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너 강운에서 겨우 짭새나 움직일 것 같냐? 검찰총장도 허리를 굽히는 강운에서 고작 검사 하나 움직이는 게 어려울 것 같아? 넌 깜빵으로 직행이야 새꺄. 강운 법률팀하고 잘 상의해서 형량이나 줄여 보시든가.”
박 사장은 경찰과 함께 들이닥칠 검사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있는 죄 없는 죄 다 끄집어내면, 무사할 수 없었다.
평소 소속 배우들에게 지은 죄가 너무 많았다.
-…저, 정산 제대로 끝내겠습니다.
“경고하는데, 이 바닥에서 오래 살고 싶으면 자꾸 삐딱선 타지 마라. 내가 임 배우한테 계약금 얘기 듣고 피가 거꾸로 솟았어. 임마!”
-…앞으로 잘 좀 부탁드립니다.
“끊어. 나 바빠.”
전화를 내려놓은 김기수는 바쁜 걸음으로 회의실에 돌아갔다.
“아차차. 계약서 하나가 빠졌구나!”
사무실로 다시 뛰어가는 김기수였다.
* * *
‘정산 비율이 이게 뭐야?’
혼자 사무실에서 매니지먼트 전속 계약서를 살피던 아현은 정산 비율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예 기획사 더블 엔터테인먼트 주식회사 대표 이사 김기수(이하 “갑”이라 한다)와 연예인 임아현(이하 “을”이라 한다)은 아래와 같이 연예 계약을 체결한다.]
…중략….
제3조 [수익 분배]
1. “갑”은 본 계약에 따른 “을”의 국내 및 국외 연예 활동 수익의 95%를 “을”에게 지불한다. 단, 소득세법상 근로 소득 원천 징수를 하도록 한다.
2. 제1항의 수익금 지급은 연예 활동에 따른 대금 지급일로부터 15일 이내에 현금 지급이 완료되어야 한다.
…후략….
“95퍼센트? 진짜 95퍼센트라고?”
6 대 4만 해도 좋은 계약이라고 생각했는데, 95퍼센트를 받을 줄은 몰랐다.
“이렇게 해도 회사에 이득이 남아?”
다른 독소 조항도 전혀 없었다.
갑이 주관하거나 주최하는 행사에 무상 출연을 강요하는 조항도 없었고, 사생활에 대한 내용도 완벽하게 보장하고 있었으며 손해 배상 조항도 없었다.
이름만 갑과 을로 분리했을 뿐이지, 계약서는 철저하게 을이 상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모든 조항에 나온 연예 활동이 을의 동의가 필요했다.
똑똑.
“아이고 늦었습니다. 제가 깜빡한 서류가 있었네요. 하하하.”
“이 계약서… 진짜예요?”
아현의 손에 계약서가 팔랑거리고 있다.
“계약금만 5억으로 수정하면 정상적인 계약서 맞습니다. 제가 방금 새로 뽑아 왔습니다.”
집무실에 들어간 김에 수정한 계약서를 2부 뽑아왔다.
새로운 계약서도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5억…. 계약금도 정산에 포함하지 않는다고 나와 있는데요?”
“말 그대로 계약금이죠. 나중에 정산에 넣지 않습니다.”
“와아….”
“그리고 이 계약서도 살펴보신 다음 사인을 부탁드립니다.”
“…다른 계약서요?”
“근로 계약입니다.”
“네?”
전속 계약을 하는데 근로 계약이 무슨 말인가 싶었다.
“더블 엔터 이사로 시작하시면 되겠습니다. 매월 정기적인 급여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김기수는 철저하게 준비했다.
임아현과 맺을 전속 계약은 기본이고, 회사의 이사로 끌어들일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이, 이사요?”
이사는 집을 이사할 때나 쓰는 단어였다. 자신이 이사로 직장 생활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해 봤다.
“등기 이사로 등재되는 것은 정기 주주 총회에 의안으로 상정하겠습니다. 3월 말에 어차피 주총이 예정되어 있으니 그때 법인등기부상에 오르실 겁니다.”
