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권-강운 무역 (170/304)

강운 무역

칼슨

탈출

운 테크

형수님

아빠는 사장님

남은 한 사람

9‧11 대비

피곤한 협상

하이디스

신혼여행

첫사랑?

간단한 결론

새집 구경

수현

포상금

홍춘이!

추억 속 그날

뉴월드와 크로스

하나? 둘!

차기

공동의 적

강운 무역

‘최 이사가 무슨 수로….’

어림없는 생각은 지금이라도 잘라 줘야 했다. 최 이사는 평소에도 자기주장이 강했다.

제대로 답해 주지 않으면 회장실까지 쳐들어올 사람이다.

“강운 그룹 강 부회장에게 받아 왔으니까 어림없는 소리는 거기까지만 해.”

“……!!”

“아….”

이들도 K-5 디자인이 누구 손에서 탄생했는지 들어 알고 있었다. 기화 자동차 디자이너 누구도 아니었다. 모든 디자인은 강수안 부회장의 손에서 창조되었다.

‘이것도 강수안 부회장님 작품이었어!’

“이 디자인 하나 때문에 수백억 깨졌어. 그러니까 앞으론 네놈들이 만들란 말이야!”

정영수 회장이 나간 회의실에 최 이사와 디자이너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차량 디자인만 보고 있었다.

“내가 이 디자인 이상을 그려낼 수 있을까?”

“10년 지나야 가능하다고 본다.”

“강 부회장은 육상 선수 아니었어? 디자인은 언제 배운 거야?”

“육상 선수가 법대도 갔다는 거 아니냐. 디자인이 대수야? 팬탁 삐삐 디자인도 전부 강 부회장 솜씨라고 하더라.”

“아차. 그랬지.”

최 이사는 디자이너들의 얘기를 듣고도 차마 직원들을 타박할 수 없었다. 자신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날렵하면서도 중후한 느낌. 고급스러움이 물씬 느껴져. 이걸 우리가 어떻게 따라잡아….’

번뜩 정신을 차린 최 이사가 디자이너들에게 말했다.

“이 디자인을 기준으로 삼는다. 앞으로 소나타와 아반떼까지 패밀리 룩으로 새롭게 디자인해. 어차피 우리가 사 온 디자인이라 문제 삼을 수 없어.”

“오!”

“기화 자동차 K시리즈에 대항할 수 있도록 모든 디자인을 새롭게 리뉴얼하자. 일 시작해! 아! 디자인 특허 당장 등록하고!”

“예! 이사님.”

‘시간을 벌고 독자적인 디자인을 계속 연구하겠어!’

수안이 던진 돌 하나가 큰 파문을 만들고 있었다.

* * *

수안은 대현 자동차에서 무슨 일이 시작됐는지 알 필요 없었다. 어차피 한물간 디자인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 그랜저도 알고 있었고 기억하는 해외 차량 디자인도 많았다.

대운 자동차 인수 협상이 진척을 보이고 있었고 기존 차량에 새로운 디자인을 입혀야 했다. 기화 자동차는 이제 본궤도에 올랐으니 앞으론 대운 자동차만 생각하면 된다.

오래간만에 부회장실을 찾아온 계열사 사장을 맞이하는 지금은 그마저도 생각을 미뤘다.

-부회장님. 강운 무역 김성우 사장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요.”

강운 무역 김 사장은 성격이 약간 화급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무역 분야에서 발이 넓은 사람이다. 물론 강운 무역 사장을 맡길 정도이니 능력은 확실하다 할 수 있었다. 수안도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인물이라 거리낌 없이 대할 수 있었다.

“어쩐 일로 김 사장님이 여기까지 걸음 하셨을까요?”

“하하하. 부회장님 자주 뵙고 싶어서 왔지요.”

“앉으세요.”

“예. 부회장님.”

둘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로 일상적인 회사 일로 이어 가던 대화는 본론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저기….”

“김 사장님이 얘기 꺼내기 힘들 만 한 일도 있어요? 이거 걱정되는데요?”

“얼마 전에서야 파악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진중한 김성우 사장의 태도에 수안은 상체를 탁자 쪽으로 내밀며 관심을 표했다.

