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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당선인 (122/304)

아직은 당선인

수안은 충분히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느긋하게 김대준 당선인이 기다리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건물로 향했다.

김일삼 정부까지 고작 91명이었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이번에 역대 최고 인원인 208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엔 강운 그룹의 입김이 들어간 인사도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수안을 마중 나온 인물 중에 아는 얼굴이 몇 보였다. 눈만 마주치며 인사하고 가장 중요한 인물에게 집중했다.

“어서 오시게. 강 부회장.”

“안녕하십니까. 대통령님.”

“아직 청와대 입성 전이야. 지금은 당선인 신분일세.”

“청와대에 앉은 사람은 자리만 차지하고 있지요. 얼른 비켜 달라고 하십시오.”

“하하. 안으로 들어가세.”

“예.”

김대준 당선인은 미국에서의 일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 미국에선 클린턴 대통령이 뭐라던가.”

“제가 꼼수로 달러를 입금해서 상당히 날이 서 있었습니다.”

“그랬겠지. 한국에선 애국자라도 미국에선 배신자나 다름없었을 거야.”

“덕분에 돈 좀 쓰고 왔습니다. 그리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왔죠.”

스캔들을 막아주며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돈을 썼지만, 쓰긴 썼다.

“…자네에게 그런 수고까지 끼치다니 민망하네. 자네 덕분에 내가 얼마나 안심인지 모를 거야.”

“대한민국에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오히려 제가 기쁩니다.”

“그럼 IMF와의 협의는 어찌 되겠는가.”

“로버트 재무부 장관이 캉드쉬 총재에게 따로 연락했을 겁니다. 협상 조건에 조정이 있을 겁니다.”

“그거 다행이로군!”

“그나저나 기화 자동차 입찰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는 모양이더군요.”

“알아보니 분식 회계 규모가 상당해. 기화 그룹 회장은 징역형을 면치 못할 것이네.”

가진 돈이 없는 기화 그룹 회장이다. 기화 그룹에 가진 지분도 고작 1%밖에 되지 않는다.

법적으로 어떤 처분이 내려져도 돈이 나올 구석은 없었다.

“자본금 감자를 90%만 진행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더군요. 남기지 마시고 100% 감자로 진행해 주십시오. 부도 이전에 기화 자동차 직원들이 가진 14% 지분으로 1%를 가진 회장과 야합해서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지분을 남겨둘 수는 없습니다. 아니면 그들이 정치권에 끼치려던 영향력이 정말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저들에게 작은 지분도 남겨 줄 필요 없었다. 100%를 감자하고 새로 시작해야 했다.

“…알겠네.”

“그리고 12조 원에 육박하는 기화 자동차 부채는 어디까지 탕감을 약속하실 수 있겠습니까.”

부채 탕감 없이는 인수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고,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가 입찰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부분은 채권단과 합의가 필요한 일이네.”

“어차피 종금사도 다 쳐내야 할 것이고, 부실한 은행도 이번에 다 잘려 나갈 겁니다. 부실을 제때 떨어내지 못하면 입찰이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부채와 함께 채권단 일부를 쳐내면 부채 탕감 규모를 늘릴 수 있었다.

“…….”

부채 탕감 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기화 자동차 인수는 없었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협박이기도 했다.

“대현 자동차 정영수 회장과도 따로 만났는데, 기화 자동차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습니다. 해외 자동차 회사도 3조 원 이상의 부채를 떠안지 않을 겁니다.”

“9조 원이나 되는 부채를 채권단이 떠안으란 말인가?”

“제가 외국 자본과 같은 위치에 있습니까?”

지금까지 해 준 것이 있는데, 외국 자본과 똑같은 대우를 감내해야 하냐는 질문이다. 그리고 9조 원의 부채 탕감도 부족하다는 주장이기도 했다.

