대로 로버트의 해외 계좌에 옮기라고 지시했다. 이번 일의 가장 큰 공로를 차지하는 인물이 바로 로버트이기 때문이다. 로버트는 모든 위험을 혼자 떠안았다.
칼슨과 드레이크가 함께 도망친 것은 의외였지만, 하나도 걱정되질 않는다.
‘녀석들이 복수를 위해 움직일 리가 없지….’
프랭크 회장의 복수를 생각할 정도로 의리가 넘치는 놈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대운 자동차에만 집중할 시간이다.
가벼운 재킷을 들고 집무실 밖으로 나오자 포근한 바람이 콧속으로 들어온다.
조금씩 날이 풀리고 있었다.
“벌써 봄이네.”
IMF로 인한 경제 한파가 아직 위세를 떨치고 있었지만, 국내 경제에도 봄이 올 것이다.
수안이 로비에 나오자 대기 중인 차에서 내린 직원이 문을 열어 줬다.
딸깍.
“모시겠습니다.”
이현창의 보좌관인 장세진이 여전히 수안 곁에 머물고 있었다.
“괜찮다니까. 내가 손이 없나?”
몇 달이나 함께 지낸 사람이다. 말을 편히 할 정도는 됐다.
장세진은 회사 일을 조금씩 배우더니 지금은 비서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덕분에 배영성 사장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이현창의 심복이라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일이다.
“습관이라 그렇습니다.”
“에헤이. 그런 습관은 버려도 괜찮아. 가자.”
“예. 부회장님.”
수안은 이번에도 대운 자동차 협력사를 돌아볼 예정이다. 이미 강운 홀딩스에서 협력사에 관한 조사를 마치고 신뢰할 수 있는 협력사를 추려 놨다. 수안은 예전처럼 중소기업을 돌아다니며 얼굴 도장만 찍으면 될 일이다.
대운 자동차의 입찰에서 해외 기업체는 일찌감치 백기를 들고 도망친 상황.
남은 것은 대현 그룹과 강운 그룹인데 정택주 회장과 정영수 회장의 확답을 받아 뒀으니 대운 자동차가 강운 그룹으로 편입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수안이 탄 차량이 부드럽게 도로를 달린다.
‘사람들은 다 그대로 있으려나.’
오늘 수안이 방문하는 업체는 수안이 금용으로 살면서 일했던 대운 자동차의 하청 업체다.
처음 강운 홀딩스 직원들이 회생시킬 기업에서 제외했었지만, 수안이 사장을 갈아치우고 재건하라고 명령한 바 있었다.
직원들은 믿을 수 있어도 사장은 믿을 수 없었다. 항상 뒷돈을 챙기고 직원들 월급을 미뤘던 놈이다. 또한 돈이 없다고 징징거리면서도 툭하면 룸살롱에서 술을 마셨다. 이 사실은 녀석의 법인 카드 사용 내역을 직원들에게 공개하고 회사를 나간 경리 여직원이 있어서 알 수 있었다.
‘민희는 딴 데 가서 잘살고 있겠지?’
평소 디폴트 값이 틱틱거림인 녀석이다. 그래도 속정이 깊어 직원들에게 사소한 일을 잘 챙겨 주던 직원이다. 작은 보너스라도 나올라치면 미리 연락해서 다른 통장으로 받고 싶은 사람들을 조사하기도 했었다. 유부남 직원들은 민희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다.
장세진은 차에 타자마자 보고서를 열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적당히 하라고 해도 마이동풍이다.
“오늘 방문하실 [운 테크]는 대운 자동차 부품 회사로 사출 플라스틱 부품이 주요 매출 품목입니다. 최근 전장부품에도 손을 대고 있으며….”
“회사 설명은 됐어.”
수안은 운 테크 창고 구석에 숨겨 둔 장기 악성 재고까지 파악하고 있다. 운 테크에 관한 설명은 들을 필요 없었다.
“사장 이름이나 말해 줘.”
“기존 경영진은 강운 홀딩스 평가 기준에 미달해 내쳤습니다. 강운 자동차 계열사에서 모든 지분을 인수하고 아예 소유권을 가져왔습니다. 현재 박성호라는 인물을 임시 대표로 세워 두고 조직 개편을 진행 중입니다.”
“박성호? 박성호 차장?”
“예. 차장급 인사였습니다. 윗 직급 대부분이 경영진과 연계된 비위로 사직하고 평가 기준에 맞는 사람을 고르다 보니 박성호 차장이 선택되었습니다.”
