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와 팬
“총리님. 이제 내년 총선 끝나면 바로 국회로 입성하시겠습니다.”
“총리는 무슨 총리. 그만둔 지가 언젠데요. 지금은 그냥 일반인입니다. 그리고 선거는 해 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한번 총리는 영원한 총리 아닙니까. 그리고 총리님은 당선이 너무 확실하신 분이죠. 하하하.”
“맞습니다. 저희는 총리님이 국회 입성하시면 훗날 총재 자리로 모시고 싶습니다. 지금이야 대통령께서 총재를 겸임하시지만, 언제까지 하시겠습니까. 다음 대선이 시작되기 전에 물러나시겠죠.”
이현창은 자신을 총재로 모신다고 말하는 국회의원들의 면면을 보며 수안을 떠올렸다.
‘초선 국회의원을 바로 총재로 삼는다는 건… 대선으로 보내겠다는 뜻이야.’
수안의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현창은 확인 차원에서 한 번 더 물었다.
“대선을 말씀하시니 궁금합니다. 요즘 각하의 지지율이 요동치고 있어요. 우리 한신당에서도 슬슬 다음 주자를 준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의원님들은 어떤 인물을 고려하고 계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자리한 국회의원 중 하나가 고민도 없이 말했다.
“내년에 국회에 입성하시더라도 총리님만 한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총리님이 대선으로 가셔야죠.”
“그렇습니다. 총리님이 가신다면 저희가 적극적으로 추천하겠습니다.”
“다음 대선에 총리님이 나오시면 다음 정권도 한신당의 몫이 될 겁니다. 야당은 야당인 이유가 있는 법이죠.”
이현창은 아찔한 기분이었다.
만약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다면 뭣도 모르고 좋아하기만 했을 스스로가 아찔한 것이다.
‘대놓고 날….’
수안의 말대로 버리는 패가 분명해 보였다. 이미 일이 이렇게 진행되리라 얘길 들었으니 그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김대준이 나올 게 뻔한 데도 전혀 위기감도 없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렇다고 지금 이 얘길 꺼내 불편한 자리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전 내년 국회의원 선거에나 집중하렵니다. 한신당의 총재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그 얘길 꺼내는 것도 너무 앞서 나가지 않았나 싶어요.”
“고민해 보시죠. 아직 대선까지 2년이나 남았습니다.”
“맞습니다. 총리님이시라면 가장 높은 자리까지 가실 수 있습니다.”
“이런 얘기는 그만하시고 식사나 듭시다.”
“쩝.”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총리님.”
앞으로 한신당에서 이현창 계파를 가장 먼저 차지하기 위해 꺼낸 말이다.
이현창이 총재가 되고 자신들이 그 계파로 자리 잡으면 공천도 더 쉬울 테니 국회의원 자리도 더 오래 보존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들은 버리는 패가 아니라 실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꺼낸 말이었지만, 이현창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강 후배밖에 없어.’
더욱 강하게 수안의 미끼를 무는 이현창이다.
* * *
최학주 실장은 수안에게 부탁받은 일을 강운 그룹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검사에게 부탁했고, 국세청에도 별도의 고발과정을 거쳤다.
검사는 신나 레코드를 조사하며 문제의 소지가 있음을 확인했고, 압수 수색 영장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신나 레코드는 갑자기 들이닥친 검사들에 의해 자료를 압수당했고, 곧이어 국세청의 세무 조사도 받아야 했다. 부당한 세금 포탈이 밝혀진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언론에서는 일본의 사이비 종교인 옴진리교가 지난 3월에 지하철에서 자행한 사린가스 테러와 연결해 신나 레코드의 사이비 종교 문제를 조명했으며, 이는 들불처럼 다른 언론사로 번져나갔다.
수안이 계획한 대로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기 동산? 이게 뭐야?”
신문에 등장한 사이비 종교의 실체는 사람들에게 의아한 감정을 선사했다.
신도들을 폭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예배 중에 옷을 하나씩 벗고 신도들과 나체로 춤을 췄다고 한다. 낮에는 농사일을 시키고 밤엔 레코드사의 테이프를 만드는 일까지 강제로 시켰다. 검찰 조사 중에 추가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살해하고 암매장한 신도까지 있다는 소식이었다.
사이비 교주는 스스로를 “아기야”라고 부르도록 하며 꽃가마를 타고 하얀 드레스를 입었다.
신문에는 사이비 교주가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휘황찬란한 드레스를 입은 흑백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신문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대체 이런 사이비를 어떤 놈이 믿어?”
믿는 사람이 있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을 계승했다는 말을 믿고 교주가 자신의 모든 것인 양 내다 바치는 광신도들이 있기에 운영되는 종교 단체다.
