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
김현성은 자리에 앉아서 부동산학 개론을 보고 있는 수용을 집무실로 불러 달라고 했다.
“강수용 씨. 김 사장님이 불러요.”
“예. 차장님.”
전엔 누구도 수용에게 저렇게 말하지 않았다. 김현성이 인턴이라는 회사 내 직급을 정하고 주변에서도 수용 씨로 부르라고 해서 정해진 것이다.
수용이 사장실로 들어와 살짝 긴장하고 서 있자 김현성은 소파로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수용 씨는 앉아 봐.”
“예. 사장님.”
“수용 씨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는 알겠어. 하지만 추가로 일이 생겨 버렸는데 괜찮을까?”
“예. 말씀만 하십시오.”
“회장님 특별 지시 사항이야. 외부에 절대로 알려지면 안 되는 일이고 모든 일은 다른 사람 명의로 시작해야 해. 그래서 이번 일에 수용 씨가 적격이라고 생각했어.”
“…….”
김현성은 수안의 거창한 계획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풀어놓다 보니 자신의 새로운 아이디어도 섞여 들어갔고 중간중간 수용도 거들어 계획이 현실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우아. 이걸 회장님이 계획하셨단 말씀입니까? 역시 사업 머리는 따로 있는 모양입니다.”
“…….”
김현성도 지극히 공감하는 발언이다.
“강수용 씨 이름으로 시작하는 이 사업은 기획단계에서 외부에 알려지면 안 돼. 누구든 떠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이기 때문이라는 건 수용 씨도 잘 알 거야.”
“예. 이번 일은 선점하는 사업자가 유리합니다. 보안을 유지하는 것에 사업의 향방이 달렸습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어. 하지만 시스템만 갖추면 곧장 광고부터 날리고 수면으로 떠 오를 수 있을 거야. 이번 정부가 IT를 육성하고 있으니 모든 가정에 PC가 하나씩 보급되는 날도 머지않았어. 그땐 이 부동산 포털에 사람들이 미어터지도록 방문할 거야. 더블 스타 계열사 알지? 다움과 네이보가 밀어주면 이 사업은 그냥 끝인 거야.”
인터넷 포털을 손에 쥐고 있으니 새로운 사업이 이렇게 쉽다.
“하지만 제 명의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립니다.”
“…….”
“회장님 지시 사항인데 왜 제 명의로 해야 합니까? 이러면 나중에 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차라리 더블 스타 계열의 자회사로 시작하는 편이….”
“그야 회장님이 막냇동생에게 주는 선물이니까.”
“……!!”
자신에게 맡겨 달라 해 놓고서 수용에겐 있는 그대로 사실을 밝 혀버리는 김현성 사장이다.
“회, 회장님이 제게 주신다고요?”
“수용 씨도 잘 알잖아. 회장님이 얼마나 동생을 끔찍하게 아끼시는지. 지금까지 형을 겪어 봤으니 잘 알잖아?”
“…….”
“모르는 척하고 그냥 열심히만 해. 수용 씨가 부동산에 관심을 보인다고 하시니 기분이 좋으신가 봐. 그 자리에서 이 사업을 구상하시고 수용 씨 주겠다고 하셨어.”
그 자리에서 사업을 계획했다는 말보다 형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알 수 있어서 감동적인 순간이다.
‘형은 매번 이러냐…. 아. 진짜…. 내가 뭐가 이쁘다고….’
수용의 눈이 그렁그렁해지자 김현성 사장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괜히 지금 달려가서 회장님 앞에서 울지 말고 하던 공부나 열심히 합시다. 응?”
“큽. 예.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김현성도 지금까지 잘 따라와 줘서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상사의 속마음을 다 보여도 될 만큼 제대로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있는 그대로 설명한 것이다. 김현성의 예상대로 강수용은 들뜨지 않았고, 허황한 마음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바짝 긴장한 사회초년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합시다. 이번 학기엔 대학으로 돌아가지만, 여름방학 시작하면 바로 이쪽으로 출근해서 정직원으로 시작하고 신사업도 진행하고… 알았습니까?”
“예! 사장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인턴이 되겠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마리 새가 둥지를 떠나 날아오르고 있었다.
* * *
수진이는 연애를 시작하고, 수용이는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수현이 있었다. 이미 예전에 둥지를 떠난 새다.
강수현. 그녀는 뉴월드 백화점 홍보팀에 배속되어 있으면서 대외 홍보를 겸하고 있었다. 정진환 사장의 적극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의욕적으로 프로 골퍼들과 후원 계약을 체결, 연계한 마케팅을 진행하고 IMF 위기로 매물이 넘쳐나는 골프장과 호텔 매물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강 팀장님. 더블 스타 비서실에서 전화 왔습니다.”
“응? 더블 스타 비서실이면…. 얼른 연결해 줘요.”
수현은 오빠가 갑자기 무슨 일인지 싶었다.
-바쁘냐?
