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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뚜기 (79/304)

오뚜기

박수겸이 도착한 접견실엔 김현성 사장과 수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한송 텔레콤 박수겸입니다.”

박수겸이 들어오자 얼른 일어나 인사하고 악수를 하는 둘이다.

“어휴. 오래 기다리셨죠? 미리 약속을 잡고 오셨으면 바로 보셨을 텐데….”

“한송 텔레콤 사장님이시면 저희 납품처 입장에서 갑 아닙니까. 송구합니다. 박 사장님.”

수안과 김현성 사장의 원투 펀치였다.

“환대 감사합니다.”

박수겸은 말하는 내용과 전혀 다른 둘의 태도로 알 수 있었다.

‘저자세처럼 보이지만… 긴장감이 전혀 없어. 납품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태도야.’

둘이 자리에 앉으면서도 스스로에겐 앉으라는 말도 없었다.

박 사장은 벌서듯이 계속 서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대형 통신사 사장님께서 여기까지 걸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야 그저 그런 호출기 제조업을 영위하는 작은 회사일 뿐이지 않습니까.”

팬탁이 예전엔 작았지만, 지금은 작지 않다. 작년 매출은 백억을 조금 넘겼지만, 올해는 반년이 흘렀음에도 열 배 가까운 매출 신장을 기록하는 중이다. 1997년 가입자가 2천만까지 성장할 삐삐 산업이다. 그리고 삐삐를 구매하는 사람마다 팬탁의 제품을 선호하는 풍조가 생기고 있었다. 제품의 아름다운 디자인과 새롭고 독특한 기능, 탁월한 내구성이 이뤄낸 결과였고, 광고까지 시시때때로 집행되고 있다. 팬탁은 삐삐시 장을 제대로 선도하고 있었다.

“김 사장님 말씀처럼 저도 궁금하네요. 분명 강 회장님께 그간 불량 제품을 납품해 사죄드리고 다른 방향에서 도움을 드리겠다고 했는데요.”

불량 제품을 한송 텔레콤에 납품하지 않고, 다른 통신사에만 납품해 도움이 되겠다고 했던 수안이다.

“먼저… 이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간 팬탁의 제품을 소홀히 한 점 사죄드리겠습니다.”

박수겸 사장의 직접적인 사과였다.

“…부사장님.”

김현성 사장은 사과하는 박 사장이 아니라 수안을 돌아봤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묻는 것이다.

수안은 허리를 접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박 사장을 보고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사과는 받지요. 앉으세요. 박 사장님.”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박 사장도 누가 실세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 한송 그룹 강 회장님이 뭐라 하시던가요.”

“착오였을 뿐입니다. 팬탁의 제품엔 전혀 이상이 없었습니다. 이에 회장님은 제가 직접 사죄드리고 다시 납품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회장님께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점은 제 불찰입니다.”

‘방향을 이렇게 잡았나?’

질투심에 행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본인이 직접 연락하지 못한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김현성 사장이 먼저 입장 정리에 들어갔다.

“그럼… 우리 제품이 이상이 없었는데, 한송은 팬탁 제품을 매장에서 제외하고 제품의 판매를 방해했다는 뜻이군요. 맞습니까?”

“일부러 방해한 것은 아닙….”

수안이 박수겸의 말을 끊고 들어갔다.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은데요? 제품에 이상이 없었지만, 이상이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팬탁에 손해를 야기했다. 맞지 않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저희도 팬탁에서 제품을 빼면서 발생한 점유율 하락으로 손해가….”

쾅.

수안은 탁자를 내려치며 다시 박수겸의 말을 막았다.

“지금 한송 텔레콤 스스로 안 팔아서 생긴 손해를 우리 앞에서 얘기하십니까? 우린 통신사에 직접 피해를 본 작은 제조 회사가 아닙니까! 우리 물건 빼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알아들어도 됩니까? 그럼 계속 점유율 내려가는 걸 지켜보세요. 물론 거대한 통신사에서 점유율 늘릴 방법이야 많겠죠. 우리 경쟁 회사 제품에 출혈 마케팅을 하셔도 될 테고요.”