본래 역사에도 사이비 교주는 구속을 면하지 못한다. 하지만 보석으로 풀려나 훗날에도 떵떵거리며 산다. 하지만 수안과 강운 그룹이 나서서 검찰을 움직인 현재는 그때와 달랐다.
그 아래 다른 기사에는 최근 달러에 검은색 잉크를 입혀 사기를 치고 다니던 일당이 경찰의 끈질긴 수사에 모조리 체포되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 * *
얼마 뒤 수안은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원하신 그대로 흘러가서 좋으시겠습니다.
“다 최 실장님이 힘써 주신 덕분이죠.”
최학주 실장의 전화다.
-이중 장부와 형사 사건도 연루되었으니 교주가 빠져나오긴 힘들겠더군요. 교주가 구속되고 나면, 신나 레코드에 대한 처분도 곧 내려질 것 같습니다.
“이미 중요 자산을 매각한다는 계약서에 사인 끝냈습니다. 덕분에 싸게 샀죠.”
-알짜는 미리 빼돌리셨나 봅니다. 그래도 신나 레코드는 위험할 텐데요?
“제가 원한 것은 판권을 가진 회사이지 신나 레코드가 아닙니다.”
원래는 신나 레코드를 온전히 인수할까 생각했었지만, 간단히 포기했다. 신나가 신의 나라를 뜻하는 이름이라 포기한 것이다. 음반을 유통하는 대리점이야 얼마든지 운영할 수 있었다. 마침 SJ 컴퓨터가 전국에 지점을 깔고 있으니 그곳 대리점에 끼워 넣기만 해도 더 거대한 음반 유통사를 기대할 수 있다.
벼랑 끝에 선 교주는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김현성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판권을 가진 자회사 킹레코드만 더블 스타에서 인수한 상황이다.
같은 업종인 더블 엔터테인먼트에서 이를 흡수하고 판권을 관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킹레코드에서 지불하지 않던 가수들의 음반 판매 수익도 앞으로는 정확히 배분할 생각이다.
-담당 검사에게 그쪽은 손대지 말라고 언질 주겠습니다.
“마무리까지 확실하신 우리 최 실장님. 흐흐흐.”
-그런 소리 듣자고 한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회장님 전언입니다. 전환 사채 건은 잠시 미루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도련님 뜻대로 됐군요.
“어휴. 다행입니다. 그동안 저는 전환 사채 살 돈이나 마련해 두죠.”
-끊습니다.
“또 뵈러 갈게요.”
-…다음엔 연락하고 오십쇼.
“예. 실장님. 앞으론 꼭 연락드리고 가죠.”
수화기를 내려놓은 수안은 스포츠신문에서 기다리던 연예계 소식을 확인했다.
[가수 김광식 이혼]
[포크송으로 인기를 끌던 가수 김광식은….]
“그냥 갈라놓으라고만 했더니… 일을 너무 확실하게 처리하잖아. 김기수 사장도 상 받아야겠네.”
기사엔 상세하게 이혼 사유를 밝히고 있었는데, 김광식의 아내가 도박으로 인하여 경찰에 체포되면서 밝혀진 내연남의 존재까지 다루고 있었다. 아이로 인해 고민을 거듭하던 가수 김광식은 더는 가정을 이어나가지 못할 것 같다는 판단 아래 이혼을 결정했다며 이혼 사유를 밝히고 있었다.
“속이 시원하다.”
수안은 배영성에게 SN 이수남 사장에게 줬던 것과 같은 양도성 예금 증서를 받아 더블 엔터로 향했다.
“하하하. 오셨습니까.”
“역시 김 사장님이 일을 잘하시네. 제가 인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아휴.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야 부사장님이 차려 둔 밥상에 숟가락만 하나 올렸죠.”
“흐흐흐. 이거 받으세요. 이번에 일 처리를 제대로 해서 드리는 제 작은 성의예요.”
봉투의 안의 금액을 확인한 김기수가 화들짝 놀랐다.
“허읍!”
“앞으로 이렇게만 합시다. 김 사장님.”
“충성!”
김 사장의 과장된 경례를 받고 아내를 만나러 가려는데 김 사장이 서둘러 말했다.
“김광식 씨가 회사에 계신데….”
수안은 얼른 옷매무새를 다듬고 말했다.
“어디 계십니까?”
“가시죠. 녹음실에 있을 겁니다.”
수안은 김 사장을 따라 녹음실로 갔고 거기서 그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통기타를 품에 안고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은 작지만, 또 크게 느껴졌다.
‘김광식… 김광식이다.’
