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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김치와 소고기뭇국 (88/304)

백김치와 소고기뭇국

여름이 오나 싶었는데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벌써 깊은 가을이다.

수안은 아침 일찍 일어나 가벼운 코스를 달리고 집으로 돌아와 따끈한 물로 샤워했다.

그리고 잘 다려진 셔츠와 양복을 입고 주방으로 향했다.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 두고 아현과 함께 식탁 의자에 앉았다.

가족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는 수안에게 매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느낄 수 있게 해 줬다.

동생들은 매일 이래야 하냐며 귀찮은 티를 내지만, 수안에겐 자신에게 부모, 형제, 아내가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고 또 함께할 수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중요한 시간이다.

조금 기다리니 어머니와 동생들이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께서 자리에 앉으며 말씀하셨다.

“먹자.”

“예.”

수안은 아버지가 숟가락을 드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본 다음 자신도 숟가락을 들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평범한 아침 식사 시간이다.

그런데 아현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우흡!”

“……!”

“……!”

“죄송합니다. 잠시만… 우읍.”

아현이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화장실로 사라졌고, 가족들의 시선이 수안에게 모였다.

수안도 아현의 증상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임신?”

집에서 가끔 보던 드라마에서 겪어 본 상황이다.

결혼을 했으니 나중에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겪으니 정말 묘한 기분이었다.

“어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어머니는 얼른 일어나 아현을 따라갔다.

“새아가 괜찮니?”

“허허허.”

“오빠 축하해.”

“나도 이제 조카가 생기나?”

“병원부터 가 봐야겠네요. 병원에서 확실하다고 하면…. 후아….”

말을 하면서야 점점 실감이 난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내가 아빠가 된다고?’

“입덧할 때까지 임신을 몰라? 얼른 데리고 병원부터 가 봐.”

“예. 아버지.”

수안이 일어나 인사하고 나오는데, 아버지가 수안을 불러 세웠다.

“수안아.”

“예, 예.”

“숟가락 놓고 가라.”

“아….”

밥을 먹으려고 들었던 숟가락이 여전히 수안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현의 임신에 정신이 가출했다.

“푸흐. 오빠 완전 얼이 빠졌다.”

“형. 청심환이라도 먹던지.”

“너희 덕분에 정신이 든다. 아침이나 열심히 드셔.”

숟가락만 놓고 나가려니 아버지가 다시 말씀하셨다.

“날도 서늘한데 셔츠만 입고 나가려고? 재킷도 입어야지.”

“아차.”

식탁 의자에 걸어놨던 재킷도 얼른 들고나왔다.

가출한 정신이 돌아오려면 아직 멀었다.

.

.

.

수안은 아현을 옆에 태우고 강운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안은 다리를 떨어 대며 초조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해요?”

“당신은 안 떨려?”

“애를 낳는 것도 아니고 임신인지 아닌지 확인하러 가는데 뭘 떨어요.”

“이, 임신. 임신….”

남편이 진정될 기세가 아니라 아현은 손을 잡고 말했다.

“자아. 천천히 심호흡해 봐요.”

“후읍. 후우.”

“나중에 내가 애 낳을 때는 어쩌려고 이래요?”

“애를 낳는다고? 우리 애를?”

수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워워. 진정. 진정.”

“후읍. 후우. 후우. 후우….”

“숨 들이마셔야죠. 왜 뱉기만 해요.”

“하아압.”

수안의 엉뚱한 긴장은 산부인과 여의사의 말을 들으며 최고조로 올랐다.

두꺼운 렌즈의 안경을 쓴 여의사는 무미건조하게 사실을 설명했다.

“음. 9주 정도 되신 것 같은데 모르셨나요?”

“……!!”

“일전에 생리가 가볍게 지나간다고 느낀 적은 있는데, 이번엔 좀 늦다고 생각했어요.”

“케이스에 따라 착상혈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걸 착각하신 모양이네요.”

“아. 그럼 아이는 괜찮아요?”

“지금은 2.5cm 정도 되고요. 손발이 살짝 보이긴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야 확실한 형체를 갖춰 나갈….”

“임신 맞습니까?”

의사는 지금까지 뭘 들었나 싶은 표정으로 수안을 보다가 말했다.

“임신 9주입니다. 입덧도 정상적인 시기에 시작하신 것 같네요. 태아는 유치가 형성될 시기이니 칼슘을 적당히 섭취하시고, 비타민은 영양제로 섭취하는 편이…. ”

“우악!”

“깜짝이야.”

“미, 미안. 놀랐어?”

“애 떨어질 뻔….”

“뭐라고!! 선생님 제 아내가!!”

보다 못한 의사가 말렸다.

“남편분은 좀 진정하시고요.”

