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
수안의 말에 스티브는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다시 체감할 수 있었다.
‘BE 인베스트먼트라면 적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넉넉하게 3억 달러를 투자하겠습니다. 애플 지분이나 새로 발행해서 적당하게 챙겨 주시죠. 그래야 금융 비용이 발생하지 않을 테니까요. 물론 당신은 임시 CEO라 결정 권한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주주들에게 의사를 물어보고 결정해서 월스트리트에 있는 BE 인베스트먼트 본사에 전달해 주세요. BE의 최고 경영자가 즉시 3억 달러 투자를 승인, 송금할 겁니다.”
“하….”
스티브는 허탈한 마음을 숨기기 힘들었다.
‘내가 얼마나 마음을 졸이면서 투자금을 올렸는데….’
본래 1억 5천만 달러가 필요했지만, 마지막 논의로 1천만 달러를 올려서 불렀다. 하지만 3억 달러도 의미 없는 숫자였다. 이어진 수안의 말 때문이다.
“더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최대 10억 달러까지 투자할 의향이 있습니다.”
“흡!”
“당신이 회사를 믿는 것처럼 나도 당신을 믿어요. 스티브. 난 당신이 뛰어난 개발자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이사회를 소집하고 논의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죠. 다음에 또 봅시다. 스티브.”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스테판 회장. 당신은 애플의 진정한 은인입니다.”
“다음엔 경쟁자로 만날지도 몰라요. 나도 컴퓨터 회사를 포함해 여러 IT 계열사를 갖고 있거든요.”
“하하하. 새로 나올 우리 컴퓨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올 8월 애플에서 1세대 iMAC이 출시된다. 신선한 디자인과 성능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이고 성공의 첫 작품이 되는 iMAC이다.
하지만 수안이 생각한 경쟁은 컴퓨터가 아니라 스마트폰에 관한 것이다.
‘스마트폰은 내가 더 빠를 겁니다. 스티브.’
디자인과 성능 그 어떤 면에서도 애플이 따를 수 없는 스마트폰이 준비 중이다. 모든 청사진은 수안에 의해서 계획되었고, 팬탁의 박병우 사장이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다. 몇 년 후엔 누구나 팬탁의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다닐 것이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스티브. 배 사장 이제 LA로 돌아가자. 가서 푹 자야겠어.”
“비행기에서라도 주무셨어야죠.”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봐. 잠이 안 오더라고.”
“승무원이 준 커피 초콜릿도 많이 드셨어요.”
“아. 그랬나? 그게 문제였나 봐. 평소엔 커피 마셔도 잘만 잤는데 말이지….”
3억 달러 투자를 결정하고 그 이상도 가능하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서 사무실을 나가고 있었다.
‘나도 저런 여유를 갖고 싶다…. 회사에 여유 자금이 필요해. ’
본래 스티브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에게 굴욕적으로 손을 벌리고 이후 회사에 사내 유보금을 강박적으로 쌓는다. 하지만 이번엔 수안의 여유로움에 부러움을 느껴 사내 유보금을 쌓게 생겼다.
“아! 스티브!”
문을 거의 나섰던 수안이 돌아서서 스티브를 불렀다.
“스테판 회장. 잊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대신 조건 하나만 걸겠습니다. 막 자고 일어나서 깜빡했네요.”
“…….”
‘역시 뭔가 있었던 거야.’
의심스러운 표정을 보이는 스티브에게 수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조건을 붙였다.
“앞으로 당신은 매년 1회 정밀 종합 건강검진을 받고 그 결과를 BE 인베스트먼트에 보내세요.”
“뭐라고요?”
“내가 당신을 믿고 이 투자를 집행하는데, 당신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큰일 아니겠습니까. 물론 비용은 BE 인베스트먼트에서 부담합니다. 올해는 6개월 이내에 검진받는 걸로 합시다.”
“하!”
“이 외에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굿럭! 스티브.”
* * *
수안은 한국에 돌아와 기화 차 입찰에 관한 사전 협의 결과를 보고받고 있었다.
“…해서 기화 자동차 총부채 중 9조 5천억 원을 탕감하겠다고 했습니다.”
“좋네. 그 정도면 협상 잘한 거야.”
“그럼 3차 입찰은 BE 인베스트먼트에서 따내도록 하겠습니다.”
