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슨 (171/304)

칼슨

수안은 강운 무역을 나서 로비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차에 몸을 실었다.

‘앞으로 조금 힘들 수 있지만, 자리는 확실하게 잡겠지.’

경영진으로 승진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결국은 위로 향하게 될 사람이다.

강운가 친인척을 누가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잘릴 일도 없고 부당한 압력을 받을 일도 없다.

이번에 맡겨진 일을 꾸준히 진행하면 시야가 달라질 것이다. 앞으로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겪은 직원들은 영수를 찾아가게 된다. 여기서 문제를 접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거치며 회사를 깊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맡겨진 일을 넘어서 회사 전반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위치. 고단한 자리일지 모르지만, 상당한 힘을 발휘하는 위치였다. 직위를 올려주지 않았지만, 직책은 본부에서 임명한 특임 감사라고 할 수 있었다. 경영진과 동급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강운 무역을 잘 부탁합니다. 형님.’

동생들처럼 뚝 떼어 주진 못하더라도 경영자로 키우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강운가에 주눅 들어 사는 아내를 위해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 * *

칼슨은 매일 밤 긴장한 채로 잠들곤 했다. 그날도 평소와 같았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시골 한적한 농가에 숨어 창밖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산탄총은 항상 침대 옆, 손이 닿는 곳에 놔둔다.

‘프랭크 회장이 쥐도 새도 모르게 갔어.’

칼슨은 프랭크 회장의 죽음이 자연스럽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평소 프랭크 회장이 건강을 얼마나 열심히 챙겼던가. 나이가 있다고 해도 심장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기엔 프랭크 회장이 너무 건강했다.

누군가 살해한 것이 틀림없었다. 심장병으로 살인을 자연사로 포장하는 약물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이 약을 잘 쓰는 대행 업체도 기억하고 있다. 녀석들에게 의뢰했다면 이번 결과는 의문을 가질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나도 조심해야 해.’

자신을 비호해 주던 회장이 사라졌다. 힘으로 상대에 대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믿을 것은 자신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날도 작은 벌레 소리에 잠에서 깰 만큼 긴장을 유지하며 얕은 잠을 청했다.

경계가 무색하게도 다음 날 칼슨은 엉뚱한 장소에서 깨어났다.

분명 허름한 농가 주택에서 잠들었는데, 지금은 자신의 키보다 크게 자란 옥수숫대가 보였다.

“우리 공주님이 늦잠을 자셨군.”

“……!!”

철커덕. 쿵.

“크읍.”

급하게 일어나려던 칼슨은 다시 자리에 고꾸라졌다.

손과 발엔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사슬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다.

“드레이크. 네가 키스를 해야 잠에서 깬다고 했잖아.”

“미쳤어? 여기까지 와서 날 놀릴 거야?”

“클락슨. 역시 BE 인베스트먼트에서 손을 썼어.”

칼슨은 클락슨을 알아봤고, 옆에 서 있는 드레이크에게도 아는 척했다.

“드레이크…. 능력도 좋군. 이번엔 BE에 붙었나? 네 놈은 지옥도 아까워.”

드레이크가 BE와 함께한다는 예상을 하지 못한 탓에 안가를 옮기지 못했다. 자신의 은신처가 밝혀진 것은 드레이크 때문이었다.

“포기는 빨랐으면 좋겠어. 고문은 내 전공이 아니라서 말이지.”

고문이라는 말에 칼슨의 눈동자가 드레이크에게 향했다가 얼른 돌아왔다.

“고문은 내 전공이야. 칼슨도 알고 있어.”

“오! 이거 좋은 소식이군.”

칼슨에겐 좋은 소식이 아니다.

‘젠장. 괜히 이쪽으로 왔어.’

일 년에 수십 명이 길을 잃는다는 미네소타주의 거대한 옥수수밭이다.

자신이 여기서 고문을 받다 죽어도 주변에 자신의 비명을 들어 줄 사람이 없다. 시체조차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

칼슨은 입을 다물었다. 괜히 말을 많이 해 봐야 약점만 노출하게 된다. 정보를 조금씩 던져 주며 시간을 끌고 탈출 기회를 노려야 했다. 그래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프랭크 회장의 유산은 이미 BE 인베스트먼트에서 강제 집행 절차에 착수했다고 하더군. 프랭크 회장의 자손이 가져갈 유산은 아마 한 푼도 없을 거야. 당연히 자네 퇴직금도 안녕이지.”