“예, 예….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기적으로 나와서 검진을 받으시면 됩니다. 출산 예정일은 내년 6월이 될 것 같네요. 그리고 산모 수첩을….”

산부인과 의사가 할 말을 거의 끝내갈 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이 교수. 임신 맞아?”

“원장님.”

산부인과 의사가 벌떡 일어나서 병원장을 맞이했다.

김일곤 병원장의 등장이다.

“회장님이 얼른 알려 달라고 난리다. 이 커플 임신 맞아?”

“아…. 임신 맞습니다. 이제 9주 차입니다. 그런데 회장님이요?”

“몰라? 회장님 아들이 이 교수 앞에 있잖아?”

“아….”

몰랐다. 그런데 다시 보니 강수안이다. 그리고 옆엔 배우 임아현이다.

남편은 잘생기고 아내는 예쁜 보기 드문 부부라고 생각했다. 접수부에서도 당연히 의사가 알아볼 것으로 생각하고 따로 언질 주지 않아 발생한 작은 해프닝이다.

‘그냥 일반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안경을 바꾸든지 해야지. 에효.’

다행히 큰 실수라 할 만한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흐흐. 수안아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이제 내년이면 애 아빠네.”

“제가…. 제가 아빠가 된다고 하네요.”

믿어지지 않지만 이제 믿어야 했다.

“네 녀석 콩알만 할 때가 아직도 선한데 말이야.”

“그러게요. 흐흐.”

수안은 김일곤의 등장에 가출한 정신을 점차 되찾아갔다.

정신을 되찾고 나서야 아현에게 일곤을 소개하는 수안이다.

“아. 여긴 강운 병원 김일곤 병원장님이셔.”

“안녕하세요. 임아현입니다.”

“결혼식에서 보고 이렇게 좋은 소식으로 또 봅니다. 축하해요.”

병원에서 좋은 일로 마주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수안은 산부인과 선생님을 향해서도 고개를 숙였다.

“의사 선생님, 앞으로 우리 아내 잘 부탁드릴게요.”

“네, 네. 제가 걱정 안 하시도록 특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수안은 병원에서 나와 엉거주춤 손을 벌린 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안아 줘도 될지 말지 고민 중. 안 되겠지? 위험하겠지?”

작은 행동 하나도 조심스러운 수안이다.

“하나도 안 위험한데 뭘 걱정해요? 자요.”

아현이 팔을 벌리고 있자 수안은 아현을 번쩍 들어 안아 빙글빙글 돌았다.

“우리 마누라 최고다! 하하하하.”

“우와악! 이건 위험. 꺄아악. 멈춰요!”

얼른 멈춘 수안은 조심스럽게 아현을 땅에 내려놨다.

“미, 미안.”

“으으…. 그렇게 좋아요?”

“응. 미치도록 좋아. 우리 아이가 생기다니. 내가 아빠가 된다니!”

아현은 차에서 보인 수안의 긴장한 모습이 지나친 기대로 인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제야 한숨 놓을 수 있었다.

‘아이를 싫어하게 된 줄 알았잖아요.’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해 온 수안이지만, 차에서 긴장한 모습을 보고 막상 아이가 생겼다니 마음이 바뀐 건 아닌지 싶었다.

“결혼하고 잘 안 생겨서 쉽게 안 생길 줄 알았어요.”

“다 때가 있는 거지. 아이는 하늘에서 점지해 준다고 하잖아. 축하해 여보. 우리 아기도 축하해요. 산달 다 채우고 튼튼하게 나오렴. 엄마 아빠 보고 싶다고 해도 먼저 나오면 안 돼요.”

아직 임신 흔적도 보이지 않는 아현의 배를 향해 말하는 수안이다.

“당신은 자상한 아빠가 될 것 같아요.”

“당신은 지혜로운 엄마가 될 거야.”

수안은 아주 조심스럽게 아현을 안아 줬고, 아현은 수안의 품에 포근하게 안겨 있었다.

빨간 단풍잎과 노란 은행잎이 날리는 깊은 가을 풍경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 * *

“장모님. 저희 왔습니다.”

“강 서방? 어서 들어와. 너도 얼른 들어오고. 요즘 바람이 쌀쌀해.”

수안과 아현은 집에서 며칠 쉬고 처가댁에 들른 참이다.

“이거 어디 둘까요?”

“뭘 또 이런 걸 사 오고 그래.”

수안의 손에 들린 소고기 세트는 장모님의 손을 거쳐 장인께로 전해졌다.

“엄마….”

“얜 왜 얼굴이 반쪽이 됐어. 요즘 또 다이어트해?”

아현은 요즘 입덧이 심해 집에서 음식을 먹기 힘들어했다.

대부분 음식은 냄새조차 맡기 힘들어한다.