“…….”

갑을의 위치가 바뀐 지 한참 지났다.

다른 제품에 대한 마케팅을 집행했지만, 점유율 회복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요즘 세대에 먹히는 팬탁 제품이 필요했다.

“저희도 여러 군데 납품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더군요. 통신사와 관계도 더 원활해졌고요. 그러니 박 사장님은 일어나셔서 돌아가시면 됩니다. 서로 말도 안 통하는데, 뭐 하러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싸우고 있습니까?”

“저희가…. 귀사에 손해를 야기했습니다. 인정하겠습니다.”

‘더블 스타는 손해 배상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팬탁의 물건을 받아야 점유율을 되살릴 수 있어.’

“…박 사장님. 이제 우리 자꾸 말 돌리지 맙시다. 좀 전이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다음은 없습니다.”

“예. 강 부사장님.”

그 뒤로 수안의 입에서 나온 더블 스타의 요구 조건은 한송 텔레콤 입장에서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송 텔레콤 영업점에서 팬탁의 제품을 최우선 판매할 것.

너무 간단하고 쉬운 조건이었다.

“…이게 전부입니까?”

조건을 들은 박수겸 사장은 고작 이런 요구가 전부인가 싶었다. 조건이라고 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송 텔레콤에서 바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조건이 아니잖아?’

최소한 수억의 보상을 요구하리라 생각했고, 실제 지불할 마음마저 먹고 있었다.

“그럼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요구라도 할 줄 알았습니까? 그간 입힌 손해라도 배상하라고 할까요?”

큰아버지와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은 수안 쪽에서 사양이다.

“아, 아닙니다.”

“난 사사로이 한송 그룹 강 회장님과 가족 관계입니다. 내가 큰아버지 되는 분께 해라도 끼칠 줄 알았습니까? 뭐가 겁이 나서 이제 찾아와요?”

박수겸 사장을 향한 질책이 아니다. 나중에 큰아버지가 전해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박 사장도 수안이 하는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사과는 자신의 입에서 나와야 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박 사장님. 솔직히 박 사장님이 결정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말씀하지 않아도 뒤 내용은 제가 잘 압니다.”

“아….”

“이제 다른 얘길 좀 해 봅시다.”

뭐가 남았는지 모르지만 수안이 하는 말에 제대로 답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간의 갈등을 이렇게 쉽게 풀어준 상대라면 이번에도 들어 주기 어려운 요청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형들은 회사에서 뭐 합니까? 회장님 아드님이신 창수, 창식 형제 말입니다.”

“……!!”

엉뚱한 질문이기도 했고 또 난감한 질문이기도 했다.

“회사에 나오긴 합니까? 일은 잘해요?”

“그 부분은….”

“나도 대충 알아서 물어보는 겁니다.”

“후우….”

박수겸 사장도 회장님이 왜 조카인 수안을 미워했는지 잘 알고 있었고, 방금 질문으로 강수안 부사장이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못할 말도 아니다. 창수, 창식 형제에 대해서라면 박 사장도 불만이 많았다.

이어진 수안의 말은 박수겸의 마음에 남은 작은 거리낌도 지워줬다.

“박 사장에게 들었다고 일러바칠 일 없어요. 그러니 편하게 얘기하세요.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두 분은….”

박 사장은 수안이 미리 파악한 두 사촌 형의 패악을 더욱 자세히 알고 있었다.

회사에 잘 나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고, 잘 나오지 않으니 회사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직장 내 여직원에 대한 민감한 문제도 있었고, 사건 사고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자주 발생한 모양이다.

“…요즘 비서실은 두 분 사고 처리하느라 바쁩니다. 회장님도 반쯤은 손을 놓으신 것 같습니다. 비서실의 보고도 잘 챙기지 않으시고 그냥 알아서 하라고만 하십니다.”

“흐음….”

