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의 목줄
동남아 위기가 현실화되었지만, 수안은 아직 느긋하다.
퇴근한 집에서 정원이가 힘겹게 걸음을 떼는 모습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렇지! 잘한다! 한 걸음 더!”
기우뚱하며 한 걸음 더 내딛던 아들은 풀썩 주저앉았다.
아현이 얼른 가서 안으려고 했지만, 수안이 손을 뻗어 말렸다.
“조금만 기다려 줘.”
수안의 기대처럼 정원은 울지도 않고 갸우뚱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작은 걸음으로 아빠에게 걸어와 안겼다.
“정원이 너무 잘했어. 으이그 귀염둥이.”
“꺄으.”
수안은 아들을 안고 얼굴을 부비며 예뻐했다.
아기는 숨이 막히는지 아빠의 얼굴을 작은 손으로 밀어낸다.
“하하하.”
하루하루 새롭게 느껴지는 아들의 성장이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게 해 준다.
‘대한민국도 위기를 겪겠지만, 다시 일어날 거야.’
아들이 다시 일어난 것처럼 한국도 위기를 이겨내고 세계에 우뚝 설 날이 온다.
* * *
1997년 9월.
대한민국은 위기가 어깨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정부의 발표와 해외 권위자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해 발표하는 언론이 있었기에 일반 국민은 헛된 희망에 차기도 한다.
[한국 경제 외환 위기 아니다.]-1997. 09. 13
“한국 경제 위기 아니다.” 존스턴 OECD 사무총장.
“기본 튼튼 어려움 극복 성장 가능성 충분.”
도널드 존스턴 경제 협력 기구(OECD) 사무총장은 12일 『한국경제의 기본이 매우 튼튼해 현재의 어려움을 무난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그는 이어 『기화 사태 이후 해외 신용 평가 기관이 한국 금융 기관의 신용 등급을 어떻게 조정했는지 아직 모르지만 한국이 OECD 회원국이라는 것 자체가 신인도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앞으로 한국 정부의 대처 방법이 신인도 유지에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은 태국과 상황 다르다. 통화 위기 가능성 없다.]-1997. 09. 20
알퐁스 베르플라츠 국제 결제 은행(BIS) 총재는 19일 『한국의 원화는 태국의 바트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며 통화 위기의 가능성을 일축했다. 방한 중인 베르플라츠 총재는 이날 한국 은행 특별 강연에서 『한국처럼 기초 경제 여건이 건실한 국가에서는 남미, 태국 등과는 달리 통화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 건전한 편]-1997. 09. 22
미셸 캉드쉬 국제 통화 기금(IMF) 총재에 이어, 제임스 월펜슨 세계 은행(IBRD) 총재도 한국 경제가 건전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중략….
그는 또 한국의 외환 위기와 관련, 한국은 변동 환율제를 채택하고 있고, 국제 수지가 개선되고 있으며, 실물 경제가 건전하기 때문에 태국 사태가 한국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는 강 부총리의 설명에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답변했다. 월펜슨 총재는 “한국 경제는 성공 사례로 세계 은행에서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며 “정부의 거시경제 운용도 건전하므로 한국 경제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수안은 신문들이 떠드는 소리에 관심 없었다.
이미 외환 위기의 시곗바늘은 정각으로 향하고 있다.
지금 수안이 타고 있는 차량은 대현 본사로 향하고 있었다.
로비에 도착한 차 문을 열고 나온 수안은 정장 윗단추 하나를 채우고 재킷 소매를 슬쩍 당겼다.
지금 수안은 대현과의 1차 협상을 진행하러 가는 길이다.
“안녕하십니까. 강 부회장님.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현 건설 사장이 직접 나와 수안을 안내하고 있었다.
“배 사장하고 김 사장도 따라와.”
“예. 회장님.”
“예.”
배영성의 품엔 일전에 정택주 회장이 직접 작성한 각서 사본이 두 장 들어 있었다.