‘박 차장님 출세했네.’
“급여는 많지 않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잘랐고 박성호 씨도 동의했습니다. 임시일 뿐이니까요.”
“그래도 본래 차장 급여보다는 많잖아.”
“강운 자동차 산하로 들어왔으니 일정 부분 인상이 필요했습니다. 강운 그룹 계열사가 인수한 기업은 운 테크가 유일합니다. 박성호 씨는 임시 사장이고 이후 강운 자동차에서 부장급 인사를 사장으로 파견할 예정입니다.”
“임시면 얼마나?”
“짧게는 2개월 길게는 4개월입니다. 이후 구조 조정으로 정리할 계획도….”
“무슨 소리! 계속 맡겨! 한 2년 그대로 두고 보자. 잘할 수도 있으니까.”
‘갚을 건 갚아야지.’
예전에 박 차장에게 얻어먹은 술값이 얼마던가. 걸핏하면 데려가 밥도 사 주고 술도 사 줬다.
금용이 일가친척 하나 없는 고아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쉬이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냥 술이 고파서 그랬는지도 모르지.’
박성호 차장이 자신을 진심으로 챙겨 줬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본사 업무팀에 부회장님 지시 사항으로 전달하겠습니다.”
이후로도 수안은 다른 협력사 정보를 들으며 운 테크로 향했다.
머리로는 오랜만에 만날 동료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 * *
박성호 차장은 함께 일하는 과장에게 자신의 복장 상태를 봐달라고 했다.
“김 과장. 내 넥타이 안 삐뚤어졌지?”
“예. 차장님.”
“공장 청소 상태는 어때?”
“조금 전에 점검했습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합니다.”
높은 분의 방문 통보에 공장은 이틀 전부터 난리를 피웠다.
운 테크는 오랜만에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후우.”
“한 번 더 다녀올까요?”
“청소 점검 다시 하고 직원들 복장 상태도 확인해. 입에서 담배 냄새도 안 나게 해.”
“…지금 저희가 여자 만나러 갑니까? 담배는 좀 빼 주시죠. 차장님.”
“야. 강 부회장님이 우리 직원에게 묻고 대답을 들으실 때 입 냄새가 확 끼치면 기분이 좋으시겠어? 오늘 우리 회사 직원들 전부가 잘릴 수도 있어.”
“…양치 후 대기하라고 하겠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리길 수십 분. 창밖으로 검은색 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 * *
“…왔다.”
박성호 차장은 거울을 다시 살피며 넥타이를 의미 없이 좌우로 흔들어 주고 밖으로 내달렸다.
다다닥.
차가 멈추고 비서로 보이는 직원이 먼저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사람은 고개를 위로 올려봐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지, 진짜 강수안이다!’
박성호 차장은 가출하려는 정신을 되돌리고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운 테크 박성홉니다.”
“…….”
수안은 말없이 박성호를 보고 있다가 잠시 하늘을 보고 감정을 추슬렀다.
그냥 오랜만에 봐서 기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잃어버린 친형을 다시 만난 기분이다.
‘…언제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하지?’
수안이 인사를 받아 주지 않자 숙인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디스크 도지겠네. 얼른 일어나세요. 박 차장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디스크요?”
‘어떻게 아셨지?’
“됐고. 안으로 들어갑시다.”
“예. 부회장님.”
“장 비서는 차에서 기다리세요. 혼자 다녀올 테니까.”
“예. 부회장님.”
수안은 거침없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운 테크 내부는 수안이 훤히 기억하는 곳이다.
“청소 열심히 하셨네.”
“직원들이 평소에 너무 깔끔해서 청소할 것도 없었습니다.”
수안은 삐뚜름한 표정으로 박성호를 쳐다봤다.
‘깔끔하긴 개뿔.’
평소 화장실은 소변기는 누렇게 오줌에 절어 붙어 있었고 지독한 암모니아 향이 코를 뻥 뚫어 줬다.
‘대변기는 상상만으로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으니 패스.’
또한 공장 구석구석이 직원들의 흡연장이다. 항상 꽁초가 여기저기 박혀 있었고, 쉬는 시간마다 바닥은 가래침으로 범벅이 된다. 사장은 회사에 불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지만, 지키는 놈들은 많지 않았다.
아니, 없었다.