수안에게 보고하는 사람은 이방효 사장이 제시카 대신에 보낸 사람으로 한국어가 능숙한 외국인이다. 먼저 한국에 들어와 정부와 협상을 이어 갔고 그 결과가 오늘 수안에게 전해진 것이다.
“빌리.”
“예. 회장님.”
빌리는 평소 이방효 사장과 한국에도 몇 번 함께 와서 결산보고를 했었기에 수안도 눈에 익은 직원이다. 빌리라면 수안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미국인임에도 한국적 사회생활에 물든 빌리는 이방효 사장과 수안의 관심을 받는 직원이다. 앞으로 미국에서 진행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될 인재라고 할 수 있었고, 이방효 사장 다음을 맡길 충분한 역량을 갖고 있었다.
“앞으로 BE 한국지사에서 일해 보는 건 어때?”
예전에도 한국에서 지내고 싶다고 말하던 직원이라 물어본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 큰일을 맡길 사람이라 우선 한국에 정을 붙여 놓고 싶었다.
“하하. 저도 이 사장님께 계속 청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럼 내가 이방효 사장에게 한번 말해 볼게. 어차피 BE의 대리인이면 앞으로 기화 차 관련해서 자주 얼굴을 비춰야 할 거야. 욕도 많이 먹겠지만, 초반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감사합니다. 회장님.”
“내가 더 감사하지. 앞으로 기화 자동차를 잘 부탁해.”
“회장님 지시대로 따르겠습니다.”
믿음직한 대답만큼 앞으로도 계속 신뢰를 쌓고 오래 머물러 줬으면 싶은 마음이다.
빌리를 보내고 수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처리하려고 집무실 책상에 앉았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집무실 전화를 노려보길 한참.
결국은 전화를 들어 익숙한 내선 번호를 눌렀다.
-예. 회장님.
“김 사장. 잠깐 내 자리로 와.”
-예. 금방 가겠습니다. …강수용 씨!
“수용이 빼고 혼자.”
김 사장이 요즘 항상 수용을 데리고 다녀버릇해서 곁에 있던 수용을 불렀지만, 수안은 수용이 없는 곳에서 김현성 사장을 보고 싶었다.
-아. 예. 회장님. …쉬면서 하라고 불렀지. 미안. 미안.
김현성 사장은 항상 함께 다니던 수용을 남겨두고 혼자 수안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예. 회장님.”
“앉아 봐.”
수안은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간섭으로 느껴지지 않을지 고민하다가 첫 마디를 뱉어냈다.
“수용이 시켜보니 어때? 계속 시켜? 아니면 내보낼까?”
최대한 자신이 동생에게 무관심한 것처럼 포장하고 싶었다.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회장님 의중을 저만큼 읽는 사람은 배영성 사장이 유일합니다. 회장님이 동생들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실패네.’
수용의 이름을 꺼낸 순간부터 글러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에효. 요즘도 집에 늦게 보내?”
“미국에 가신 동안 조금 일찍 들여보냈습니다. 아직 배울 일이 많습니다.”
“너무 막 굴리는 거 아냐? 애가 맨날 축 늘어져서 집에 온다고.”
“체력부족입니다. 제로에서 시작하는 체력이라 그런 것뿐이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체력 올라오면 생생하게 퇴근할 겁니다.”
“계속 시키겠다고? 수용이가 버티겠어?”
“하하. 도련님이 생각보다 이쪽에 흥미를 갖고 계시더군요.”
“부동산에?”
“예전부터 아파트에 투자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긴 했어. 수진이랑 수현이는 명품 쇼핑에 다 써 버려도 녀석은 아파트를 사서 챙겨놨다고 들었지.”
“물론 당시는 부동산을 보는 안목이 없으니 사람들이 제일 몰리는 아파트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신의 한 수였죠. 가장 핫한 지역에 상당한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녀석이 부동산 사업을 하겠다고 해?”
“예. 이제야 전문적인 지식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은 부동산 관련 법률과 경매에 관한 부분을 배우고 있고, 조만간 공인 중개사 자격도 준비하겠다고 했습니다.”
“허! 진심이잖아? 공부는 죽어라 싫어하던 놈이….”