수안이 배영성의 바람대로 이 자리에 참석하게 해 준 것이다.
기화 그룹은 지난 7월 15일 부도 유예 협약 적용 기업이 되었지만, 이제 곧 법정 관리로 넘어가게 된다. 법정 관리로 넘어간 기화 자동차에 대한 입찰은 최소 1년이 남았지만, 그 전에 대현과의 협상을 끝내 놔야 했다. 그리고 그 이번 협상은 수안에게 너무 유리했다.
수안은 정택주 회장과 그 아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명예 회장으로 물러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대현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정택주 회장이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수안이 먼저 인사했지만, 정택주 회장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제 인사도 안 받아 주십니까? 다른 회사는 몰라도 저만큼은 왕 회장님과 사이가 좋은 줄 알았는데요.”
정택주 회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인사를 받았다.
“그래. 잘 왔다.”
“정영수 회장님. 갑작스러운 요청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택주의 아들인 정영수 대현 자동차 회장이었다.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놀랐지 뭔가. 우선 앉지.”
수안이 자리에 앉았고, 양쪽으로 배영성과 김현성도 자리했다.
“얼굴도 보기 힘든 강 부회장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별거 아닙니다. 서로 주고받을 일이 남아서 이렇게 왕 회장님까지 모셔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수안아!”
정택주 회장은 수안의 입을 막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직 아들에게 관련 내용도 알리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배영성이 일어나 품에서 각서 사본을 꺼내 정영수 회장에게 건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이게 뭔데….”
정영수 회장은 각서의 내용을 단숨에 읽어 내렸다.
-나 정택주는 훗날 기화 자동차, 쌍륭 자동차, 대운 자동차를 인수할 기회가 있을 시 강수안과 그가 소유한 회사에 이를 양보하고 전심전력으로 인수를 돕는다. 대현 그룹 회장 정택주.
아버지의 친필사인까지 정확했다.
“……!!!!”
각서가 작성된 해는 1995년이다. 2년 전에 작성되었다면 국내에 그 어떤 위기의 조짐도 없었을 때였다.
“이제 이 약속을 지켜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마침 기화 그룹이 다음 달 법정관리에 들어가는군요. 회생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1년 이내에 입찰이 시작될 겁니다. 저는 대현이 어떻게 도와주실지 들어 보려고 왔습니다.”
정영수 회장은 아버지 정택주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버지.”
“…….”
정택주 회장은 입이 붙은 듯 말이 없었다.
“아버지!!”
“귀 안 먹었어!”
“이 각서. 진본입니까? 직접 작성하신 게 맞느냐는 말입니다.”
“…맞다.”
“어쩌자고 이런 약속을 하셨단 말입니까! 그것도 강운 그룹 장자한테요!”
지금이야 수안이 강운 그룹 부회장이고 더블 스타 회장이지만, 그때만 해도 강운 그룹에 언제 들어갈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더블 스타는 작은 회사였다. 그리고 완성차 업계가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망가져 버릴 줄은 예상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수안의 자질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정택주 회장이다. 수안이 사업을 전부 말아먹을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지만, 더블 스타는 짧은 시간 동안 성장해 100대 기업 안으로 들어와 버렸고, 강운 그룹의 재계 순위는 공고히 1위를 수성하고 있다.
본래 역사대로라면 대현이 삼디 그룹을 넘어서 다시 1위를 차지했어야 했다. 지금은 어림도 없이 차이가 벌어져 있다.
“…수안아.”
“지금 저는 강운 그룹 부회장이자 더블 스타 회장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제가 왕 할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상황은 달라지지도 않을 테고요.”
수안의 말에 틀린 것이 없다. 당시엔 어리게만 느껴졌던 수안이 지금은 거대한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강 부회장.”
“예. 회장님.”
“내가 그때는 말이야….”
변명이 시작되기 전에 수안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저는 예전 정 회장님이 전후에 진행하셨던 고령교 복구 공사가 떠오르는군요.”