이혼의 아픔으로 인한 상실감과 서글픈 감정을 그의 뒷모습으로도 알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다 내가 한 짓입니다.’
김기수 사장이 침묵을 깨고 김광식을 불렀다.
“광식 씨! 여기 손님 오셨어요.”
김광식이 돌아보고 수안은 그와 마주했다.
수안은 가까이 걸어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팬입니다.”
“아. 반갑. 반갑습니다.”
수안이 허리를 숙이자 김광식이 더 허리를 숙이고, 그 모습을 본 수안이 더 허리를 숙여 자꾸만 둘의 고개가 땅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러다 맞절하시겠네. 부사장님 일어나세요. 광식 씨도 그만하고.”
어색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김광식을 마주하니 수안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스타가 있고 팬이 있구나.’
진짜 스타를 마주한 기분이다.
아현의 경우 이미 자신의 배우자가 되어 가족으로 여기고 있었으니 논외로 쳐야 했다.
가수 김광식은 그저 바라만 봐도 흐뭇해지는 진정한 수안의 스타였다.
수안이 멍하니 보고만 있으니 김광식이 먼저 말문을 열어 줬다.
“제 음반의 판권을 찾아오셨다 들었습니다.”
판권을 찾아온 것에 그치지 않고 음반 판매 수익에 대한 비율도 조정을 거쳤다.
앞으로 음반이 판매되며 얻는 수익의 일부를 정확히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킹레코드에서 소유한 판권에 대해서도 각 가수에게 연락해 계약을 갱신했다. 이미 넘겨받은 판권이지만, 앞으로 가수들과 맺을 관계도 중요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소속사를 저희 더블 엔터로 선택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이를 걱정하지 말라고 아주머니 붙여 주신 것도 강 부사장님 지시라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엄마 없이 어쩌나 싶었는데… 아이도 안정을 찾아 갑니다.”
“다행입니다. 그리고… 혹시 기분이 우울하거나 몸이 축 깔리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스타의 기분 관리나 컨디션도 기획사가 꼭 해야 하는 일이라서요.”
아직 김광식의 사건을 완벽히 해결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타살일 수도 있지만, 정말 자살이라면 미리부터 정신적인 부분을 관리해야 했다.
“험난한 세상 살면서 고민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야 제가 좋아하는 노래 부르고 기타 치면서 풀어나가면 됩니다. 사람들에게 노래로 영향을 끼치는 직업이 바로 가수입니다. 그런 제가 우울한 감정을 품고 있으면 가수를 그만둬야죠.”
“역시. 우울증은 없으셨군요?”
“그런 소문이 돌았습니까? 저는 처음 듣습니다.”
“하하하. 소문은 아니고 제가 팬이다 보니 왠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나중엔 이혼이 별일 아닌 것처럼 비춰질 지라도 지금은 연예계에서 이혼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TV에 한참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언제 다시 복귀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 상황이다. 그런데 지금 김광식은 앞날이 막막한 상황에서도 희미하게 미소를 보여 주고 있었다. 우울증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저런 표정을 보일 수 없었다.
가식적인 미소가 아니라 선천적으로 긍정을 가진 사람의 미소였다.
‘우울증은 없었어. 다행이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제 노래라도 한 곡 듣고 가시죠. 여기 시설이 상당히 좋아서 들을 만하실 겁니다.”
“여, 영광입니다!”
김광식은 즉석에서 한 사람만을 위한 공연을 시작했다.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 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이 나누나.
1년 전 발매한 그의 노래 가사는 현재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노래가 끝나고 수안은 저도 모르게 한 줄기 눈물을 뺨으로 흘려보냈다.
“브라보!”
수안은 열성적으로 환호하며 손뼉을 쳤고, 그 모습을 본 김광식이 부스 안에서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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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은 김광식과 인사하고 나와 다시 김기수 사장과 마주하고 있었다.
직접 김광식을 보고 나서 그간의 사정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 관여한 겁니까?”
“제가 한 것은 도박판을 설계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것까지입니다. 제가 고용한 친구들은 시간이 지나고 몸을 뺐고, 그다음 신고에 들어갔습니다. 잡힌 녀석들은 실제 도박판을 전전하던 꾼들이라 저희와 관련이 없습니다. 그리고 1차 작업이 실패하면 다른 약점을 이용하려 했는데, 광식 씨가 결단을 내려줬습니다. 일이 어렵지 않게 술술 풀려나갔습니다.”
이후 이혼에서도 김광식 대신 나서서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어 줬다.
이혼으로 인한 재산 분할이나 양육권에 대한 부분까지 정리가 끝난 상태다.
“그럼 됐습니다. 이 얘긴 무덤까지 가져가세요.”
“예. 부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