“강운 무역에 큰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수안의 기억에 1999년에 발생한 사회적인 이슈들이 주르륵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서 강운 무역이 진행하고 있던 일이 하나 떠올랐다.

“혹시 인수하기로 했던 홈플러스에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아, 아닙니다. 인수는 수월하게 진행 중입니다.”

삼디 그룹은 홈플러스를 해외에 매각하려다 삼디 자동차를 인수하는 강운 그룹에 홈플러스까지 함께 매각하기로 했다. 본래 합작을 생각했던 삼디 그룹은 강운 그룹에서 완전 인수를 제안해 매각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럼 문제랄 것이 없는데….”

김성우 사장은 조금 더 주저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말을 뱉어냈다.

“그…. 사모님 오빠분이 강운 무역에 계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부회장님.”

“아….”

“너무 늦게 알아서 제가 배려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

배려하지 말라고 일부러 말을 안 했다.

“앞으로는 혹시라도 불편함을 느끼시지 않도록 제가 챙기겠습니다.”

수안은 앞으로 숙였던 상체를 소파에 기대며 말했다.

“자. 들어봅시다. 김 사장님은 형님을 어떻게 배려하시려고요?”

“우, 우선 빠른 승진을 보장하고….”

“하고?”

“큰 폭의 급여 인상과 법인 카드, 법인 차량을 제공해 회사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형님이 회사 차를 타고 돌아가면 처가댁에서 깜짝 놀라겠어요.”

“좋은 차량으로 준비를….”

“푸흐흐. 회장님도 참 잘했다고 하시겠다. 그쵸?”

“…….”

김성우 사장은 수안의 웃음소리를 듣고 뭔가 잘못됐음을 알 수 있었다.

“형님 회사에서 쫓겨나게 할 생각이셨다면 아주 성공적인 플랜입니다. 김 사장님이 불합리한 승진을 단행하자마자 영수 형님은 본사에서 퇴직을 권유받을 겁니다.”

“아….”

“열심히 공부하고 면접 잘 봐서 강운 무역 합격했는데 쫓겨나면 우리 마누라가 김 사장이 일 잘했다고 하겠어요? 나한테는 뭐라고 할까요?”

“힉!”

“장인 장모님도 누가 우리 아들을 그렇게 잘 챙겼냐며 나한테 그놈을 찾아오라고 하실지도 몰라요.”

“흐헙!”

“김 사장님. 헛소리하지 마시고 그냥 내버려 두세요. 회사에 정붙이고 열심히 일하는데 왜 들쑤셔요?”

“죄,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내가 뭘 바랄 거였으면 일찌감치 김 사장님 불러서 말을 했겠지. 그렇지 않아요?”

“그러셨겠죠….”

“그러니까. 내가 왜 그런 혜택을 바란다고 생각하시냐 이 말입니다.”

“제가 미리 챙기지 못했다는 생각만 하고 너무 짧게 고민했나 봅니다.”

“당연히 처 오빠 되는 영수 형님이 일을 너무 잘해서 쑥쑥 승진하면 축하해 줄 수야 있지요. 이게 전부라 이 말입니다. 축하! 축하로 끝! 오케이?”

“예. 이해했습니다.”

“정말 이해한 거 맞죠?”

“시기가 도래하면 적절하게 승진을 진행해서….”

“이봐요. 김 사장님. 그냥 올려주라는 뜻은 아니지. 일반 직원과 평범하게 똑같이 가자는 말이죠. 일을 못 했으면 못 한대로 승진에서 누락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이미 회사 내부에 로열 패밀리라는 소문이 돌아서 올바른 평가가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그냥 승진으로 직행하는 편이 직원들 사기를 위해서도 좋습니다. 직원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진 않을 겁니다. 그러려니 하는 부류가 대부분입니다. 게다가 이른 승진도 아니고 적절한 시기에 진행한다면 더욱 문제가 없지요.”

말귀를 못 알아들은 줄 알았던 수안은 김 사장이 사실은 너무 잘 알아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

“아무리 공정한 인사 평가를 하고 싶어도 현실은 쉽지 않습니다. 부회장님.”

“그렇게 힘들까요?”

