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약이 남은 것은 주수동의 내연녀뿐이다. 경찰이 압수했으니 남은 약은 없어야 했다.
“거기도 조사 시작할까요?”
“아니야. 거긴 이미 끝났으니까 덮자.”
“그럼 주수동의 내연녀는….”
“이미 경찰이 잡았는데 뭘 어쩌겠어? 여기도 지켜보기만 해.”
“그래도 저희에게까지 도달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없어도 끝까지 살피자. 우리가 뿌린 씨앗이니까.”
“예. 부사장님.”
“예. 저는 은밀하게 파악해 보겠습니다.”
“밖에 나온 김에 더블 엔터나 가 볼까?”
요즘 연애에 빠져 일정 시간은 항상 더블 엔터로 가서 아현과 만나고 있었다.
“…사모님은 오늘 CF 촬영이 있어서 자리에 안 계십니다.”
덕분에 배영성의 일이 늘었다. 항상 임아현의 스케줄을 확인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그래?”
“강운 건설 아파트 CF 건입니다.”
“아… 그거 이제 시작하는구나.”
나중에나 있을 프리미엄 아파트 광고가 수안 덕분에 빠르게 시작되고 있었다.
CF가 나오지도 않았지만 분양 열기는 뜨겁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CF로 알려지면 분양 열기는 더욱 활활 타오를 예정이다.
“다른 강운 계열 광고도 줄줄이 잡혀 있습니다.”
“어휴. 우리 아현이 돈 많이 벌겠네.”
“사모님이 아무리 돈을 벌어도….”
수안이 버는 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용돈 쓰기 딱 좋지 뭐.”
“용돈으론 충분하겠습니다.”
수안과 배영성에겐 용돈 벌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미리 얘기하는데, BEST는 아현도 모르는 일이야. 부부라지만 갈라서면 남남이야. 그러니 너희도 입 조심해.”
아현 앞에서는 간이고 쓸개고 뻬 줄 것처럼 굴지만 공과 사를 구분하는 수안이다.
“안 그래도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그럼 사모님께 펜타그램과 BEST는 철저히 숨기겠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오늘은 펜타그램으로 갔다가 계열사 돌아보고 오자.”
“예. 부사장님.”
“최 실장은 맡긴 일부터 진행해.”
“예.”
* * *
최장호는 경호실 직원들을 불러 조동팔 일당의 경찰 조사 결과를 알아보라 맡기고, 본인은 직접 죽은 주수동의 자택으로 향했다.
‘여긴 내가 확인할 수밖에 없어.’
경호실 직원들에게 공개할 정보에 한계가 있으니, 여기까지 맡길 수 없었던 탓이다.
차 안에서 대기하길 몇 시간.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젊은 여자가 차에서 내려 주수동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누구지?’
얼른 가지고 있던 파일 속 사진을 들춰 주수동의 내연녀 얼굴을 확인했다.
최근 붙잡힌 내연녀는 경찰서에 있을 테니 당연히 아니었고, 그 이전 내연녀 중의 하나였다.
‘얘는 또 왜 여길 들어가?’
다시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하는데, 장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얘도 얼굴이 창백하고 눈이 퀭하게 푹 들어간 모습이 꼭….’
“……!!”
초기도 아니었다. 심각할 정도로 중독이 진행된 모습이었다.
‘여기도 이미 약을 복용하고 있었어. 애초에 같이 복용했을지도 모르고….’
더 확인할 것도 없었다. 장호는 차를 빼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얼라?”
장호는 차를 빼는 와중에 자신과 같이 차 안에서 잠복하던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장호를 파악하지 못했고, 장호가 먼저 발견해 다행이었다.
‘벌써 형사들이 주시하고 있다니….’
마약 사범 잡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경찰청이다.
안 그래도 연예인 마약으로 시끄러운 때였다.
‘여긴 더 오면 안 되겠어. 어차피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끝이다. 저 안에 있을 약을 빼 올 수도 없는 일이고….’
조용히 빠져나온 장호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서울 외곽 큰 호숫가에 들러서 낚싯대를 들었다.
여느 낚시꾼처럼 떡밥을 뭉쳐서 달고, 낚시를 시작했다.
주변이 모두 시야에 들어오는 탁 트인 곳이다.