6.25 전쟁 때 폭파된 고령교는 대현 건설이 전후 복구에 나섰다. 하지만 복구가 아니라 신축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당시엔 큰 공사를 맡은 적도 없었고, 건설 장비도 열악했다.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인부에게 줄 월급도 부족해 파업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정택주 회장은 수안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됐다.
“끄응….”
“그렇게 고생하셨지만, 가족들 집과 공장까지 팔아서 결국엔 완성하셨죠. 사업하는 사람은 첫째도 둘째도 신용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주 감명 깊은 일화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못한 정영수 회장이 나섰다.
“강 부회장. 당시 얼마 때문에 이런 각서까지 쓰셨는지 모르지만, 당시 아버지께서 빌리신 돈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두 배로 갚겠네. 각서는 없었던 걸로 하세.”
“아. 그러시겠습니까? 나쁘지 않은 결정입니다.”
“두 배라니! 그 돈이 얼만 줄 알고 그래?”
정택주 회장이 버럭 소리치며 아들을 말렸다.
수안은 뚱하니 정택주 회장을 보며 실망했다는 듯이 말했다.
“…아예 약속을 지킬 생각도 없으셨나 봅니다?”
“이봐. 강 부회장. 내가 적당히 값을 치를 테니….”
“됐습니다. 협상은 결렬이라고 생각하죠. 제가 생각도 없이 왔겠습니까?”
수안은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휴대 전화를 들어 귀에 대고 있었다.
“여보세요? 납니다.”
둘은 자신을 앞에 두고도 통화하는 수안이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전화 한 통화로 대현 그룹에 위해를 가할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예. 씨티 은행에서 대현 그룹에 내준 대출 중에 만기 돌아오는 대출은 전부 회수하세요. 대현에서 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
“……!!!!”
거대한 충격이 둘의 머리를 때렸다.
“강 부회장! 그게 무슨 소리야!”
“협상은 결렬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시 제가 드린 400억 엔으로 국내 대출 상환 압력을 이겨내셨으니 지금은 해외 대출을 갚으셔야죠. 제가 씨티 은행에 그 정도 영향력은 있답니다. 처음 돌아오는 그룹 전체 대출이 4천억쯤 될 테니까 비슷하죠? 하지만 그다음 돌아올 대출이 문제네요. 5천억이던가요? 두 배가 약간 넘지만, 2년분 이자까지 갚는다 생각하시죠. 따지면 연이자가 60%를 넘겠지만, 불법은 아니랍니다.”
“400억 엔?”
정영수 회장은 이제야 각서의 원인 금액을 확인했다.
BE 인베스트먼트는 대현과 비교할 수 없는 씨티 은행의 VVIP 고객이다. 사실 고객이라기보다 협력하는 위치에 있다고 봐야 했다. 은행에서 BE 인베스트먼트의 펀드에 투자하면 높은 수익률을 안겨 주고 있었다. 이런 관계가 수년간 지속되어 왔기에 수안이 씨티 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강 부회장!”
정택주 회장의 외침에 귀를 후비는 수안이다.
“저야말로 귀 안 먹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안면을 바꾸고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내키지 않는군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리고…. 금융 위기 속에서 잘 살아남아 보세요. 물론 돌아오는 씨티 은행 대출은 가장 먼저 상환하시고요.”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있나! 씨티 은행이 어떤 은행인데!”
“나쁘지 않은 결정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진위 파악은 나중에 해 보시던가요. 저는 차만 마시고 가 보겠습니다. 차라리 홀가분한 기분이군요.”
수안이 노려보는 두 사람 앞에서 남은 차를 홀짝거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는데 대현의 임원으로 보이는 사람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진위 파악에 오래 걸릴 일이 아니었다.
“회장님! 씨티 은행에서 만기가 돌아오는 대출을 전액 상환하라고 합니다! 연장은 절대 불가라고 합니다.”
“……!!”
블러핑이 아니다. 엄연히 실제 상황이다.
소란에 돌아선 수안이 배영성과 김현성 사장에게 말했다.