“회사에서 라인이 괜히 생기지 않습니다. 일을 잘해도 윗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승진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촘촘한 인사 평가 기준을 세워도 소용없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성과를 얻을 만한 일을 몰아 줄 수도 있는 일이죠. 하지만 내부 지침이나 감사를 진행해도 딱히 문제를 밝혀내기는 어렵습니다. 아주 평범한 일상 업무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로열 패밀리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할 임직원들의 마음도 일부는 공감합니다. 본인들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어쩌자고 들켜서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다.

“좀 더 고민해 봅시다. 나도 당장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네요.”

“예. 저도 더 아이디어를 짜보겠습니다.”

수안은 김성우 사장을 돌려보내고 생각에 잠겼다.

간단하게 생각했던 일이 현실에선 조금 더 복잡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문제가 될까 싶어서 지금까지 숨겨오긴 했지만, 사실 알려진다고 해도 처음부터 단호하게 대처하면 별일 없을 거로 생각했었다.

회사의 직원들이 총수 일가를 어떻게 여기고 있을지 미처 짐작하지 못한 탓이다.

다른 회사로 옮긴다 해도 문제가 없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집안이 강운 그룹과 밀접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고, 이용하려는 인물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 예상이 아니라 예언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당연히 생기고도 남지. 다른 회사로 보내는 방법은 아웃.’

그렇다면 강운 그룹 계열사 내에서 이동해야 하는데, 무역팀 일이 자신에게 잘 맞는다며 기뻐하던 형님 얼굴이 떠올랐다.

다른 곳으로 발령하는 방법은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계열사라고 해도 뭐가 다르겠는가. 직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생각은 전부 비슷했다.

“하아.”

총수 일가와 관련된 인물이라면 줄을 대고 본다. 수진과 수현도 회사에서 겪었던 일이다. 수용은 본인 밑에서 끼고 가르쳤기에 문제가 없었을 뿐….

수용이를 가르친 김현성 사장이 떠올랐다. 수안의 눈치도 보지 않고 수용이를 끌고 다니며 일을 가르친 사람이다.

“직원들이 다들 김현성 사장만 같으면 걱정이 없겠네.”

그렇다고 아내의 오빠를 김현성 사장 밑으로 데려올 수는 없는 일이다.

수안은 회사에서 결론 내리지 못하고 아내에게 돌아가 상의하기에 이르렀다.

“…일이 이렇게 돼서 영수 형님이 앞으로 회사에서 잘 지내실지 모르겠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수안의 설명을 듣고 아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빠가 강운 무역 들어가고 참 좋아했었죠. 부모님도 깜짝 놀라셨고요.”

“응. 나도 당신도 전혀 몰랐던 일이었잖아. 형님 스스로 능력을 입증하고 합격한 거야.”

“그냥 두면 안 돼요?”

“그냥 둬?”

“지금은 놀라운 일이라 임직원들 반응이 그럴지 몰라요. 하지만 오빠는 총수 일가 직계도 아니에요. 며느리인 제 오빠일 뿐이죠. 회장님을 비롯해 부회장인 당신도 따로 신경 쓰지 않으면 임직원들은 곧 알게 되지 않을까요?”

“뭘?”

“연줄이라고 할 만한 황금 동아줄이 아니라는 사실이요. 자신들과 같은 평범한 회사원에게 줄을 댈 만한 사람은 없을 거로 봐요.”

“음….”

아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

괜히 다른 회사로 옮겨 이용당할 위험에 처하는 것보다, 차라리 계열사에 적을 두고 지켜보는 쪽이 차라리 속 편했다.

“그럼 우선 두고 볼까?”

“문제가 커지겠다 싶으면 그때 다시 생각해도 되지 않아요?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정 힘들면 오빠에게 고려 호텔로 옮기라고 할게요.”

아내의 소유인 고려 호텔이라면 아내가 알아서 잘 챙기겠다 싶었다.

“아니면 제가 복귀하고 매니저 하라고 해도 되고요.”

“풋. 형님이 매니저는 좀 그렇다.”

“괜히 강운 그룹에 폐를 끼치는 것보단 백배 나아요.”