아현 입장에선 엄청난 대우였다.
“강 실장님이 곧 CF 몇 건을 중개해 주신다고 하셨으니 얼른 계약 마무리하시고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를 만나시죠. 그 외에 필요하신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최대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어제 일… 누가 알고 있죠?”
김기수 사장은 확실했고, 그 외에 누가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 저와 경호원은 당연하고, 임 배우님의 전담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후우… 알겠어요.”
스슥.
계약서마다 사인을 마친 아현은 김 사장에게 부탁했다.
“수안 씨에게 내가 보자 한다고 연락해 주세요.”
연락처도 주지 않고 간 수안 때문에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예. 제가 연락드리고 매니저를 통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설마 연락처가 없어서 대신해 달라고 했을 거라곤 생각할 순 없었다.
강운가 예비 맏며느리로서 당연한 지시를 한다고 생각했다.
“아! 지난 소속사에서 정산으로 빼먹은 계약금은 오늘 중으로 입금될 겁니다. 박 사장은 제가 따끔하게 혼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 돈까지 받아 올 줄은….’
“그럼 잠시 기다리시면 제가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를 불러오겠습니다.”
아현은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이 움직인다.
‘위치가 달라진다는 게. 이런 뜻인가?’
단 하루였다.
어제 이 자리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수안을 만났는데, 오늘은 그렇게 커 보이던 더블 엔터의 사장이 허리를 굽히며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상전벽해. 신인 배우에서 갑자기 톱스타로 대우가 변해 버렸다. 당대 톱스타인 여배우 윤혜린도 자신만큼 대우받지는 못할 터였다.
전담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를 소개받고 자신이 타고 다닐 차량도 배정받았다.
수안은 저녁을 함께하자며 호텔 레스토랑으로 약속 장소를 잡았고, 아현은 매니저를 통해 그 내용을 전달받았다.
* * *
한적한 고려 호텔 레스토랑.
수안이 창가 자리에서 도시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아현은 수안의 뒷모습을 보고 조용히 다가와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흠흠… 수안 씨.”
“어서 와. 아현 씨. 이리 앉아.”
벌떡 일어나 인사하고 의자를 빼 주는 수안이다.
수안은 아현을 만나는 지금 이 순간, 아찔할 정도의 아드레날린을 느끼고 있었다.
‘재벌 최고다. 다시 태어나도 재벌하고 싶어.’
재벌가 자손이 아니었다면 아현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수안이 과격하게 일을 진행시킬 수 있는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고마워요.”
여러 의미가 담긴 감사 인사였다.
“별말씀을.”
수안의 시원한 미소가 아현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수안 씨. 너무했어요. 미리 말이라도 해 주죠.”
더블 엔터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는 것이다.
기존 소속사와의 계약 해지에 집으로 찾아온 경호원, 새로운 전속 계약과 거액의 계약금에 이사 직급까지 정신없이 몰아쳤다.
어제나 다름없이 정신이 쏙 빠져 버린 아현이었다.
“푸흐. 미안. 나도 정신없어서 아현 씨 연락처도 못 받은 거 있지? 미리 연락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있어야지. 김 사장이 잘해 주던가?”
“…계약금도 넉넉하게 받았고, 기존 계약도 잘 마무리해 주셨어요.”
넉넉하게 5억을 받았다. 덕분에 통장 앞자리 수가 새로 추가되었다.
“다행이네.”
“그래도 더블 엔터 이사는 너무했어요. 어떻게 날 이사로 올릴 생각을 했어요?”
수안은 아현을 이사로 올린다는 계획을 하지 않았지만, 듣고 보니 상당히 괜찮았다.
“아… 김 사장이 독단적으로 진행한 모양인데… 생각보다 더 잘했네.”
“…그랬어요?”
“김 사장 자신만만해하더라고, 맡겨 두길 잘했어. 난 생각도 못 했거든. 김 사장 오래 써먹어야겠네. 하하하.”
“하루아침에 톱스타가 된 기분이에요.”
“나에겐 언제나 아현이 최고의 스타야.”
“…윤혜린보다요?”