공부는 강제적으로 시키지 않으면 안 하던 놈이다. 그런 놈이 스스로 뭔가를 시작했다면 진심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회장님이 그토록 찾던 수용 도련님의 관심 분야를 이제야 찾은 거지요. 축하드립니다.”
“…….”
이제 막내 수용이까지 관심 분야를 찾았으니 이제 뒤에서 응원만 해 주면 되는 일이지만, 수안은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김현성은 수안의 표정만으로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다.
“본래 어린 새들은 둥지보다 자신의 몸이 커지기 전에 둥지를 떠나 날아오릅니다. 이제 놔주셔야 합니다. 회장님.”
“그래…. 내 품에 항상 보호할 수는 없지. 당연한 일이고 뻔히 그려지던 일인데 괜히 마음이 허전하네.”
언제까지고 아이로만 보이던 동생들이다. 자신은 반백 년을 살고 다시 시작한 사람이니 지금도 20대에 불과한 동생들이 어리게만 보인 것이다.
대학교 4학년이면 충분히 자신만의 미래를 생각할 나이였다. 수진과 수현만 해도 그즈음에 자신들의 미래를 계획하고 실천했다.
“수용이는 지금 뭐 해?”
“사무실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번 대학교 복학하면서 부동산 관련 강의를 신청했다고 들었습니다.”
‘제대로 파고들고 있구나.’
“같이 밥이나 먹게 오라고 해. 맛있는 저녁이나 사줘야겠다.”
“너무 많은 지원을 약속하진 마십시오. 스스로 헤쳐나갈 기회를 줘야 더 단단하게 성장하는 법입니다. 도움은 폭풍과 비바람에 무너졌을 때 주셔도 충분합니다.”
김현성 사장의 예측에 틀린 것이 없었다. 자신은 수용이 기특해서 뭐든 퍼 주고 싶을 것이다.
“…김 사장 말이 맞네. 괜한 헛바람 들지 않게 내가 만나진 말아야겠다. 난 괜한 소리를 할 것 같아.”
“다행….”
“그래도 도움을 주려면 미리 준비는 해야겠지?”
“네?”
김현성은 수안의 동생 사랑을 너무 안일하게 단정했다.
“전국 부동산 중개업자들 파악하고 그들과 연계할 시스템을 개발해야 해. 인터넷을 통해 검색하면 어느 지역이든 빈방을 찾을 수 있도록. 아파트, 단독 주택, 다세대 주택, 상가, 원룸, 사무실, 오피스텔, 빌딩, 토지까지 가리지 말고 전부! 매매, 전세, 월세까지 한눈에 검색할 수 있어야 해. 당연히 실제 매물의 사진까지 올라와 있어야겠지. 마지막 사진엔 휴대폰을 들고 사진 찍어야 해. 사진 찍은 날짜까지 보이게 만들면 다른 곳에 써먹지 못하잖아. 아니면 특수한 워터마크를 넣어서 다른 업체에서 도용할 수 없도록 만들어도 되지.”
“어, 어.”
갑자기 시작된 수안의 사업 계획이다.
“이름이야 직방이든 다방이든 김 사장 마음대로 해도 돼. 우선은 기반을 마련하고 나중에 녀석이 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면 되니까. 전국 부동산 포탈! 처음엔 부동산 중개로 시작하겠지만, 나중엔 인테리어 업체나 가구 업체와 조인할 수도 있겠지. 전국의 부동산 중개업자들에게 2차 중개를 하면서 수수료를 받으면 그 규모가 얼마나 되겠어? 물론 중개 규모가 크면 본사 공인 중개사를 파견해서 직접 수수료를 먹고 말이야. 수익 구조가 아주 확실하지 않아?”
“……!!!”
잠깐 사이에 나온 계획이라고 하기엔 너무 상세하고 확실하다. 당연히 미래에 존재하는 사업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김 사장이 수용이에게 가서 운을 띄워 봐. 녀석이 사업 계획서 들고 내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하. 하하하. 회장님. 전 회장님 뇌 구조가 항상 궁금했어요. 어떻게 이런 사업 계획이 그냥 튀어나옵니까?”
“김 사장. 나 해부하고 싶어? 가서 어떻게 하면 수용이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나 생각해.”
“걱정하시지 않도록 제가 잘 전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