“폐라니…. 당신이 원하면 내가 회장님께 말씀드려서 적당한 자리도 마련해 드릴 수 있어.”

“난 당신에게 그런 아내가 되고 싶지 않아요. 솔직히 고려 호텔도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모르죠? 난 아직도 고려 호텔로 가는 발걸음이 잘 안 떨어져요.”

“…….”

“오빠 일까지 강운 그룹에 부담 주고 싶지 않아요. 우선은 둬 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빨리 말해 줘요.”

“…….”

아내는 항상 몸가짐을 조심했다. 정원이를 낳고서도 달라지지 않았고 나현이를 낳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강운 그룹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지 항상 노심초사했다. 가족에 있어도 자신과 같은 기준을 적용했다.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해 오빠에게도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었다.

“강운 그룹에 시집간 건 나야. 아빠, 엄마, 오빠가 아니라. 만약 우리 가족 때문에 강운 그룹에 피해가 생기면 그 화살은 전부 내게로 향하는 거야. 그러니까 날 위해서라도 조심해 줘. 친인척들에게도 단단히 일러둬. 만약 강운 그룹 이름 팔아서 일 벌이다 걸리면 강운 그룹 법무팀을 보내서라도 꼭 콩밥 먹여 주겠다고 해.”

수안은 그런 아내가 현명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아내는 강운 그룹이라는 이름에 너무 눌려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선 안 돼.’

아내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고 이는 곧 가족의 행복으로 직결된다.

“여보.”

“응.”

“그런 마음으로 용케 복귀 결정을 했네?”

“그야….”

그만큼 연기 일을 좋아한 탓일 것이다. 강운 그룹에 폐를 끼칠지 모른다는 걱정이 저변에 깔려 있지만, 연기를 놓을 수 없었던 아현이다.

“형님 일은 걱정하지 마. 조금 일찍 승진하면 어때? 내가 가족인데 아니라고 해서 될 일인가? 그냥 내버려 두자.”

“하지만….”

“괜히 회사 일을 당신한테 얘기했다 싶어.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는데 말이야.”

“아냐. 이런 일이라면 나하고 상의해 줘야 해. 오빠 일이잖아.”

수안은 아내의 염려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알았어. 하지만 이번 일은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방금 방법이 떠올랐거든.”

* * *

수안은 다음 날 집 앞에서 형님을 기다렸다.

영수는 또 늦잠을 잔 탓에 부랴부랴 정장을 입고 뛰어나오는 중이다.

“형님!”

“어…. 매제님이 왜 아직 여기 있어요?”

일전엔 술에 취한 탓에 반말이 자연스럽게 나왔지만, 평소 수안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 영수였다.

“타세요. 같이 출근하시죠.”

“제가요?”

“얼른 타세요. 이러다 늦습니다. 저는 늦어도 상관없지만, 형님은 아니잖아요.”

“아아.”

수안은 차 안에서 조용히 신문을 보고 있었고 영수는 회사에 가까워질수록 안절부절못했다.

‘이제 곧 회사에 도착하는데….’

겨우 봉합한 일인데 이런 고급 차에서 내렸다간 회사 전체에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저기…. 매제님? 저는 여기서 내려주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아.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단 말입니다!’

영수는 일을 봉합했다고 믿고 있었지만, 김성우 사장이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다.

강운 무역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이 일로 임원 회의를 몇 차례 진행했었다.

“마, 마침 근처에서 볼일이 있었는데 깜빡했지 뭡니까. 저는 일을 보고 회사로….”

“회사 출근하고 외근 나오시면 되겠네요. 점심시간에 다녀오셔도 되고요.”

“하지만….”

“거의 다 왔습니다.”

검은 벤츠 세단은 야속하게도 회사 앞 로비에 도착해 있었다.

“이제 내리시죠.”

“아….”

“형님. 안 내리십니까?”

“저기. 매제님. 혹시라도 창문 열지 마시고 조용히 가시는 걸로….”

영수는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얼굴만 잘 가리고 회사로 들어가면 될 일이다.

“창문 안 엽니다.”

“아. 다행….”

“문 열고 내리면 되는데요.”

“문 열고 내려요? 왜요?”

“그럼 창문으로 나가라고요?”