“풋. 어딜 아현에게 갖다 붙여? 비교도 안 되지. 어림도 없어.”
“후훗. 기분은 좋네요.”
직원이 다가와 차를 따르는 동안 수안은 잠시 후에 있을 불청객을 미리 알렸다.
“이따 누가 오기로 했어. 여자.”
“…가족이에요?”
“눈치 빠르네. 하하. 어제 자기 없는 사이에 새언니 될 사람 다녀갔다고 하니까 무척 궁금해했거든. 마침 여기가 녀석이 일하는 곳이라 온다고 했어. 여동생 이름은 수현.”
수안은 아현이 오기 전, 여동생 수현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
.
“어제 오빠 애인 집에 데려왔다며?”
“소문이 잘못 났네. 애인이 아니라 신붓감이야.”
“하! 누구 만난다는 말도 없었으면서!”
“네가 관심이나 있었냐?”
당일에 만나서 집으로 데려왔으니, 관심이 있었다 해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예뻐?”
여자의 관심사는 일관적이다.
“예쁘지.”
“나보다?”
“너보다 요만큼 더 예뻐.”
수안의 검지와 엄지가 조금 많이 벌어졌다.
“쳇! 언제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했으면서! 물론 엄마 다음 이랬지만….”
여동생들을 예뻐하던 수안이다. 특히 수현에겐 세상에서 엄마 다음으로 제일 예쁘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만고불변의 최고 미인이었다.
“너도 보면 알겠지.”
“조금 이따 여기 온다고 했지? 내가 직접 확인하겠어!”
“그러든가.”
.
.
.
잠시 후엔 수현이 새언니를 보러 내려올 터였다.
“나 그냥 나왔는데. 메이크업이라도 받고 나올걸.”
“어휴. 당신은 풀 메이크업 보단 지금처럼 가볍고 투명한 화장이 더 잘 어울려. 괜찮아.”
“칭찬만 하지 말아요. 너무 높이 띄우면 떨어질 때 아프다고요.”
“히힛.”
재미없는 고전 유머도 여배우 입에서 나오니 너무 재미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한 유머였다.
조용한 레스토랑에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든 수안은 수현을 발견했다.
“어서 와. 수현아.”
“어. 오빠. 이쪽이 새언니 되실 분?”
수현의 눈에 우아한 자태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몸을 돌려 인사하는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여성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수현은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수안 씨 동생분이시라고 들었어요. 임아현입니다.”
“…우아.”
아현은 평소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평범하게 인사했을 뿐이다.
“새언니 인사 안 받니? 세상에서 세 번째로 예쁜 동생아?”
“아! 안녕하세요. 저는 수안 오빠 둘째 여동생 강수현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예의를 차린 미소였지만, 그마저도 아름다웠다.
“오빠가 예쁘다고 할 만했네요.”
예뻐 봐야 얼마나 예쁠까 싶었는데, 실물은 미스코리아도 쌈 싸 먹을 정도다.
“감사해요. 호호….”
“묘하게 얼굴이 익어요.”
“배우로 활동하고 있어요. 아직 많은 작품을 하진 못했고요.”
“아~ 배우셨구나? 그러고 보니 기억나요.”
사실 기억나진 않았다.
‘다른 재벌가 자제가 아니고, 별것도 아닌 배우를 아버지 어머니가 허락하셨단 말이야?’
“서 있지 말고 앉지?”
수안이 말하자 수현은 손을 내저었다.
“내가 이 사이에 앉으면 오징어 저리 가라 아니겠어? 오늘은 새언니와 안면만 익히려고 온 거야. 아현 씨. 반가웠어요. 또 봐요.”
“네. 또 봬요.”
“날짜 빨리 잡았으면 좋겠네요. 호호호.”
수현은 둘에게 멀어지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처가에서 아무런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야. 꼭 밀어붙여야 해.’
자신의 오빠가 재벌가를 처가로 맞이하면 경영권을 차지하는 데 큰 힘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반인을 배우자로 맞이한다면 자신들이 힘을 모아 대항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미국에 있는 언니한테 알려 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