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IMF START (112/304)

IMF START

폭풍 같은 시간이 흘러간 장소엔 말 없는 부자(父子)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정영수 회장의 눈에 독기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수안 앞에서는 차마 보일 수 없었던 분노였다.

고개를 들어 아들의 눈을 본 정택주 회장이 경고했다.

“너…. 강운 그룹에 함부로 덤비지 마라.”

“아버지! 저걸 저대로 놔두란 말입니까?”

“오늘 보여 준 힘을 보고도 모르겠어?”

“씨티 은행 말입니까? 씨티 은행 고위 관계자와 인맥이라도 있나 보죠. 올림픽에서 스타가 됐으니 그 정도 인맥이야 얼마든지….”

“오늘 같은 일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람은 씨티 그룹 니콜라 회장밖에 없어.”

“……!”

“그리고 니콜라 회장은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이런 일을 벌이지 않을 사람이다. 니콜라 회장도 강 부회장 부탁을 함부로 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뭔가가 있다는 뜻이야.”

“그럼….”

“강 부회장은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않은 힘이 남아 있다. 우린 그 힘을 짐작도 할 수 없고….”

“아버지도 짐작이 힘들단 말입니까?”

대강의 규모는 짐작하고 있다.

자신이 앞에 있음에도 대현 그룹을 발톱의 때 정도로 생각하는 녀석이었다. 자신이 작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대현이나 강운만큼 거대한 무언가를 숨겨두고 있음이 분명했다.

“…짐작이 힘들면 직접 눈으로 찾아봐야지. 지금부터 직원들 동원해서 알아봐.”

“예.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실체가 드러나면…. 그땐 네 판단에 따라도 좋다.”

“예. 아버지.”

지금은 어떤 말로도 아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직접 실체를 확인한다면 포기도 쉬울 것이라 여긴 것이다.

‘나도 궁금하구나. 녀석이 숨겨 둔 힘이 어느 정도인지 말이야.’

* * *

돌아가는 차 안에서 배영성과 김현성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배 사장.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 보여?”

“…지금 제가 기분 안 좋게 생겼습니까? 제가 모시는 회장님이 대현의 왕 회장을 찍어 눌렀는데요?”

“저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제 생전에 그런 광경을 직접 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허!”

수안은 헛웃음을 뱉으면서도 절로 얼굴에 드러나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오늘 계획대로 너무 잘됐다 싶었다.

이젠 예전처럼 정택주 회장이 커 보이지 않았다.

‘나도 그사이 많이 컸네.’

하지만 아직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인생 경험도 부족했다.

지난 생엔 먹고사느라 고된 하루하루를 보냈기에 세상을 잘 알지 못했다. 세상에 대한 배움은 이번 생에야 제대로 경험하고 있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삶, 부모 형제를 갖고, 다음으로 결혼이란 걸 해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자신의 아이까지 가진 참이다. 이번 생을 성공으로 평가하게 된다면 이는 가족과 결혼 때문이라고 봐야 했다.

아현과 결혼으로 삶이 만족스럽지만, 아직 세상엔 자신만 알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더 크게 성장하겠다.’

마지막까지 달려 볼 생각이다. 올림픽에선 단거리를 달렸지만, 인생은 마라톤이었다.

수안은 잔뜩 들떠 있는 두 사람에게 찬물을 들이붓는 말을 했다.

“기화 자동차에 붙어 있던 수많은 협력사와 외주업체들 미리 챙기려면 엄청나게 바빠질 거야. 좋은 거 잠깐이다.”

“언제 저희가 일 무서워하던가요?”

“쭉정이 걸러내고 알맹이만 남겨서 추수하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워커홀릭인 두 사람에게 새로운 일은 즐거움에 해당했다.

“그리고 자동차 디자인하는 직원들부터 찾아와. 내년에 입찰 성공하면 바로 신차 제작 들어갈 테니까. 목업 제작 업체와 금형 제작사도 찾아 놓고.”

“예. 회장님.”

기화 자동차 K 시리즈 디자인과 소나타, 그랜저 등의 미래 디자인이 모두 수안의 머리에 들어 있었다.

인기 디자인은 시대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본래 신차 제작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개발 비용이 소모되지만, 미리 디자인을 결정하고 각종 자동차 부품의 금형을 미리 개발해 둔다면 신차 출시에 걸리는 기간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IT 버블이 터지기 전에 K 시리즈를 선보일 수도 있었다.

* * *

수안은 오랜만에 이현창과 만나고 있었다.