수안도 아버지와 생각을 같이하고 있다. 창수, 창식 형제의 일은 곧 범 강운 그룹의 일이었다. 이들이 강운 그룹 간판에 먹칠하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 사람들 진짜 가만두면 안 되겠네. 어지간하면 나서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휴… 강 부사장님이 여기까지 관여하시면 저희 회장님 입장이….”

안 그래도 질투의 대상이 되는 수안이다.

여기에 역린이라 할 수 있는 창수, 창식 형제의 일에 수안이 손을 대면 회장님이 어떻게 나올지 짐작할 수도 없다.

“박 사장님이나 강 회장님 입장 난처하지 않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방법이 있으십니까?”

수안은 간단하게 해결책을 내놨다.

“형들 아직 입대 전이잖아요?”

“…네?”

둘은 군대를 미루고 미뤘다. 대학을 다니면서 미뤘고, 유학까지 다녀와서 지금은 대학원을 등록하고 회사에 출근하고 있었다. 대학원까지 끝내면 다른 방법으로 군대를 빼겠지만 그 전에 보내는 거야 어렵지 않다. 평상시 분노 조절이 어려우면 군대로 보내면 된다.

‘해병대는 가지도 못할 테고… 8사단으로 보낼까?’

8사단은 수안이 병역 혜택을 받고 기초 군사 훈련을 받은 곳이다.

‘훌륭한 군기를 가진 곳이지.’

8사단의 숫자 모양 덕분에 오뚜기 부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강운 그룹 회장님께 말씀드리고 깔끔하게 입대시키겠습니다. 몸 멀쩡한 사람이 왜 군대를 안 가고 버티는지 모르겠네요.”

“어쩌면… 그게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박 사장은 차라리 눈앞에 둘이 보이지 않으면 좋을 것 같았다. 둘이 출근하는 날이면 회사 분위기가 딱딱하게 경직되곤 했었다. 불과 얼마 전에도 일 잘하는 직원들 몇몇이 둘에게 밉보여 회사를 그만둔 일이 있었다. 자신이 회사의 사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그 일을 막을 수 없었다.

박 사장은 이런 회사 생활을 꿈꾸지 않았다. 자신이 이 지경이니 그 밑에 직원들이야 더 할 것이다.

“이거 괜히 나까지 민망하네요. 이 건은 최대한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이제 회의 끝내고 나갑시다.”

수안은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을 입었고, 김현성 사장도 자리를 정리했다.

박 사장은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갈 수 없어 자리를 정리하는 둘에게 엉거주춤 인사를 했다.

“그, 그럼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요? 밥은 같이 먹어야지.”

박 사장을 밖에 세워 둔 것이 마음에 걸린 수안이다.

같이 식사라도 하며 풀어야 했다.

“하하. 예. 알겠습니다.”

“오늘 밖에서 오래 기다리셨는데, 제가 사과할 기회는 주셔야죠.”

“아휴. 괜찮습니다.”

“박 사장님은 괜찮아도 제가 안 괜찮아요. 번듯한 회사 사장님을 일부러 밖에 세워 놓고…. 못된 짓 했잖습니까. 제가 한송 텔레콤 직원이었으면 우리 사장님한테 예의 없이 굴었다고 화 많이 날 것 같은데요?”

“하… 하.”

‘회장님 아드님들이 강 부사장님 반만 닮아도 좋으련만….’

“언짢은 기분은 풀고 회사로 가셔야죠. 그리고 앞으로는 우리 팬탁 제품 많이 홍보해 주시고 많이 팔아 주십시오. 한송 텔레콤이 국내 굴지의 통신사가 되는 그날까지 저희도 힘껏 밀어드리겠습니다.”

“앞으로 한송 텔레콤의 주력 제품을 무조건 팬탁 제품으로 지정하고 마케팅을 이어 가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앞으로 우리 잘해 봅시다.”

둘은 처음과 다르게 단단하게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 * *

수안은 다음 날 바로 강운 그룹으로 향했다.

“도련님. 회장님 뵈러 오셨습니까?”