관리팀이라고 달랐을까? 사무 업무를 보는 사무실에 가끔 들어가면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어서 넘어트리진 않을지 발걸음을 조심했었다. 사무실에서 뻑뻑 담배를 피워 대는 경리 부장도 꼴 보기 싫었었다. 경리 여직원은 연기에 콜록거리면서도 부장의 끽연을 방해할 수 없었다. 다른 회사도 다 마찬가지였다. 흡연가의 위세가 드높은 시절이었다.
“저기 누가 담배꽁초 박아 놨네.”
“억!”
수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조립식 벽면 틈에 꽁초가 자리하고 있었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김 과장 이눔시키! 확인했다며!!’
“내가 지금 공장 주변 돌아보면 담배꽁초를 100개도 넘게 찾을 겁니다. 박 차장님이 알아서 잘 치우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갈게요.”
“예, 옙!”
“창고로 가 보겠습니다.”
박성호는 생산한 제품을 모아 두는 완성품 창고로 간다고 생각했지만, 수안의 발걸음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부회장님. 이쪽이 완성품 창고입니다.”
“나는 자재 창고로 가는 중입니다만.”
“아. 자재 창고는 그쪽이 맞습니다.”
“김태형 과장 불러서 자재 창고 3번 열쇠 가져오라고 하세요.”
“아. 예….”
‘김태형 과장? 이름은 미리 보고 외울 수 있지만….’
자재 창고를 관리하는 김태형 과장을 콕 짚어서 열쇠를 가져오란다. 그것도 3번 열쇠를.
“김 과장 빨리 불러오시라니까요. 박 차장님.”
“예! 김 과장! 열쇠!!”
멀리서 상황을 살펴보던 김태형 과장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뛰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차장님.”
“자재 창고 열쇠는 가져왔어?”
수안은 답답한 마음에 나섰다.
“손목에다 차고 다니는 사람한테 뭐 하러 묻습니까?”
김태형 과장의 왼쪽 손목엔 여자들이 사용하는 머리끈으로 만든 열쇠 전용 팔찌가 있었다. 김태형은 항상 자재 창고 열쇠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다. 예전에 열쇠를 잃어버리고 나서 박 차장에게 크게 혼난 김 과장이 몰래 고안한 방법이었다.
김태형은 수안의 말대로 왼쪽 손목을 들어 얼른 열쇠를 건네줬다.
‘…이, 이걸 어떻게 알고 계신 거야?’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어차피 겉모습은 잘 꾸며 뒀을 것이니 저는 지금부터 속을 보겠습니다.”
수안은 3번 자재 창고 손잡이를 잡고 열쇠를 구멍에 꽂아 능숙하게 흔들고 돌렸다.
‘어? 저건 나만 아는 방법!’
운 테크에서 3번 자재 창고를 열기 위해서는 김태형 과장의 도움이 필수였다. 오래된 잠금장치는 오직 김 과장의 손으로만 열 수 있었다. 방금 가능한 사람이 하나 늘었다.
“자아. 이제 볼까요?”
“여, 여기는 청소 상태가 불량해서 부회장님이 들어가시기에….”
김 과장은 뭐가 불안한지 수안을 막아서고 있었다.
“비키지? 더러워지면 빨면 그만이야.”
수안은 김 과장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쌓여 있는 자재들. 최근에 들어온 물건도 있지만, 아주 오래된 물건도 있다. 악성 재고는 모른 척했다.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 나중에 처분만 제대로 하면 되지 않겠는가.
철제 선반 구석 아래에 놓여 있는 골판지 박스. 이것이 수안의 목표물이다.
“뭐가 들었는지 너무 열어 보고 싶게 생겼네요. 박 차장님 열어봐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김태형 과장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간다.
“그럼 한번 보겠습니다.”
철제 선반에서 골판지 박스를 옆으로 빼내고 테이프로 마감도 되지 않은 박스의 윗면을 열었다.
‘빙고. 여전히 있네.’
수안의 손에 들려 나오는 물건들에 김태형 과장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췄고 박성호 차장은 입만 벌리고 있었다.
라면 다섯 봉지와 버너, 부탄가스 통 여럿, 그리고 줄줄이 나오는 소주병과 일회용품이 잔뜩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냄비였다. 며칠 전에도 라면을 끓여 먹었는지 라면 건더기가 냄비에 붙어 있었다.
박성호도 그 모습을 보고 질끈 눈을 감았다.
“참…. 재미있게 사시네.”
“…죄, 죄송….”
“회사에 불 싸지르고 다 같이 죽자는 겁니까?!!”
“크읍.”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부하 직원의 잘못이라지만, 임시라도 자신이 대표를 맡고 있었다.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