“그냥 포드에 팔아 주셔도 됩니다. 기화 자동차가 아니면 쌍륭 자동차도 있고 조만간 워크아웃으로 갈 삼디 자동차도 있습니다. 거대한 부채를 가진 기화에서 저희가 손을 떼는 것이 위험을 회피할 방편이 될 수도 있겠죠. 대통령께서 배려해 주신다면 저는 손을 떼도록 하겠습니다.”

“…기화 자동차 채권자 대표인 산업 은행장을 만나 보겠네.”

“부탁드립니다. 저도 국내 완성차 시장이 해외에 잠식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9조 이상의 부채 탕감을 노력해 보지.”

수안은 당연한 대답에 의미를 두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대운 그룹 조사가 진행 중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다가 총수를 놓치겠어요.”

“조만간 소환 조사가 이뤄진다 들었네.”

“김 회장은 벌써 국외에 있을지도 모르죠. 기업인들이 검찰에 선을 대는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직 출국 금지도 안 했다면 늦었습니다.”

“흠….”

대운 그룹 회장은 눈치가 비상한 사람이다. 자신을 향한 칼날이 들이닥치기 전에 도피를 감행할 사람이었다.

“만약 김 회장이 벌써 출국했다면, 국민에게 현 정부가 무능력하다는 실망감을 줄지도 모릅니다. 청와대 입성 전에 허물은 김일삼 대통령에게 넘겨주십시오. 대통령께서 대운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뉘앙스만 풍기시면 됩니다.”

대운 그룹 김 회장의 신변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지만, 그 책임이 이번 정부로 넘어와선 안 된다. 대운 그룹은 김 회장이 국내에 없어도 분해될 예정이다.

“알겠네. 내가 기화에 신경 쓰느라 대운을 놓치고 있었어.”

“저는 이번에 들여온 자금으로 국내 부도 기업들을 다시 일으키겠습니다.”

“부탁함세. 지금 믿을 수 있는 곳은 강운 그룹밖에 없네.”

“성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 * *

수안의 예상대로 대운 그룹 김 회장은 해외로 출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빨을 갈고 있었다.

“으득. 감히 내 회사를….”

지금까지 깔아 둔 정계 라인과 검찰 라인으로도 대운 그룹의 세무조사와 검찰 조사를 막을 수 없었다. 사전에 출국 금지가 내려질 거라는 정보를 얻은 것이 전부였다.

“내가 이대로 무너질 것 같은가? 꼭 돌아오고야 만다. 대운 그룹은 다시 일어설 거야!”

그가 돌아왔을 때의 대한민국은 예전과 달라져 있을 것이다.

대운 그룹은 훗날 검찰 조사로 40조 원이 넘는 분식 회계 규모가 밝혀지는 기업이다. 김 회장이 경리담당 임원에 주문했다는 내용만 봐도 얼마나 도덕적 해이가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허위로 부풀릴 수 있는 최대 금액이 얼마인지 계산하라.”라고 했다 하니 더 알아볼 필요도 없다. 대운 그룹은 이번 IMF 금융 위기에서 절대로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모든 계열사가 낱낱이 해체되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 * *

수안은 강운 그룹 사옥에서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다.

“다들 바쁘신 거 알면서 이렇게 또 모셨습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강운모 회장이 없는 사장단 회의가 오히려 익숙하게 느껴지는 사장단이다.

“제과는 이번에 해태 제과를 흡수하고 있죠?”

“예. 부회장님.”

“그리고 제과에서 올해 임원 승진 대상자들이 있을 겁니다.”

“네? 아. 예. 있습니다.”

해태 제과 흡수 얘길 하다가 갑자기 임원 승진자 얘기가 나와 놀랐지만, 얼른 긍정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수안은 해태 제과의 예를 들어 사장단에게 설명하려고 말을 꺼낸 참이다.