장호의 의식은 물에 떠 있는 찌가 아니라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얼쩡거리던 차량 한 대가 사라지고 있었다.
‘…역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잖아.’
혹시나 싶었던 의심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꼼짝없이 오늘은 여기 있어야겠네.’
차량이 떠나갔지만, 미행을 떨쳐 냈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저런 페이크는 자신도 할 수 있었다.
“차에 라면하고 버너가 있던가? 미리 챙겨 놓길 잘했네.”
이런 일을 예상하고 차에 많은 것을 준비해 둔 장호였다.
장호가 미행이 없다고 확신한 것은 다음 날 새벽이다.
멀리서 차에 시동이 켜지며 빨간 미등이 보였다.
그 차는 곧장 도로를 달려 사라지고 있었다.
이 시간에 낚시하다 갈 놈은 자신밖에 없었다.
‘…어디 놈들이지? 형사? 국가기관?’
“가려면 좀 일찍 가든가… 추워죽겠네. 으으으.”
게다가 이 추운 날씨에 낚시를 하겠다는 놈이 있을 리도 없었다.
누구든 간에 장호의 위장 낚시도 끝이었다.
장호는 기껏 잡아 둔 물고기를 다 풀어 주고 머물던 자리를 흔적도 없이 정리했다.
* * *
다음 날 장호의 보고를 받은 수안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해서 오늘 새벽까지 서울 외곽 호숫가에서 낚시를 하며 시간을 죽이고 돌아왔습니다.”
옆에서 배영성이 최장호를 어깨를 툭툭 치며 수고했다는 치하를 대신했다.
“새로운 2번 내연녀 얼굴이 그랬다고.”
“예. 여기도 같이 먹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일부 약을 빼돌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주 다 돌려먹었네.”
배영성은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싶었다.
“먹고 좋았으면 나눠 먹고 그러는 거죠.”
“참나… 웃기는 짜장이야. 무슨 생각으로 자기가 만드는 여자들한테. 여자를 어떻게 생각했던 놈인 거야?”
“형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니 더는 접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래. 그러는 편이 좋겠어.”
“난감합니다. 어쨌든 지시대로 손 떼고 있겠습니다.”
“맞습니다. 괜히 얽히면 문제만 커집니다.”
“그래. 어차피 상황 파악은 됐으니 손 떼도 좋아. 조동팔 쪽이야 죽기도 했고, 이미 경찰에 다 들통났으니 알아서 처리될 것이고…. 새로운 2번 내연녀 쪽도 시간문제고… 그래도 이번엔 경찰에서 제대로 압수 좀 했으면 좋겠네. 자꾸 여기저기서 약을 돌려먹고 있으니 기분이 좀 그래.”
“나중에 문제가 표면으로 드러나면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지금은 숨죽이고 있다가 나중에 다시 알아봐. 당장 급하진 않아. 급하게 움직여 봐야 괜히 문제만 일으키겠지. 최 실장은 집에 가서 쉬고 있어.”
“…집으로요?”
“곧 애 아빠잖아. 와이프 진통 시작하면 얼른 병원으로 모시고 가야지.”
“하지만….”
“최 실장이 우리 흔적이 안 남게 잘해 놨잖아. 걱정 말고 쉬어.”
“아. 예. 감사합니다.”
* * *
잘 마무리되나 싶었던 마약 사건은 다시 뉴스에서 대서특필되었다.
-다음은 또 마약 사범에 대한 소식입니다.
사망한 채로 발견된 사기꾼 조동팔의 집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대량의 마약이 다른 마약 사범을 검거하며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된 알약의 정체는 필로폰. 즉, 신종 메스암페타민의 일종으로 밝혀졌으며, 얼마 전 마약으로 인해 체포되었던 이모 씨가 보유한 마약과 동일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마약 사범의 도주로 유통과정을 찾아낼 수 없어 수사에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습니다.
경찰청은 “일반 대중에 의한 마약류 확산 차단을 위해 집중적으로 단속을 강화하고 신종 마약에 대한 단속을 전개할 예정이다”고 전했습니다.
대량으로 마약을 제조해 유통하는 일당이 경찰의 수사망에 잡히길 기원합니다.