“곧 무너질 회사니까 미련 두지 마. 가자.”
“예. 회장님.”
배영성은 얼른 회의실 문을 잡아 수안의 동선을 확보했고, 김현성은 수안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수안이 엘리베이터에 도착하기도 전, 정영수 회장이 뛰어와 앞을 막았다.
씨티 은행의 대출 상환 요구가 꿈이 아닌 현실임을 인지한 것이다.
“자, 잠시만! 강 회장. 기다려 봐.”
“정 회장님. 이미 기회는 날리셨는데 왜 이러십니까?”
“우리가 뭘 어떻게 해 주면 되겠나? 400억 엔은 너무하지 않나. 원하는 금액을 말해 보게.”
“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네요. 제가 날강도처럼 보이십니까? 정당한 거래 정당한 보상. 제가 원하는 보상은 기존 약속을 지키는 것, 이것 하나뿐입니다.”
뒤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강 부회장. 다시 돌아와 주시게. 우리 얘기 좀 하세.”
수안은 뒤에서 말하는 정택주 회장의 목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제 김일삼 대통령 권력이 다해서 국내 대출도 다 풀리지 않았습니까? 국내 대출 일으켜서 해외 대출 막으십시오.”
요즘 국내 은행들과 종금사는 대출 연장 불허는 물론이고 기존 대출까지 상환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신규 대출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김일삼이 힘쓰지 않는 상황이 아니라 은행이 대출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다.
“내가 사과함세. 잠시만 우리 회장님께 기회를 주시게.”
수안은 정영수 회장만 물끄러미 보다가 몸을 살짝 틀어 한 발 나아갔다.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수안아. 네 할애비를 생각해서라도 기회를 다오.”
수안은 순간 걸음을 멈추고 있다가 상체만 돌려서 말했다.
“왕 회장님. 다시 번복하시면 두 번째 기회는 없어요. 아시겠죠?”
“그래. 그래.”
‘병호 녀석이 자랑할 만했구나.’
제대로 외통수에 몰렸다. 그 어떤 제약도 없는 약속이었건만, 거대한 대현 그룹의 목줄까지 움켜쥘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녀석이었다. 저 나이 또래의 손자들은 그룹이 위기에 빠진 지금도 허송세월이나 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어. 녀석은 일부러 내가 병호 핑계를 대길 기다리고 있었어.’
게다가 녀석은 오래전 소천한 할아버지의 면까지 우뚝 세우고 있었다. 자신과 아들의 부탁에도 꿈쩍 안 하던 녀석이 할아버지 얘기에만 못 이긴 척 넘어가 준다.
* * *
정택주 회장은 회의실에 돌아와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쉬운 쪽이 먼저 입을 열어야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곁에 앉아 있는 아들 정영수 회장은 각서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왕 회장님. 계속 그렇게 입만 다물고 계실 거면 왜 저를 다시 이 자리에 앉히셨는지 모르겠네요.”
“…이제 난 명예 회장이다. 여기 영수가 대현 자동차를 맡고 있어. 건설은 건설대로 다른 자식이….”
“저와 각서 쓰실 때도 정 회장님은 명예 회장님이셨어요. 그때와 지금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랬지. 하지만 그 돈은 원래부터 대현의 돈이었어.”
사실이지만, 정택주 회장이 뭔가를 찾고 있음을 알고 돈의 주인을 짐작한 수안의 호의로 회수할 수 있었던 돈이다.
“제가 돌려드리지 않고 찾아 쓸 수도 있었습니다. 계좌 어디에도 대현 돈이라는 꼬리표는 없었고요. 누구라도 욕심낼 정도의 거액이 아닙니까. 하지만 저는 순전한 호의로 왕 회장님께 그 돈을 드렸습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하지만…. 대출을 상환하라니….”
“제가 대현에 돈 뜯어 가고 있습니까? 은행에 빌린 돈 갚으라는 거잖습니까. 그것도 제가 받아 가는 것도 아니죠. 빌린 은행에 갚으시라고 중개까지 해 드렸습니다.”