“……!”

“몰랐나? 이미 아는 줄 알았는데?”

물론 프랭크 회장이 골드만삭스 대출 서류에 회사와 함께 사인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산까지 저당 잡힐 정도로 강력한 계약서일지 몰랐을 뿐이다.

“알아.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래도 유산은 좀 아쉽군.”

“클락슨. 지금 칼슨이 지은 저 표정이 뭔지 알아?”

“왜. 거짓말하는 표정을 알아봤다고 자랑하고 싶은 거야?”

“…….”

“아. 모른 척하고 너 잘났다며 칭찬해 줄 걸 그랬나? 굿 잡 맨.”

“이디엇.”

“애솔.”

“…….”

칼슨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정말로 말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질문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칼슨.”

“…….”

“물론 대답하는 건 네 자유야. 난 마음이 넓은 사람이거든.”

“…….”

“방금 넌 유산이 아쉽다고 했지. 하지만 우린 네가 프랭크 회장의 비밀 자금까지 관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네가 유산을 아쉬워할 위치가 아니라는 것도 깜빡했지? 넌 유산에 권리를 행사할 수 없잖아.”

“…….”

“설마 프랭크 회장이 숨겨 둔 아들이라도 되나?”

“풋. 웃기는 소리 하지 마. 클락슨.”

“조용히 하고 있어. 드레이크. 내가 심문하는 중이잖아.”

“이게 심문이야? 난 마약 중독 상담소에 온줄 알았다고.”

클락슨은 드레이크를 무시하고 계속 칼슨에게 말을 걸었다.

“넌 이미 프랭크 회장의 비밀 계좌를 빼돌리려고 마음먹었을 거야. 미안하지만 내 고용주가 그건 허락하지 못한다고 했어. 순순히 반납해 줬으면 해. 채권자는 채무자가 빚도 갚지 않고 죽어 버려서 무척 마음이 상했거든. 골드만삭스 지분과 유산으로도 충당이 힘든 상황이야. 골드만삭스가 갚을 수도 있겠지만, 회사를 힘들게 할 뿐이지. 이해하겠어? 칼슨?”

“…….”

칼슨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드레이크가 다시 나섰다.

“슬슬 지겨워지는데 나한테 넘기지? 내가 맡으면 저 녀석은 어렸을 때 누굴 떠올리며 자위했는지까지 다 불 거야.”

“딱 30분만 더. 그 시간이 지나면 네게 양보하지.”

“젠장. 난 근처에서 낮잠이나 자고 있겠어. 네 말을 듣다 보면 내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아.”

드레이크가 자리를 비웠고 남은 것은 칼슨과 클락슨 둘이다.

클락슨은 드레이크가 자리를 비우고 오히려 말이 없었다. 가끔 시계를 보며 얼마나 지났는지 확인할 뿐이다.

칼슨은 슬슬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5분 지났네. 이제 멀리 갔겠어.”

클락슨은 가져온 가방에서 적당한 굵기의 밧줄을 꺼냈다. 그리고 칼슨에게 다가가 머리 뒤에서 둥글게 만든 밧줄을 씌웠다.

“……!”

순간 칼슨은 바로 목이 졸려 죽는 줄로 착각했다.

“자, 잠깐! 아직 내게 아무것도 안 물어봤잖아!”

“놀라지 마. 설마 내가 그런 짓을 하겠어?”

목에서 조금 더 올라온 줄은 칼슨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가로질러 입으로 파고들었다.

재갈을 물린 것이다.

“크악.”

“너무 시끄러운 건 싫어서 말이야.”

“으흥~ 룰루~”

그 뒤로 클락슨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곧 흉물스러운 물건이 덜렁거리며 눈을 어지럽힌다.

‘지금 저 녀석이 뭘 하는….’

칼슨의 의문은 클락슨의 다음 행동으로 해소되었다.

“자. 너는 내가 벗겨 줄게.”

클락슨의 손이 칼슨의 바지춤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으이! 으이이!!”

이제야 드레이크를 멀리 보낸 이유를 알 수 있었고, 30분이라는 시간을 달라고 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저 눈빛은 분명 진심이었다.

“으! 이!!! 이! 아!!”

“어차피 넌 재갈을 풀어 줘도 아무 말 안 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어. 베이비.”