“아니, 내 말은….”

“김성우 사장과 논의 중이던 일이 있어서 잠깐 보려고 왔습니다.”

영수가 아연한 표정을 짓든 말든 수안은 기사가 열어 주는 뒷좌석 문을 통해 내리며 말했다.

“얼른 나오세요. 처음 형님하고 같이 출근하지 않습니까. 나름의 의미 있는 날 아닙니까?”

“…….”

‘의미고 나발이고….’

더 물러설 곳이 없던 영수가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별일 없을 겁니다. 형님은 세상을 조금 더 담대하게 볼 필요가 있어요.”

수안도 어제까지는 세상을 담대하게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에서야 조금 더 시야가 넓어진 기분이다.

“…회사에서 괜찮을까요.”

“괜찮고 말고요. 저만 믿으세요.”

수안은 영수와 보조를 맞추며 로비로 들어갔다. 보안 요원들의 무전이 바빠지기 시작했고, 접수대를 지키던 직원들이 발걸음을 빨리해 앞으로 튀어나온다.

“오셨습니까. 부회장님.”

“수고 많습니다.”

“승강기로 안내하겠습니다.”

인사는 접수대 직원들로 끝이 아니다. 출근하던 임원이 수안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오. 정 부사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수안 곁에 있던 영수도 얼떨결에 부사장의 인사를 받아야 했다.

“…….”

‘괜찮긴 뭐가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다고!’

“여긴 알죠?”

안 그래도 불편한데 수안은 몸을 비틀어 부사장에게 임영수를 소개하고 있었다.

“아.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영업 2팀에 괜찮은 직원이 들어왔다고 들었지요. 임영수 사원이라고 기억합니다.”

“하하하. 우리 형님이 회사에서도 인정받고 계셨네. 부사장님이 형님 이름도 기억하는데요?”

아예 대놓고 친족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커컥.”

최소한 모른 척은 할 줄 알았던 매제에게 배신당한 영수는 사레가 들렸다.

“우리 형님 물 좀 마셔야겠다. 생수 있으면 가져와 봐요.”

“네, 네!”

곁에 있던 접수대 직원이 얼른 생수를 가져와서 영수에게 바친다.

‘내가 이걸 마셔야 하니?’

까라락.

뚜껑까지 야무지게 개봉해서 눈앞에 들이밀고 있었다.

“고맙…. 습니다.”

물을 조금 마시고 내리자 얼른 영수의 손에서 물통을 받아 뒤로 감춘다.

“…….”

영수가 살던 세상은 이렇지 않았다.

“형님 잠깐 같이 올라가시죠. 김성우 사장하고 같이 면담 좀 하려고요.”

“저, 저도 가야 합니까?”

“물론이죠.”

영수를 위한 일은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 * *

영수는 강운 그룹 부회장 수안과 함께 승강기에 올랐고, 강운 무역 부사장도 옆에 있었다.

정 사장은 수안의 옆에 선 영수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어제 김 사장님이 본사로 가셨다는 말씀은 들었지요.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어휴. 소식이 빠르시네요. 대단한 결정은 아닙니다. 아예 같이 들어가시죠.”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수안은 자연스럽게 김성우 사장의 집무실로 들어가 상석에 앉았다.

김성우 사장은 오른편에 정이한 부사장은 왼편이었다. 임영수는 부사장 옆자리에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평소엔 감히 한자리에 앉기도 힘든 사장과 부사장이다. 절로 몸이 굳어 바짝 긴장하게 된다.

“어제 김 사장님 말씀 듣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아. 예.”

“형님이 강운가 친족임이 회사에 알려지고 회사에서도 고민이 많으셨겠지요. 김 사장님께 괜한 일로 고민스럽게 했습니다.”

“아휴. 괜찮습니다. 부회장님.”

“……!”

영수는 사장이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 처음 듣는 소식이다.

“임원들을 모아 몇 번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숨기는 것보다 공론화해서 풀어가려 했지요. 하지만 답은 없더군요.”

“그랬겠지요.”

‘임원들이 내 신상을 주제로 회의를 해?’

영업 2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부회장님이 와주셨으니 어떻게든 결론이 나겠구나 싶습니다.”