“회사의 조직 구조는 피라미드. 능력이 뛰어난 임직원만이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살아남게 되지요. 하지만 우리 강운 그룹의 직원들이 어디 가서 능력 없다는 소리 들을 사람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 하지만 승진에서 누락 되면 대부분 짐을 싸서 나갑니다. 동기나 후배가 승진하면 자신이 도태되었다고 생각하니까요.”

승진에서 밀린 것만으로 회사에서 자신을 내쳤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국내는 위기 상황이지만, 우리 강운 그룹은 양적 팽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수하는 기업들 대부분은 도덕적 해이가 만연한 경영자들이 꼭대기에 있었지요. 그들까지 우리가 끌고 갈 필요는 없습니다. 당연히 내쳐야죠.”

“오….”

“아….”

사장단은 수안의 입에서 나올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승진에서 누락되었으니 강운 그룹 핵심까지는 힘들지 몰라요. 하지만 그들은 능력 있는 강운 그룹 직원입니다. 제과 사장님은 새로 인수할 해태 제과에 우리 강운 직원들을 이동시키세요. 좋은 기회라고 여겨지신다면 사장님 직속 라인을 승진에서 누락시키고 보내셔도 좋겠습니다. 어차피 다시 강운 그룹으로 들어오는 일입니다. 그래야 인수한 회사가 말썽 없이 강운 그룹 품으로 들어옵니다.”

“아! 좋은 생각이십니다. 안정적으로 일하던 직원들을 외부로 보내면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승진 누락자라면 군말 없이 이동할 겁니다. 최적의 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인수할 기업들 면면을 생각하면 저희가 가도 좋겠습니다. 우리 중에도 이제 은퇴할 나이가 된 임원들이 꽤 됩니다.”

강운 그룹 계열사 사장으로 일하지만, 사장 자리도 기한이 있다. 훗날 총수가 될 수도 없는 일이니 다른 사장 자리를 꿰찰 수 있다면 스스로에게도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 앞날이 구만리 같은 분들이 벌써 엄살을 부리십니까? 저는 놔드릴 생각 없으니 자리 지키세요. 지팡이 들고 회의 나오셔도 뭐라고 안 하겠습니다.”

“하하하.”

마음에 없는 말은 아니었지만, 붙잡아 주는 수안의 말이 듣기 좋을 수밖에 없다.

누구보다 강운 그룹에 애정이 많은 사장단이다.

“은퇴하실 때 적당한 자회사 하나씩은 받아 가셔야죠. 사장 자리에 만족하지 마시고 계시는 동안 회사 자금으로 신사업을 일으키세요. 그리고 그 소유를 강운과 일부 나누고 오너가 되십시오. 강운 그룹 사장으로 퇴직하시는데 그 정도 퇴직금은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

“……!!”

수안의 말에 눈을 빛내는 사장단이다. 그 어떤 오너가 사장단의 노후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챙겨 줄 수 있겠는가.

실제 대기업 사장으로 퇴직하면 훗날을 위해 거래처에 많은 혜택을 제공하고 뒷돈을 받아 챙길 준비를 한다. 하지만 수안의 말대로 대놓고 신사업을 일으키고 지분을 나눠 가지면 거래처에 헛돈 쓰지 않고 노후를 준비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질 회사라면 이 능력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더 노력할 것인가. 누구도 손해 보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수안의 방식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아니니까 퇴직은 머리에서 지우시고! 승진 대상자들과 미리 얘기해 두십시오. 임원, 부장 승진에서 제외된 고위 직급을 인수할 회사 본부장급 임원으로 보낼 겁니다. 그 이하의 승진 누락자도 마찬가지로 인수할 회사로 보낼 겁니다. 인수 회사를 정상화할 실무자도 필요할 테니까요. 대신, 실제 인사 고과 점수가 낮아 떨어진 사람은 제외합시다.”