“선배가 한신당 총재가 됐는데 화환 하나도 안 보내?”

“괜히 의심받는다니까요. 일부러 안 보냈죠.”

이제 서로 편히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로 이현창과 친분이 쌓였다. 정택주 회장에게 30분 내로 이현창이 달려 올 거라고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서울시장이 사임하고 통합당 총재로 갔다가 지지율이 답보 상태에 있거든?”

다짜고짜 질문이지만, 수안은 그러려니 했다. 익숙한 이현창의 화법이고 뻔히 알고 있는 얘기였다.

“통합당 정 총재가 합당하자고 합니까?”

“후배는 내가 말 안 해도 다 알아서 좋겠어.”

“하세요. 대신 제대로 통합당을 포용하십시오.”

“잡음이 많을 텐데.”

“오랜 전통을 가진 두 당이 하나로 합치는 일입니다. 잡음이 없을 수 없죠. 하지만 공천만 제대로 된다면 누구도 떠나지 않습니다. 어차피 통합당 중진들은 대권을 노릴 수도 없는 사람들이죠. 선배님은 그들을 공천해서 의원으로 계속 남게 해 주십시오. 대권에 오를 사람만 쳐 내면 됩니다. 아! 통합당 총재를 대선에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내보낼 수 있지요. 그렇게 되면 거대 야당의 단독 총재가 되실 수 있어요.”

“오. 그게 좋겠군.”

“그리고 이 결과에 불만을 보이는 의원이 하나 생길 겁니다. 탈당한다고 해도 붙잡지 마십시오. 나가서 대선에 출마한다고 해도 내버려 두세요. 대신 합당한 당의 총재는 선배님이 맡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괜한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사면론은 꺼내지 마시고요.”

법원에서 사형과 무기 징역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전직 두 대통령에 대한 사면론이 수면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어차피 이현창 총재는 이번 대선에 후보로 오르지 않을 테니, 입방아에 오를 일은 미리부터 빠져야 했다.

“역시. 후배가 확실한 답을 내려줄지 알았지.”

“마지막은 금융 위기 때문에 보자고 하셨죠?”

“어이쿠. 돗자리 깔아도 되겠어?”

“요즘 무너지는 대기업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국은행에서도 정부에 계속 경고하고 있을 테고요.”

“내가 후배 말 듣길 얼마나 잘했는지 몰라.”

대선이 오기 전에 당의 지지율이 바닥을 칠 것 같았다. 이렇게 진행되면 대선은 필패였다. 수안의 말대로 총재 자리를 지키기로 결정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래서 금융 위기는 어떻게 되는 거야?”

위기가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닙니다.”

“방금 후배 입으로 무너지는 대기업이 한둘이 아니라고 했잖아?”

수안은 평소와 같이 말을 비틀었다.

“선배님. 편작의 형제들 이야기 아십니까?”

“편작이라면 중국의 명의를 말함이겠지? 또 수수께끼 등장이로군. 어디 들어나 보자.”

“수수께끼는 아닙니다.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일 뿐이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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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타는 한나라 말기의 명의였고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라고 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지만, 결국은 조조의 손에 죽는다. 그리고 중국 역사엔 화타 말고 또 한 명의 명의가 있었는데 바로 편작이다. 편작은 화타와 달리 3형제가 모두 의술에 능했다.

어느 날 위나라 문후가 편작을 불러 물었다.

“너희 삼 형제 중에 누구의 실력이 가장 좋은가?”

편작은 “맏형의 의술이 가장 뛰어나고, 두 번째 형님이 다음이며, 제 실력이 가장 못 하옵니다.”라고 답했다.

천하 명의라 불리는 편작이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두 형님을 높이 평가했다.

편작의 큰 형은 어떤 이가 아픔을 느끼기 전에 얼굴빛을 보고, 병이 있을 것임을 예측해 병의 원인을 미리 제거했다. 그래서 환자는 아파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치료를 받아 자신이 어떤 고통을 겪었을 상황인지 미처 몰랐다고 한다. 편작의 둘째 형은 상대방의 병이 미미한 상태에서 병을 알아보고 치료해 중병이 되는 걸 막았다. 이를 설명하자 왕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어떠하냐?”