“집에 백김치 있어? 엄마 음식 먹고 싶어서 왔어.”

“백김치가 없진 않은데, 강 서방 얘 무슨 일 있었어?”

“조금요.”

“조금?”

장모님은 딸에게 가까이 가서 조용히 다시 물었다.

“시어머니한테 혼났어? 아니면 시아버지?”

“아니…. 흑. 두 분 다 잘해 주셔.”

별거 아닌 물음에도 이유없이 눈물이 났다.

“일이 있긴 있었네. 얘가 쉽게 눈물 보이는 애가 아닌데….”

“장모님. 그게….”

장인도 수안에게 물었다.

“강 서방이 얘기 좀 해 봐. 얘가 무슨 일이 있어서 이래?”

“며칠 전에 병원 다녀왔는데요…. ”

“병원?”

“큰 문제는 아니고요. 임신이랍니다.”

“……!!!”

“……!!!”

“요즘 입덧이 좀 심해요. 그래서….”

수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모님이 딸을 덥석 안았다.

“아휴. 우리 딸. 엄마가 딸 입덧하는 것도 모르고….”

“흑. 난 괜찮…. 흑. 으아앙.”

아현은 엄마가 안아 주자 펑펑 눈물을 흘렸다.

“우리 딸이 임신이라니…. 축하해. 강 서방.”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그리고 일찍 알려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배 속의 아이가 좀 더 크고 안정기에 들면 알리려고 했는데, 아현 씨가 어머니 음식이 먹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무작정 찾아왔습니다.”

수안의 말에 장모님이 반응했다.

“뭐 해 줄까? 우리 딸.”

“엄마표 백김치만 있으면….”

.

.

.

그날 아현은 평소와 달리 양껏 먹고 편안한 낮잠을 즐길 수 있었다.

수안은 아현이 잠든 곁에서 지키고 있었다.

‘엄마가 한 음식이라고 그렇게 다 잘 먹을 건 뭐야….’

장모님이 이것저것 음식을 내올 때 수안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평소 집에선 냄새가 역해서 못 먹겠다던 음식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안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현은 입덧은 모르겠다는 듯 친정엄마 집에서 뭐든 다 잘 먹었다.

잘 먹은 아현은 졸음이 온다고 하다가 금방 잠들었고, 수안은 그 곁을 지키는 중이다.

‘아무리 어머니가 시집살이 시키지 않는다고 해도 시댁은 시댁이지.’

알게 모르게 시댁에서 긴장하고 있을 아현이다. 서초동 집에서 가졌던 긴장감을 내려놓으니 이렇게 밥도 잘 먹고 잠도 편히 잔다.

‘무슨 수를 쓰긴 해야겠네.’

* * *

아현이 친정에 다녀오고 며칠이 지났다.

‘집에서 싸 온 음식도 떨어졌는데….’

딸의 임신에 친정엄마는 집 안에 만들어 둔 반찬과 급하게 새로 만든 음식들을 바리바리 들려 보냈다. 그 음식들로만 지금까지 세 끼 식사를 해결해 왔지만, 이제 다시 친정에 다녀와야 먹을 만한 음식을 구경할 수 있을 터였다.

아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식탁에 앉았다.

주방은 주방 아주머니들이 관리하고 있기에 아현이 음식 준비나 설거지에 손을 쓸 필요는 없었다. 언제쯤 입덧이 나아질까 생각하며 생각 없이 숟가락을 들어 입에 넣었는데, 소고기뭇국에서 친정엄마의 손맛이 느껴졌다.

“음?!”

얼른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니 주방 아주머니 몇이 아현이 식사하는 모습을 뻔히 보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거 누가 만들었어요?”

아현은 주방 아주머니에게 물어 지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도련님께서 사모님 댁에 저희를 보내셨어요. 음식 배워 오라고요.”

“아. 여보.”

수안은 장모님 음식에만 반응하는 아현의 입맛을 맞추려고 서초동에서 일하는 주방 아주머니들을 번갈아 가며 보냈다. 음식 솜씨가 좋은 베테랑 아주머니들은 어렵지 않게 장모님의 음식을 배워 왔다. 사용하는 재료의 배합과 소금의 사용량까지 모조리 파악했고 이를 서초동에서 훌륭하게 재현한 것이다.

“입덧 오래가지 않아요. 그동안은 저희가 맞춰 드릴게요.”

“친정어머니께서 일전에 소고기뭇국을 못 해 줬다고 꼭 만들어 드리라고 했어요.”

“흑. 네. 고맙습니다.”

“아휴. 또 눈물 터지셨네. 우리 작은 사모님.”

“국 더 짜지면 못 먹어요. 사모님.”

아현이 흘린 눈물이 국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네에. 크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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