“대단한 결론은 아닙니다. 오늘 이렇게 같이 온 걸 보면 대충 아시겠지요.”

김성우 사장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예 대외적으로 친족임을 알리고 로열 패밀리의 전철을 밟겠다는 뜻으로 생각했다.

“김 사장님이나 정 부사장님이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

“…….”

직장에선 알아서 하라는 말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다만….”

다만이라는 말도 굉장히 신경 쓰이는 말이다. 알아서 하라는 말에 조건까지 붙기 때문이다.

“평소 친절하게 대해 주는 정도라면 좋겠습니다. 일반 직원과 같은 수준이면 그야말로 최상입니다.”

김 사장은 어쩌라는 말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미 경영진이….”

“위험을 감수하고 인맥을 형성할지,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고 지낼지는 강운 무역 경영진의 선택에 따르겠습니다. 솔직히 제가 형님 매제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그래야 괜히 신경 곤두세우지 않고 회사 생활을 하지 않겠습니까?”

“…….”

“…….”

위험을 감수한다는 표현은 결국 인맥을 불허한다는 뜻이다.

“영수 형님이 제 아내의 오빠라는 이유로 특진을 거듭한다거나 회사 내에 인맥을 쌓고 라인을 만들게 되면 안타까운 일이 생길지 몰라요.”

“…….”

‘이건 경고야. 인맥은 절대로 불허한다는….’

“능력이 아니라 인맥에 기대는 경영진이 강운 그룹에 필요한가요? 괜히 형님께 얼굴 도장 찍으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이대로 끝입니까?”

임영수 사원이 자신의 친인척임을 회사에 드러내 놓고는 더 어려운 주문을 하고 있었다.

“김 사장님이 난감하다는 것은 알겠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겁니다. 이런 사람이 회사에 하나 있다는 것도 나름 회사 경영에 도움이 될지 모르죠.”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대하기 어려운 특별한 사원의 등장이다.

어떤 점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형님 시야에서 보는 직장 생활은 김 사장님이나 제가 보는 시야와 다를 겁니다. 여기저기 불합리한 일이 눈에 보일 수도 있겠죠. 보통 사원이 사장에게 회사에서 발생하는 불합리를 보고할 수 있겠습니까? 이젠 가능한 사원이 있네요? 김 사장님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인맥으로 위에서 끌어 주는 임원이 있어도 관련한 일을 끄집어낼 수 없었다고요.”

수안은 김성우 사장과의 대화 속에서 해답을 찾았다.

“아.”

사장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무형의 라인이라도 임영수의 레이더에는 포착될 것이다.

“잘 써먹어 보세요. 위기는 기회의 다른 말이지 않습니까.”

특별히 대해 줄 필요도 없고 써먹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회사에 만연한 인맥을 걷어낼 기회가 될 수 있는 일이다.

‘써먹기 나름이야. 임원과 부장들이 함부로 하지 못할 사원이니….’

“우리 강운 그룹이 세계 일류로 나가는 방법은 좋은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여기에 올바른 기업 문화를 사내에 정착시키는 것도 병행해야 합니다. 괜히 회장님과 제가 강운 그룹 노조를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직원이 합리적인 기업 문화를 체감할 수 있도록 만들고 이를 정착시키기 위함입니다. 강운 무역에선 임영수 사원의 존재가 그 열쇠가 되길 바랍니다.”

“이해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새로운 기업 문화를 만들 수 있겠습니다.”

수안은 대화가 원활하게 진행된 것에 만족하고 아직 정자세를 유지하는 임영수를 돌아봤다.

“형님. 혹시 법인 차량이나 법인 카드 필요합니까? 여기 김성우 사장님께 부탁만 하면 내주실 것 같던데요?”

“아, 아닙니다.”

김성우 사장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을 보탰다.

“어휴. 제가 헛소리를 했습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푸흐. 김 사장님이 중심 잘 잡으세요. 누가 뭐라고 해도 강운 무역의 최고 경영자는 김성우 사장님이세요.”

김성우 사장에 힘을 실어 주는 수안이다.

“예. 부회장님.”

“앞으로 지켜보겠습니다.”