“바쁘실 텐데 무턱대고 찾아왔습니다.”

“미리 연락하고 오시죠. 회장님은 오늘 일정이 있으십니다. 헛걸음하셨네요.”

“회장님이 아니라 최 실장님을 뵈러 왔으니 헛걸음이 아닙니다.”

수안이 찾아온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최학주 실장이다.

큰아버지의 일이다. 직접 마주하고 얘기하기 껄끄러웠다. 최 실장을 통해 한 다리 건너 전달하는 편이 부드럽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커피라도 한 잔 주시죠. 아니, 녹차로 부탁합니다. 다시 몸을 만들어야 해서요.”

수안은 탁자를 두고 최학주와 마주했다.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내년을 기대해도 되겠죠?”

수안의 올림픽 출전에 관해서 묻는 것이다.

“부담이 큽니다. 그래도 힘닿는 데까지 해 봐야죠.”

수안은 최 실장과 편히 근황을 얘기하다가 큰아버지의 일을 꺼냈다. 더블 스타 산하에 있는 팬탁과 아내에게 일어난 일들은 꺼내지 않았고, 그저 창수, 창식 형제의 근황과 그 처리 방법에 대한 제안만 남겼다. 그 뒤의 일은 아버지의 결정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최 실장님은 전달만 부탁드립니다. 제가 집에서 직접 얘기해도 되지만,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서 조심스러웠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제가 회장님 심기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전달하겠습니다.”

“하하. 요즘 제가 회장님께 많이 밉보였거든요.”

“…솔직히 4.5%는 너무하셨죠.”

수안이 직무 발명 보상으로 아버지와 협상한 비율을 말함이다.

“에이. 아직 매출 발생하려면 멀었잖아요. 이제 양산 적용 준비하고 협력사에선 기술 적용하고 있을 텐데요….”

“회사엔 상당한 지출입니다. 이익률이 급감합니다.”

“제게 지급할 부분은 회사에 유보하세요.”

“유보요?”

“제가 설마 회사 운영 악화시키려 돈 받는다고 했겠어요? 직원들에게 각인되었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나중에 떨어내더라도 우선은 미지급으로 걸어 두십시오. 지급 기간 만료되면 그대로 떨어서 잡이익으로 처리하시고요. 그래도 중간에 급하게 쓸 일이 있을 때 빼 가긴 좋겠네요.”

수안은 자기가 다 받을 것처럼 얘기하고 이제는 돈을 받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하… 회장님께 미리 말씀하시죠. 좋아하셨을 텐데요.”

‘그랬다면 욕먹을 일도 없었을 텐데….’

“그렇게 하면 직원들에게 주는 비율이 또 조정되지 않았겠습니까. 회장님께 유보 건으로 말씀하시는 건 조금 미뤄 주세요. 아직 직무 보상 규정이 자리 잡아야 할 때입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여차하면 변경될 수도 있죠.”

“그래도….”

“줬다 뺏으면 얼마나 억울한 줄 아십니까?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법입니다. 누군 엄청난 비율 받기로 계약했는데 난 규정이 바뀌어서 낮은 비율로 받아야 하면 차라리 다 못 받는 게 낫다고 할 겁니다.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도 순식간이죠.”

“…예. 알겠습니다.”

알았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킬지는 미지수였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최 실장에게 인사하고 훌쩍 자리를 떠난 수안이다. 최 실장은 수안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말단 직원들의 마음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끔 수안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을 때면 매번 비슷한 생각이 든다.

‘그릇이 다르긴 달라.’

맏아들 그릇이 크다고 나쁜 일이 아니다.

요즘 의문스러운 일이 있어 걱정일 뿐이다.

‘그런데 계열사 사장단은 왜 만나는 거야?’

최학주 실장의 눈을 피한다고 했지만 다 피하진 못했다.

수안과 사장단이 나눈 대화는 알지 못했어도 일부 만나는 것까지는 파악한 최학주 실장이다.

‘다음엔 이 부분을 직접 물어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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