수안은 피인수 기업의 빠른 정상화를 위해 강운 그룹 직원을 파견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절묘하다. 승진 누락자를 대상으로 진행한다면 불협화음을 최소화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인원은 외부에 구조 조정으로 인한 퇴직자로 보이게 만드세요. 그렇게 해야 우리도 여타 다른 대기업처럼 IMF의 구조 조정 요구를 따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실제 퇴직은 인수한 회사들에서 나올 터였다. 면밀한 검토 과정을 거쳐 경영진과 무능력한 직원들을 내보내면 강운 그룹에서 지원하는 자금으로 성장할 일만 남는다.

“한 번에 몇 마리 토끼를 노리십니까?”

“하하하. 그런데도 부회장님은 다 잡으시는 것 같은데 무슨 걱정입니까.”

“부회장님이 다 지시하시면 우리 할 일이 없어서 그렇지요. 부회장님 능력이 좋은 것도 걱정입니다. 그려. 허허허.”

강운 그룹 인재들을 그대로 흡수하고 IMF 요구에도 따라 주며, 인수한 회사의 정상 운영까지 단번에 해결하는 수였다.

여기에 강운 그룹 내에서 발생할 승진 인사에 대한 불만까지 잠재우고 있었다.

“우리 강운 그룹 직원들도 업무 효율을 위해 제안 제도를 활용하지 않습니까. 부회장인 저도 효율을 생각해야죠. 사장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면서 효율을 기억하십시오. 저보다 오래 회사에 계셨으니 충분히 가능하실 겁니다. 앞으로 신사업 일으키고 경영하시려면 미리부터 연습하시는 편이 좋겠지요?”

“아이쿠. 저희를 조련하는 방책도 이번 일에 포함되어 있었군요!”

“앓는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다른 회사는 다 죽어가는 와중에 우린 혼자 달리고 있습니다. 경쟁자가 없어도 안심하면 안 됩니다. 우리 뒤에 추격자가 바짝 쫓아왔다고 여기고 더 힘차게 달리세요.”

“예! 부회장님.”

본래라면 대운 그룹 김 회장이 낙관적인 미래 예측을 통해 공격적인 투자를 진행하고 강운 그룹과 같은 행보를 보였겠으나, 이미 대운 그룹은 검찰과 국세청의 양동작전으로 부도 위기를 맞고 있었다.

회사 운영이 어려워 십시일반 도와주기를 바라는 광고를 내는 회사도 있었고, 그런 도움을 기대하기도 전에 부도를 막지 못하는 기업도 많았다. 서울에 1,226업체, 지방에 2,097업체로 1998년 1월 단 한 달 동안 3천 개가 넘는 부도 업체가 발생한다. 하루 평균 150개 업체가 부도를 낸 것이다.

강운 그룹과 더블 스타, 펜타그램은 그런 회사들을 찾아다니며 평가하고 구제하는 역할을 맡아 진행하고 있었다. 수안의 말대로 강운 그룹 홀로 국내 시장을 휘젓고 있다.

“회의 끝입니다. 빨리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지금도 무너지는 회사가 한둘이 아닙니다!”

“예, 예.”

여유롭게 서로 인사나 나눌 시간이 없다. 지금은 모든 임직원이 뛰어다녀야 했다.

“아! 그리고 나가시면서 미국에서 가져온 선물 하나씩 받아 가세요. 세관 눈을 피해서 겨우 들고 들어왔으니까 아껴 드시고요.”

바이오 애보트에서 출시한 시알리스를 수안과 함께 출발한 직원들이 나눠 들고 비행기로 공수했다. 그 물건이 복도에 준비되어 있었다.

“어억! 이건!”

“이게 뭔데 그래?”

“이 물건도 몰라? 그거 있잖아! 그거!”

지금은 차마 자세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른 사장들은 헛기침을 뱉으며 약통을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허흠.”

“조용히 가져가. 설명은 나중에 듣고.”

수안이 복도로 나와 경고했다.

“두 통 가져가면 뒷사람은 물건이 없어요. 하나씩만 가져가세요.”

“큼.”

두 개를 챙겼던 사장 하나가 얼른 한 통을 내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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