“아. 오빠. 무슨 일?”
-별일은 아니고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지.
“집에서 보면 되잖아. 회사까지 뭐 하러 전화야?”
-야. 그냥 오빠가 생각나서 전화했다면 “감사합니다.”하고 받아야지 말이야. 머리 좀 컸다고 이제 오빠한테 꼽 주냐?
“풋. 뭐 서운한 일 있었어?”
-수용이가 회사 일에 열중이다. 이제 맘 잡았어.
“와아. 요즘 좀 늦더니 그사이 정신 차린 거야?”
-그래. 정신 바짝 차렸고 이제 자기 일을 하려고 해.
“무슨 일인데?”
-부동산 관련한 일이야. 너도 나중에 호텔 신축 부지 찾으려거든 녀석한테 가서 부탁해.
“푸흐흐. 수용이랑 잘 맞겠다. 돌아다닐 때는 빨빨거리면서 다니고 놀 때는 죽치고 앉아서 놀 수도 있고. 중간에 중개만 잘하면 따박따박 돈이 들어오잖아.”
-넌 뭐 없어?
뜬금없는 질문이라 질문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내가 뭐 도와줄 거 없냐고. 부탁이든 뭐든 말해 봐.
동생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자 괜히 수현에게 연락해 도와줄 일이 있는지 묻는 수안이다.
“내가 애야? 맨날 오빠한테 손 벌리면 어쩌라고?”
-너도 다 컸다 이거냐?
“이제 오빠 둘째도 태어나.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해. 오빠 애나 잘 키우셔.”
-…얘는 맨날 맞는 말만 해.
그리고 수현은 최근 있었던 서운한 일을 기억해 냈다. 오빠가 미국에서 파티에 참석하고 나온 기사를 본 수현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었다.
“그리고!! 미국에 그런 파티가 있으면 말을 했어야지! 어? 마누라랑 아들만 데리고 가는 게 어딨어? 나도 디카프리오랑 사진도 찍고 얘기도 하고 싶었다고!”
-내가 파티 얘기 안 했어? 얘기했잖아. 싫다며?
“그건….”
수안이 얘길 안 한 것이 아니다. 분명 파티에 가자고 얘기했었다.
다만 수현은 경제인 모임 파티처럼 따분한 파티로만 짐작하고 있었을 뿐이다.
“미국에서 타이타닉 때문에 열리는 대단한 파티라고 정확하게 말을 했어야지. 이번엔 수진 언니랑 엄마랑 나까지 아주 서운했어.”
-마누라가 어머니한테도 얘기하고 수진이한테도 얘기하고 너한테도 다 얘기했는데 다 싫다고 했다던데? 바쁘다고 파티 싫다고 했다며? 그럼 두 번이나 권했는데 싫다고 한 거잖아.
어머니와 수진이도 다르지 않았다. 아현이 드레스 디자이너를 추천받으며 같이 가실 생각 있냐고 물었지만, 말을 제대로 꺼내기도 전에 싫다고 하는 바람에 그다음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고 한다.
“에잇! 다음엔 세 번 얘기하란 말이야.”
-오케이. 알았어. 세 번 얘기할게. 마지막 세 번째는 정원이가 하면 되겠네.
“세 번이고 뭐고 그런 파티에 날 빼먹다니! 디카프리오!!”
-…디카프리오 한국으로 불러? 내한하라고 할까?
“……!!!”
-요즘 바빠서 힘들지도 모르지만….
바빠도 투자자가 오라면 와야지 어쩌겠는가. 한국에서 인기가 높으니 방한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돼, 됐어. 바쁜 사람 뭐 하러 오라 가라 해? 오빠 힘들어.”
-내가?
“아니. 디카프리오 오빠 말이야.”
-…그 사람이랑 너랑 동갑이거든? 무슨 오빠야?
녀석의 나이도 스물다섯, 수현의 나이도 스물다섯이다. 그리고 녀석은 나중에 나이를 먹고서도 스물다섯 이하 모델 아니면 상종도 안 하던 녀석이다.
“한번 오빠는 영원한 오빠거든요?”
-…됐다. 끊자. 괜히 전화했다.
수현은 전화를 내려놓으며 주변에 모여든 홍보팀 직원들의 반짝이는 눈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 뭐야?”
“팀장님.”
“왜?”
“레오 오빠가… 내한합니까?”
“내한은 무슨…. 오지 말라고 한 말 못 들었어?”
“하셨어야죠! 내한하라고 하셨어야죠!”
“다들 뭐 해? 쟤 끌어내!”
“레오 오빠! 한국으로 와줘요!”
눈이 뒤집힌 여직원을 끌어냈지만, 아직 남은 직원들이 있었다.
‘남직원은 왜?’
남직원도 있어서 의아했다.
“케이트는 언제….”
“쟤도 끌어내!”
“내한하라고 하셨어야죠!! 내 사랑 케이트으으!!”