편작은 자신을 이렇게 평가했다. “저는 실력이 없어 병이 커진 후 환자가 고통을 호소할 때 비로소 알아차립니다. 맥도 짚어야 하고, 처방도 해야 하고, 때로는 아픈 곳을 도려내기 위해 수술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 형님과 달리 병을 미리 알지 못해 뒤늦게 수선을 떠는 저를 보고 큰 병을 치료해 줬다고 명의라 칭하며 고마워한답니다. 그것이 삼 형제 중 가장 실력이 모자란 제가 명의로 소문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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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이 전해 주는 이야기를 들은 이현창은 아직 진짜 위기가 오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안은 숨이 턱까지 차오른 마지막 위기 상황에 나서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후배는 가장 생색낼 수 있을 시기에 나서겠다는 말이야.’

“도대체 이 위기가 어디까지 이어지려고….”

“이미 금융 위기가 동남아를 휩쓸었습니다. 일본계 자금은 자국을 공격하는 헤지 펀드의 공격을 막기 위해 한국에 빌려줬던 단기 외채를 다 쓸어가 버렸고요. 이를 신호로 다른 외채도 다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나라에 우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기는 아직 고점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위기가 오기도 전에 막아낸다면 누구도 위기의 모습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없다. 또한 위기를 겪어 보지 못한 기업과 금융권, 국가는 다시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우물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흐음…. 얼마나 지속되겠는가.”

“최소 4년입니다.”

본래 역사에서도 2001년 IMF에 모든 빚을 상환했다고 발표한다. 하지만 그 영향은 꽤 오래 지속된다. 특히 회사의 사장들은 매년 앓는 소리를 하며 직원들의 월급을 올려주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핑계였을 뿐이다.

“쥐 죽은 듯이 살아야겠구먼.”

그렇다고 정치권에서 조용히 살아선 안 된다. 정치인은 언제나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야 했다.

“정치인은 이름을 알려야 정치인으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언론에 오르셔야 합니다. 구설수든 뭐든 이름을 각인시키십시오. 물론 국민에게 힘이 되고 좋은 소식이면 더 좋습니다. 그리고 다음 정부와 너무 날을 세우진 마십시오. 안 그래도 나라의 우환으로 힘든 국민이 정치까지 외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좋아. 좋아. 국회의원이 됐으니 일을 해야겠지. 적당한 견제로 존재감을 입증하는 거야 어렵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 10년이 너무 길다 싶으시죠?”

“…후배는 내 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17대를 노리겠다고 했지만, 그 시간이 너무 길다 싶었다. 17대 대선이 치러질 때는 자신의 나이가 일흔이다.

“앞으로 10년. 길지 않은 시간입니다. 차근차근 경력과 인지도를 쌓아 가십시오. 민국당의 차기 주자는 제가 찾아내서 연임을 만들어 두겠습니다.”

“후배의 말을 들으니 안개가 걷히는 것 같군. 내 명심하지.”

수안은 작은 미소로 이현창의 답을 받았다.

* * *

97년 10월부터 정부는 환율 급등을 막기 위해 10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을 외환 시장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해외 시장에서 신인도를 끌어올리지도 못했고, 신용 평가 회사들의 평점은 계속 하락한다. 정부는 300억 달러의 외환 보유고를 보유하고 있다고 했었지만, 이미 다 써 버려서 거의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돌아오는 외채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10월 노동부에 기록된 전국 사업장 체불임금 금액은 6,480억 원에 이르고 있었다. 수많은 노동자가 임금도 못 받는 상황에 직면한 경제 위기 상황이다.

거기다 환율은 시시각각 고점을 향하고 있었다.

97년 11월. 더는 방법이 없던 정부는 IMF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IMF에 200억 달러 요청]-1997. 11. 22

-내주 초 실무협의 3~4주 후 지원.

정부의 공식 발표였다. 그리고 며칠 뒤….

[지원금 550억 달러 확정]-1997. 12. 03

정부와 IMF는 각서에 조인하며 550억 달러의 지원금을 확정 발표했다.

이제 곧 대선이 시작되고 정권이 교체되기에 대선 주자들 간에도 의견 충돌이 있었다.

“세부 사항을 추가 협상해 고통을 줄여야 한다. 이대로 진행되면 대량 실업이 발생한다.”는 입장과 “한국이 적극 IMF에 협조해 경제 위기를 빨리 극복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었다.

IMF는 한국의 대선 후보들에게도 ‘협정 준수 이행 각서’에 사인할 것을 요구했다.

정권 교체로 인해 협정에 문제가 생겨선 안 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IMF의 구제 금융을 받으며 경제 구조를 재편하겠다는 문서였다. 각 대선 후보들은 여기에 서명하고 선거를 치렀다.

환율은 더욱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안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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