“결국 경찰은 결국 못 잡겠다 이거 아냐?”
“그래도 약은 경찰이 회수해 다행입니다. 더는 돌려먹지 못하겠네요.”
약이 주변인으로 퍼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여기서 그친 것이 다행이었다.
“그건 다행이지.”
“그리고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주수동이 사망한 지 오래인데도 주변에 시선이 계속 머무릅니다.”
주수동의 장례를 마친 지 오래였고, 1번 내연녀와 2번 내연녀가 모두 경찰에 잡혀가며 아무도 없는 집이다. 아무도 없을 줄 알고 잠시 주변을 돌아봤던 최장호는 여전히 집을 지키는 누군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도? 그보다 거길 또 갔어? 곧 애도 나올 텐데.”
“죄송합니다. 일을 확실하게 확인하려고 간 모양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 둬. 지금은 들쑤실 때가 아니야.”
“알겠습니다. 해당 정보는 기사로만 취합하겠습니다.”
“예의 주시하다가 특이 사항 생기면 바로 보고해. 그래도 우리가 뿌린 씨앗이니까.”
“알겠습니다.”
* * *
“주수동 집에서 발견한 건 없었어?”
“예. 팀장님. 저희가 찾는 물건은 없습니다.”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주수동의 집 근처에서 대화하고 있었다.
“다른 내연녀는?”
“주수동이 근래에 만나던 여성은 경찰에 잡혀간 둘이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헤어지고 다시 만나지 않았습니다.”
“수십 명이라며?”
“한 번에 만나는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
“하나 만나기도 벅찬데. 어휴. 그럼 잡힌 둘 중에 있겠네.”
“하지만 면회로는 심문이 힘듭니다.”
“젠장… 그래도 초범이지?”
“예.”
“꺼내야겠어.”
“변호사를 붙이겠습니다.”
그 씨앗은 엉뚱한 곳에서 더욱 주시하고 있었지만, 아직 수안과 배영성이 알기엔 무리였다.
* * *
“내일 사장단 회의 잡혀 있지?”
“예. 부사장님.”
3월 말이 다가오고 있다.
결산이 마무리된 계열사들의 실적을 보고하는 사장단 회의였다.
“나름 신경 쓴 모양입니다만….”
사장단은 미리 관련 리포트를 배영성에게 보내 검토를 요청했다.
그리고 그 리포트는 수안의 손에서 다 잘려 나간 다음, 간략하고 보기 좋게 바꿔 회신했다.
“부사장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죠.”
“처음이잖아. 서로 입맛을 맞춰나가는 과정이지.”
“사장단은 부사장님이 직접 손댔을 줄은 상상도 못 할 겁니다.”
“어차피 사장단도 배 이사가 손댔다고 생각할 테니, 내년부터는 배 이사가 총괄해. 금방 배우잖아?”
“총괄은 하겠지만, 잘못하면 사장이 욕을 먹어야죠. 하하하.”
“이야. 이제 배 이사도 면피가 아주 수준급인데?”
“좀 늦게 배웠습니다. 미리미리 타박을 하셨으면 더 빨리 배웠을 겁니다.”
“흐하하. 내가 배 이사 타박할 일이 없긴 했어. 앞으로 열심히 타박 좀 해 볼까?”
“잘 기억하셔야 할 겁니다. 저 이제 배주원 아빠입니다.”
“푸흡. 아이고. 우리 미래의 대스타 아빠셨구나! 내가 잘 보이긴 해야겠네.”
“최 실장 딸은 뭐 없습니까?”
최장호도 며칠 전 아빠가 되었다.
“최 실장 딸도 엄마 닮아서 예쁘다지만… 대스타는 아무나 하나.”
“장호가 들으면 섭섭하겠는데요?”
“잘 키워서 뭐든 시키라고 해. 스타가 되겠다면 기획사에서 키워 주고, 회사원이 되겠다면 우리 회사에 받아 주면 되잖아.”
“자식들 앞날까지 다 보장해 주십니까? 하하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배 이사랑 최 실장까지는 무조건이지.”
“으하하. 그럼 둘째도 잘 부탁합니다.”
“…몇이나 나으려고? 내가 다섯까지만 허락한다.”
“그러다 우리 수애 죽어요. 둘까지만 낳으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