수안은 김 사장, 정 부사장과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임영수는 그대로 사장실에 남았다.

김성우 사장과 정이한 부사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난 왜 여기 남아 있나….’

하도 긴장해서 등과 어깨가 뻐근할 지경이다.

“임영수 사원.”

“예, 예. 사장님.”

“우리끼리 있을 때는 긴장 풀어. 괜찮아.”

‘말이 쉽지….’

“그래. 사장님 말씀대로 편하게 대화하자고.”

정이한 부사장이 다시 권해 조금이나마 몸을 편하게 하는 척(?)했다.

“예. 부사장님.”

“앞으로 우리와 마주칠 일이 많겠어.”

“제, 제가요?”

“오늘 부회장님과 함께 출근하며 회사 내부에 임 사원의 정보가 퍼져 나갔을 거야. 직원들은 알아서 몸을 사리겠지.”

영수에게도 같은 미래가 그려졌다.

“부회장님 말씀대로 임 사원이 사내 내부 감사역할을 자처할 수 있겠지만, 쉽지 않다는 건 알아.”

그랬다간 누가 자신과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프로젝트 하나를 따내기도 어려울지 모른다.

“예.”

“임 사원도 노조에 가입되어 있지?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얘길 들어 줘. 회사에 도움이 될 것 같으면 기탄없이 내게 와서 얘기해 주면 돼. 자율에 맡기면 아예 안 올 것 같으니 매주 화요일 아침에 티 타임을 갖기로 하지. 이런 스탠스를 취하면 임 사원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직원들이 파악할 수 있을 거야.”

“아….”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줄 테지.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거든. 총수 일가의 친인척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직원들과 동료가 될 수 있어.”

그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것은 본인이다.

이런 생각을 어떻게 읽었는지 김성우 사장은 말을 추가했다.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일이야. 앞으로도 회사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어.”

“예. 사장님.”

* * *

영수는 사장 집무실을 나왔다.

도도함의 대명사로 알고 있던 사장의 여비서는 다소곳이 인사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지금은 여비서의 미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수는 무미건조하게 인사하고 영업 2팀으로 향했다.

‘미리미리 잘해 줬어야 하는데….’

늦어도 한참 늦었다.

“죄송합니다. 일이 생겨서 좀 늦었습니다.”

영업 2팀으로 들어가며 인사하자 부장이 부른다.

“영수 씨. 잠깐 이리로 와 봐.”

“예. 부장님.”

부장은 작은 목소리로 출근길에 있었던 일을 묻는다.

“무슨 일이야? 우리 회사에 부회장님이 왜 오셨어?”

계열사에 부회장님이 직접 오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소문이 왜 이렇게 빨라.’

“저 때문에 잠깐 오셨습니다. 별일 아닙니다. 같이 사장님 뵙고 가셨습니다.”

“진짜 별일 아니야?”

“사실…. 부회장님이 저랑 같이 출근한 것부터가 별일이죠. 저 이제 어떻게 하죠?”

“…어쩌겠어? 영수 씨 여동생이 사모님인 것도 사실이고 부회장님이 영수 씨 매제인 것도 사실인데.”

“…앞으로 회사에서 불합리한 일을 보면 보고하라고 하시네요.”

“사장님이?”

“예.”

“크큭. 이제 다들 몸 사리겠는데?”

“그러라고 시키신 일입니다.”

“오케이. 접수 완료.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놔. 영수 씨는 평소랑 다름없이 일하면 돼.”

“저 괜찮을까요?”

“회사에서 영수 씨가 마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우리 2팀만 신경 써. 나머지는 그냥 잊어버리고. 아직 사원증에 잉크도 안 말랐는데 얼마나 대단한 역할을 바라시겠어?”

영수는 부장의 말에 조금 안심하게 됐다.

‘부장님이 커버해 주신다면 버틸 수 있어!’

“박 차장과 최 과장도 도와줄 거야. 우린 끈끈한 영업 2팀이야.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

‘그래. 난 강운가 사람이 아니라 영업 2팀 임영수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너는 맨날 잘 부탁하냐? 늦었어. 자리로 가서 일이나 해.”

“예!”

힘든 시간이라도 팀원들과 함께라면 버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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