도리도리.

칼슨은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부정했다.

클락슨은 칼슨의 벨트를 풀어 버리고 지퍼를 내린 다음 다시 물었다.

“말하고 싶어?”

칼슨은 고개를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었다.

“그냥 하지 말지? 조용히 즐기는 편이 행복하지 않아? 넌 비밀을 계속 감추는 거야. 대신 내게 행복을 선물해 줘.”

클락슨은 헐렁한 칼슨의 바지를 잡고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클락슨의 손은 칼슨의 엉덩이에 닿아 있었다.

칼슨은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부정했다.

“아이! 흐아!”

“저런. 아무래도 거절인가? 입을 풀어 줬는데 소리 지르면 기절시키고 할 거야. 알았지?”

다시 고개를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었다.

“아.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

재갈을 풀어 줄 것 같았던 클락슨은 뒤로 돌아 둥근 엉덩이를 내보였다.

그리고 흉물스러운 물건을 덜렁거리며 가방으로 뛰어가 펜과 종이를 가져왔다.

“적어. 은행, 계좌, 비밀 번호, 들어 있는 금액. 숨겨 둔 다른 재산까지 전부.”

칼슨은 손을 부들거리며 은행과 숫자를 적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클락슨이 다시 말했다.

“10분 내로 적어. 아니면 드레이크에게 연락해서 한 시간 뒤에 오라고 할 테니까.”

“……!”

“우리가 행복한 시간을 갖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30분은 너무 짧잖아.”

칼슨은 잡은 펜의 속도를 올렸다.

.

.

.

30분이 지나 돌아온 드레이크는 칼슨이 자신을 격렬하게 반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환한 표정과 반짝이는 눈빛. 전문가가 아니라도 알아볼 수준이다.

“뭐야? 아무도 없는데 재갈은 왜 물려놨어?”

“낮잠 잔다며? 왜 이렇게 일찍 와?”

제시간에 도착한 자신이 불편하다면 클락슨의 심문은 실패로 끝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그렇지. 이제 내 차례인가?”

드레이크가 자백제를 포함해 고문 도구들을 꺼내려 했지만, 클락슨의 말이 이어졌다.

“칼슨이 상당히 협조적이라 벌써 다 불었어. 꼼꼼하게도 적었네.”

드레이크는 얼른 달려가 클락슨이 들고 있는 종이를 살폈다.

정말로 계좌와 비밀 번호가 모두 적혀 있었다.

“뭐, 뭐야. 다 불었다고? 그 지루한 심문만으로 가능했단 말이야?”

“이게 맞는지 확인할 때까지는 더 붙잡아 둬야 해.”

“너!”

드레이크는 칼슨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발 다 안 불었길 빈다. 나머지는 내가 불게 만들 테니까!”

아직 재갈을 풀지 못한 칼슨의 고개가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렸다. 긍정의 표현이다.

“쒯! 칼슨은 왜 이 모양이야? 왜 날 반기냐고?! 너 무슨 짓 했어?”

동성애자에게 항문이 파열되는 것보다 차라리 고문이 낫다고 생각한 칼슨이다.

드레이크가 늦게 도착했다면 정말로 그랬을지 모른다. 해외 비밀 금융 자산과 세계 곳곳에 숨겨진 유산 목록을 받고도 바지춤을 끌어올리는 클락슨의 얼굴은 아쉬움이 가득했었다.

“난 모르지. 넌 이 종이를 BE에 보내 줘. 난 사실이 확인되기 전까지 이 녀석을 지키고 있을게.”

‘아, 안 돼. 둘이 남으면 무슨 짓을 할지 뻔해!’

쩔렁쩔렁.

클락슨의 말에 무거운 사슬을 끌고 달려온 칼슨이 드레이크의 다리를 붙잡았다.

“뭐, 뭐야? 왜 이러는데?”

“아으아이.”

칼슨은 침을 질질 흘리며 질겁한 표정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드레이크는 얼른 입에 물린 밧줄을 풀어 주며 무슨 소리를 하나 들어 보고자 했다.

툭.

밧줄이 떨어졌어도 칼슨은 드레이크를 붙잡은 손을 떼지 않는다.

“나 절대로 안 도망가니까. 저 사람 말고 드레이크 씨가 감시해 줘. 날 지켜 달라고!”

결국 드레이크를 포함한 직원들 몇이 농장에 남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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