“…….”
분명 전엔 연장이 가능하다고 했던 차입금이다.
“어쨌든. 그래서 약속은 못 지키신다는 말씀이세요?”
“아, 아니다.”
“그럼 약속을 이행하신다고 생각해도 되겠죠?”
하지만 꼼꼼하게 읽던 각서의 문구를 들먹이며 끼어드는 정영수 회장이다.
“우선 여기 각서에 아버지는 인수 회사를 강수안 부회장 소유의 회사라고 못박으셨어. 강 부회장이 강운 그룹 부회장이지만 소유했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그렇다면 더블 스타 그룹만 남는데, 더블 스타가 무슨 수로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겠어? 우리가 약속을 이행해도 불가능한 조건이다.”
수안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었고, 배영성과 김현성은 참지 못하고 피식거리면서 웃음을 흘렸다.
“풉.”
“흐흣.”
비웃는 듯한 둘의 태도에 정영수 회장이 발끈했지만, 차마 화를 내진 못했다.
수안이 그런 정영수 회장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제 사정까지 헤아려주시니 감사합니다만, 말 그대로 그건 제 사정이죠. 대현은 대현이 제게 뭘 해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왕 회장님?”
“너… 대체 뭘 준비해 놓은 게냐?”
자신만만한 수안의 표정을 보고 벌써 준비가 끝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옆에 있는 두 부하 직원의 태도도 수안과 다를 바 없었다. 대현이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역시. 왕 회장님 감각은 죽지 않으셨네요. 당연히 지금은 노 코멘트하겠습니다.”
“기화 자동차를 꼭 가져야겠느냐?”
“아니죠.”
“그렇지? 아니지?”
“각서 다시 보시겠습니까? 제가 기화 자동차만 먹겠다고 하던가요?”
기화, 대운, 쌍륭이 모두 적혀 있는 각서였다.
“이걸…. 진짜로 다 먹겠다고?”
“이 자리에 사업가가 욕심낸다고 욕할 사람이 있습니까?”
욕심 많은 사람이 여기 다 모여 있는데 누가 누굴 욕하겠는가.
원래 하나쯤은 양보할 생각이었다.
기화 자동차는 대현에 넘기고 수안은 대운과 쌍륭을 노릴 생각이었다.
대운은 쌍륭 그룹으로부터 쌍륭 자동차를 인수하지만, 결국은 워크아웃으로 향하는 회사였다.
그래서 기화를 대현에 넘기며 훗날 대현의 도움을 받아 대운을 삼키려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강운 그룹을 내주신다고 하셨고, 아이까지 낳으며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
양보와 배려는 동생들이 끝이었다.
왜 경쟁사에까지 양보하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자신의 그룹과 회사를 성장시키고 강운 그룹도 키워야 했다.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 수안은 단단히 마음을 고쳐먹었다.
모두를 갖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와 경쟁하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거든.’
BE가 기화 자동차를 갖고 강운 그룹엔 대운 & 쌍륭을 맡길 생각이다.
대현은 그저 대현으로 남는다. 앞으로 국내 완성차 업계를 삼분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국내 완성차 업계에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언제나 세계를 향해 목표를 잡는 수안이다.
“강 부회장. 내가 그땐 돈에 눈이 어두웠어.”
“400억 엔. 왕 회장님은 그 돈을 받으시고 스스로 각서를 써 주셨어요. 저는 왕 회장님의 약속을 믿고 각서도 필요 없다 했지만, 스스로 써 주셨단 말입니다. 난 이 종이 쪼가리 없어도 될 거로 생각했어요. 왕 회장님을 신용 그 자체로 생각했으니까요.”
“…….”
수안이 각서를 팔랑팔랑 흔들며 말하고 있었고, 정택주는 할 말이 없었다.
명분에서 완전히 밀려 버렸다. 게다가 씨티 은행 대출이라는 막강한 카드까지 들고 있었다.