직원들이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근처에 자리한 팀원이 말을 걸었다.
“팀장님….”
“…너도 끌어내 주랴?”
“아, 아닙니다. 둘이 내한하고 우리 호텔에 묵었으면 홍보 효과가 상당했을 텐데…. 하는 혼잣말입니다.”
“……!!!”
‘멍청이! 왜 생각을 못 했어?’
수현은 얼른 수화기를 들어 더블 스타로 전화했다.
-더블 스타 비서실입니다.
“뉴월드 호텔 강수현입니다. 오빠 바꿔 줘요.”
-죄송합니다. 방금 퇴근하셨습니다.
“아오! 알았어요.”
수현은 다시 휴대 전화로 전화를 걸었지만, 오빠의 반응은 냉담했다.
-야. 걔는 스물다섯 이하 여자 모델만 만나거든? 걔가 너를 볼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요즘 바빠서 오라고 해도 못 오니까 다시 이런 일로 전화하지 마라. 오케이?
뚝.
“아~ 씨. 화났나 본데?”
집에 가서 얘기해야 하게 생겼다.
* * *
“오라방. 내가 부탁 좀 하자. 안 그래도 부탁할 일 있냐고 물었잖아! 두 사람 꼭 내한하게 해 줘.”
“…오호라. 팬심이 자존심을 눌렀다 이거냐?”
“그게 아니라 호텔 홍보가 달린 일이라고! 지금 국내에서 타이타닉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 완전 신드롬이잖아. 두 주인공이 내한해서 우리 호텔에 묵으면 홍보 효과가 엄청나다고.”
수안은 동생의 말에 뚱한 표정으로 답했다.
“…부르면 고려 호텔로 부르지 왜 뉴월드로 불러?”
“뭐?!”
“마누라 호텔이 멀쩡한데 왜 뉴월드 호텔에 걔들을 재우냐고.”
아현이 고려 호텔에 적을 두고 있진 않지만, 소유한 것은 분명했다.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고려 호텔에 우선권이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부르는 유명인사가 아닌가.
“됐어! 부르지 마!”
“크흐흐. 불러서 고려 호텔에 재워야겠다.”
“됐다고!”
“알려 줘서 고맙다. 덕분에 고려 호텔 가치가 더 올라가겠어.”
“아악! 갈 거야!”
* * *
다음 날 수현은 여전히 불퉁한 얼굴로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미국에 가 있는 우리 골퍼 지원은 누가 담당이야?”
“박 대리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 시작하잖아! 왜 보고가 안 올라오는데?”
수현의 뾰족한 목소리가 사무실에 퍼진다.
“관련 보고 준비 중이라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먼저 챙겨야지! 그래서 박 선수가 타지로 나가 본 실력을 못 내는 거라고! 미국으로 날아가서라도 물어보고 오라고 해!”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팀원들이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팀장님 완전 저기압인데?”
“어제 괜히 장난쳤나 봐.”
남현우 차장도 멀리서 강수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오늘은 강 팀장 근처에 가지 말아야겠다.’
수현의 기분은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180도로 변했다.
“정말? 우리 호텔로 보내 줄 거야?”
-화난다고 아침에 정원이 얼굴도 안 보고 가는 게 어딨어? 정원이가 예쁜 고모는 이제 자길 사랑하지 않는다면서 서운해하더라.
“히잉. 미안해서 어쩌지? 내가 퇴근길에 장난감 사서 간다고 해 줘.”
-장난감 많으니까 더 사 오지 마!
“내 맘이야. 어쨌든 둘은 얼른 입국하라고 해. 제대로 준비해 둘 테니까. 고마워 오빠.”
전화를 마친 수현이 화장실에 갔다가 들어오는 박 대리를 불렀다.
“박 대리.”
“예…. 팀장님.”
이미 사무실로 들어오기 전에 팀장의 기분이 나쁘다는 소식을 전해 들어 살짝 긴장한 얼굴이다.
“LPGA 챔피언십 지원은 잘되고 있어?”
하지만 팀장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아. 예. 이번엔 느낌이 좋습니다. 박 선수가 자신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적응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후 US 여자 오픈도 미리 대비하고 있습니다.”
“좋아. 지원할 일이 있으면 보고하느라 시간 뺏기지 말고 지원부터 시작해. 보고는 이후에 해도 되니까.”
“…예.”
“혜리 씨!”
“예! 팀장님.”
“레오 오빠 온단다.”
“꺄읍!”
어제 끌려나갔던 김혜리 사원이 입을 틀어막고 좋아했다.
“최 주임.”
“흐흐흐. 예.”
“케이트도 같이 올 거야.”
“으하하하하. 감사합니다. 팀장님!”
“제대로 의전 준비해서 미비한 부분이 없도록 해. 호텔 서비스에 감동해서 또 찾아오도록 만들라는 말이야!”
““예! 팀장님.””
팀장의 기분이 다시 원래대로 복귀하자 팀 분위기도 살아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