“정영수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약속 무르고 싶으십니까?”
씨티 은행 대출 상환을 막으려면 돈이 필요하고 훗날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려고 해도 돈이 필요하다. 씨티 은행 대출은 눈앞에 닥친 위험이고, 기화 자동차 인수는 언제 시작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약속을 지킨다고 하고 대출 만기를 연장해야 했다.
‘하지만 기화 자동차를 눈 뜨고 놓쳐야 한다니….’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기화 자동차에 욕심이 나서 각서를 무시하겠다고 판단하셨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씨티 은행 대출 상환이 전부라고 생각하진 마세요. 저 강운 그룹 부회장이고 더블 스타 회장입니다. 그리고 제가 빈손으로 돌아오면 아버지 강운모 회장님도 가만히 계시진 않을 것 같고요.”
“…….”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사람은 평범한 26살 젊은이가 아니었다.
정택주 회장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고, 희미한 빛이 보이는 돌파구를 찾아냈다.
‘그거다!’
“각서의 약속을 지키겠네. 하지만 방법이 문제로군.”
“방법까지 제가 일러드려야 할까요? 저는 대현이 생각한 방법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대현은 기화 그룹 인수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자네와 자네 회사를 지원하겠네.”
“아버지!”
“넌 가만있어라. 신용도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사업을 해?”
아버지의 눈짓 속에 뭔가 다른 생각이 있음을 느낀 정영수 회장은 말수를 줄였다.
“예…. 회장님.”
“정 회장도 이해한 것 같으이. 어떤가? 강 부회장. 강운과 대현의 컨소시엄으로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기로 하세. 물론 대현은 대부분 강운이 원하는 대로 컨소시엄 요구 조건을 양보하겠네.”
“하하하.”
수안은 그냥 웃기만 했다. 그런 수안의 답이 긍정으로 생각됐는지 정택주 회장도 미소를 지었다.
“하하…. 왕 회장님.”
“오냐. 수안아.”
“혹시 다음 정부를 믿고 그러세요?”
“……!!”
정곡을 찔린 표정이다.
정영수 회장도 이제야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컨소시엄을 거론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정치권을 이용할 생각이었어!’
“미리미리 많이 넣으셨나 봐요? 김일삼이 미워서 민국당에만 잔뜩 지원하셨겠죠?”
“무슨 소릴 하는 거냐?”
강운과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입찰에 들어가면 당연히 정부에선 대현이 가져가는 게 옳다고 판단할 것이다. 아무리 양보를 약속했어도 상관없다. 정부에서 대현을 밀어주면 강운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김대준 후보 측엔 대현의 입김이 가득 들어가고 있었다. 김대준이 당선만 되면 컨소시엄이 입찰에 성공한 기화 자동차는 대현의 것이 된다.
하지만 그건 대현만 김대준 후보를 지원했을 때 얘기였다. 강운 그룹은 더 많이 지원했고 더 두터운 신뢰를 쌓았다. 대현은 없는 와중에 정치자금을 밀어 넣었겠지만, 강운은 아주 여유롭게 지원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집행할 예정이다. 그리고 수안의 존재가 가장 큰 변수다.
“어휴 무섭네요. 그럼 저도 도와줄 사람을 불러야죠. 제가 지금 여기서 전화하면 민국당 김대준 총재가 1시간 내로 달려올까요? 안 올까요? 저랑 내기하실래요?”
“……!!”
밥이라도 한번 같이 먹자고 수안의 전화를 기다리는 김대준 총재였다.
“하나로는 안심이 안 되니 한 명 더 부를까요? 이번에 한신당 총재로 올라선 이현창 선배님은 제가 부르면 30분 내로 달려올 것 같은데 말이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려올 겁니다.”
“……!!”
여야를 가리지 않는 수안의 인맥은 모두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솔직히 컨소시엄은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차라리 제가 대현에서 할 일을 정해 드리죠.”
솔직히 여기서 얻을 것은 없었다. 이젠 강운의 힘과 정치권의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수안이다. 그리고 수안에겐 검찰 인맥도 상당히 두터웠다.
“전 딱 한 가지 경고를 남겨 드리겠습니다.”
경고라는 말에 정영수 회장이 반응했다.
“경고?”
“그렇습니다. 회장님. 경고입니다.”
수안은 손에 들고 있던 각서 사본을 반으로 찢으며 말했다.
찌익.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는데 대현 그룹에서 제게 해 줘야 할 양보와 도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겁니다.”
또 다른 종이가 찢겨 나간다.
찌익.
찢어진 종이가 회의 테이블 위로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린다.
“대현 그룹은 그냥 가만히 있으세요. 그것이 제겐 양보이고 도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
대현이 방해하지만 않아도 기화 자동차는 BE 인베스트먼트에서 가볍게 가져갈 수 있었다.
해외 매각을 진행해야 달러가 들어오기에 정권에서도 해외 매각을 반길 것이다.
게다가 회사만 해외에 있지 실질 소유자는 한국인이 아닌가. 달러를 수급하면서 국내 완성차 기업을 잔존시킬 기회다. 반기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영수 회장은 불끈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버지의 노림수조차 소용없는 상대라니….’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현 자동차는 씨티 은행 대출만기를 막는 것도 버겁다. 이대로 수안이 나가 버리면 경고를 남기지 않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저 숨만 쉬고 회사를 운영해야 했다.
“가, 강 부회장님. 씨티 은행 대출은 연장을 부탁합니다.”
처음으로 정영수 회장이 수안에게 존대했다.
“제 얘기엔 아직 답을 주지 않으셨는데 말입니다. 대현은 가만히 계셔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왕 할아버지. 이번엔 믿어도 될까요? 각서 안 써도 될까요?”
“…믿어도 된다.”
정택주 회장의 신용은 오늘 이미 깨져 버렸다. 믿으라는 말을 더는 믿을 수 없었다.
“저 오늘 간단하게 왕 회장님이나 정 회장님과 차 한잔하면서 얘기하고 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늘어졌죠.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약속의 이행을 보증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각서든 뭐든 다시 써 주마.”
대출 상환만 막을 수 있다면 각서는 열 장이든 스무 장이든 다시 써 줘야 했다.
“아뇨. 각서는 필요는 없습니다.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 있으니까요.”
수안의 방법은 별것 아니었다. 하지만 정택주와 정영수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다.
“씨티 은행 돌아오는 대출은 절반, 50%를 갚으세요. 그래야 제가 안심할 것 같습니다.”
“……!!”
“……!!”
이제 대현은 유동 자금이 부족해 기화 자동차를 비롯한 다른 완성차 매물에 눈독 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자금이 마르는 것은 아니니 소규모의 사업적 확장은 기대할 수 있으리라.
거기다 수안은 나머지 반절로 대현의 허튼짓을 막을 목줄을 잡고 있을 수 있다.
정택주 회장과 그의 아들 정영수도 수안의 노림수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 같아도 이렇게 처리해 상대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 것 같았다.
“아주 확실하고 완벽한 해결책이죠. 어차피 빌린 돈 갚으라는데 약속이고 뭐고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그렇죠?”
수안은 배영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배 사장님. 나가서 씨티 은행 대출 절반만 회수하라고 연락해 놔요. 나머지 절반은 연장을 허락하라고 해요.”
“예. 회장님.”
“수, 수안아….”
정택주 회장이 다시 수안을 불렀지만, 수안은 가차 없이 말을 잘랐다.
“제가 두 번째 기회는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지금 백화점 바겐세일 하는 거 아닙니다. 50%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우리 대화를 마무리하시죠.”
수안의 단호한 태도에 그 어떤 여지도 없음을 확인한 정택주 회장은 몸을 축 늘어트렸다.
“건강 조심하세요. 왕 할아버지. 다음엔 좋은 얼굴로 다시 뵙겠습니다. 정 회장님도 다음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