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계약
수안은 다음 날 다시 더블 엔터를 찾았다.
“흐흐. 어젠 즐거우셨습니까?”
김기수 사장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안다는 식으로 실눈을 뜨고 물었다.
“즐겁기는… 일생일대 사건인데.”
“…사건이요?”
‘경찰? 검찰? 강제로 해서 문제가 됐나? 젠장! 겨우 한 번 가지고 고발을 해?’
“아현 씨 소속사 연락해서 소속을 이쪽으로 바꿔요.”
“어휴. 아예 회사로 들이시려고요? 위약금이 있을 텐데. 그래도 빨리 무마하려면 그게 좋겠습니다. 강운 그룹 법무팀에는 미리 얘기하셨죠?”
“무마는 무슨… 얼마든 상관없습니다. 다 지불하고 데려와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입도 뻥끗 못 하게 만들겠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임아현 씨는 훗날 강운가 안주인 될 사람입니다. 잘 모셔요. 예의 어긋나지 않게 말조심부터 하시고.”
“…예, 옛?”
“아현 씨 어제 집에 데려가서 인사시키고 회장님께 허락받았습니다.”
“허업!”
“그런 줄 알아요. 밖에는 소문 안 나게 조심하시면 됩니다.”
“아, 안주인이시라고요?”
“나중 일이죠. 지금은 내 어머니가 안주인이고.”
‘그게 그 말 아닙니까….’
김기수는 수안이 임아현을 만난 것이 어제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몰래 만나오다가 더는 숨기지 못하고 임아현을 본인 소유 소속사로 데려온다는 결론이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인수한 이유도 임아현 때문일지 몰랐다.
“앞으로 아현 씨 스케쥴 루즈하게 잡고, 잡스러운 놈들 붙지 않게 잘 관리해요. 경호원 짱짱하게 붙이고… 아니다, 경호원은 내가 붙이는 편이 좋겠네. 그리고 최상급 연예인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계약서는 아예 다시 써야 하는 건 알죠?”
“맡겨 주십시오!”
SN 엔터 이수남에 밀리지 않을 절호의 기회였다.
“흐음…. 김 사장님이 자신 없으면 SN에 넘기시고.”
“SN은 안 됩니다! 제가 이런 쪽은 전문입니다! 사모님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겠습니다! 이수남은 저에 비하면 햇병아리 수준입니다!”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할 때였다. 수안이 할 말만 마치고 사라지자 김기수는 곧장 임아현의 소속사로 향했다.
* * *
“박 사장. 나 왔어.”
“어휴. 김 사장님. 여기까지 와주셨습니까?”
박 사장은 웃으며 반겼지만, 속으론 웃을 수 없었다.
‘…또 무슨 얘길 하려고….’
어제도 소속사 여배우를 윽박지르듯이 데려간 김기수다.
“어제 내가 급하게 배우 하나 빼갔잖아. 미안해서 선물 사 왔지.”
“아…. 별일 없었죠? 우리 기획사 뜨는 신인 배우입니다. 제발 위에 말 좀 잘해 주세요. 이런 일로 충격받으면 다시 못 일어설 수도 있단 말입니다.”
누가 채갈까 아껴온 신인 여배우를 이대로 포기하긴 어려웠다.
돈을 벌어다 줄 주요 인력이 빠져나가는 일이었다.
“누가 어쩔까 봐 그렇게 겁을 내?”
“…제가 척하면 척이죠.”
박 사장도 아현이 왜 불려갔는지 짐작한다는 투로 얘기했다.
‘분명… 돈 많은 놈팡이에게 연결하려고 데려갔겠지.’
“그럼 내가 오늘 온 이유도 알겠네.”
“…혹시 아현이 거절해서 그렇습니까? 앞으로 활동 어려워지는 건가요?”
지레짐작했지만, 생각한 방향과는 달랐다.
“깔끔하게 계약 해지하고, 임 배우는 우리 더블 엔터로 넘기자.”
“김 사장님!”
그건 안 될 말이었다.
“나 귀 안 먹었어. 이 사람아.”
“그건 안 되죠. 이제 막 크는 신인 여배우를 빼 가시면….”
“너… 강운하고 싸울 자신 있어? 참고로 나도 자신 없다.”
“…….”
“강운 첫째 도련님이 콕 짚었는데, 네가 감당할 수 있겠냐고.”
“가, 강운이었습니까?”
잠깐 사이 박 사장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제발 우리 아현이 남겨 주십시오. 제가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이제 크게 키워 주실 것 아닙니까.”
“누가 잡아먹냐? 그러니까 계약을 해지하시라니까. 내가 위약금도 챙겨 줄게.”
“…위약금도 챙겨 주시려고요?”
위약금을 챙겨 준다면 말이 다르다. 미래가 불확실한 배우의 소득보다 계약금의 2배에 이르는 위약금을 받으면 다른 소속 배우들을 지원할 수 있었다.
“…위약금은 다 챙겨 준다. 어때?”
“정말이죠?”
“너 우리 더블 엔터 몰라? 우리 모회사가 더블 스타고. 그 더블 스타 오너가 바로 강운 장남이야. 자금력을 의심할 필요가 없지.”
“아현이는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박 사장이 뭘 생각하든 그 이상이지.”
조만간 수안과 맺어져 강운 그룹 로열패밀리가 될 사람이니 박 사장의 상상이 도달하기 어렵다. 김기수는 비밀 엄수 때문에 말하지 못해 입이 근질거렸다.
“하아….”
“잘 생각해. 여기 소속된 배우가 그녀뿐이 아니잖아. 다른 친구들 키우려면 돈도 많이 필요할 테고…. 지금은 위약금까지 챙겨 주고 데려간다지만, 계속 거절하면 나도 더 못 막아. 더블 스타 산하에 기획사만 둘이다. 나랑 SN 엔터 이수남이 지금까지 방송국에 처바른 돈이 얼만지 알아? 우리 한마디면 방송국 PD들이 여기 배우들 써 주겠어? 그땐 여기 소속 배우들 갈 곳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나 분명히 얘기했어.”
김기수의 어르고 달래는 솜씨가 일품이다.
“…계약금은 5천이었습니다. 위약금은 계약금의 두 배인 1억이고요.”
“잘 생각했어. 당장 계약서랑 배우 일정 넘겨. 바로 1억 쏴 준다.”
아현이 알기도 전에 소속사 변경은 빠르게 처리되었고, 아현은 새로운 소속사로 옮겨야 했다.
* * *
아현은 점심 무렵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현 씨. 계약 자체가 더블엔터로 넘어가서 말이지…. 위약금도 더블엔터에서 전부 지급했어. 그러니까 아현은 자리만 옮기면 될 거야.
“아. 그러셨어요?”
아현도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지만, 짐작하고 있던 일이다.
-거… 미안하게 됐어.
“알았어요. 박 사장님. 그간…. 수고 많으셨어요.”
연예계는 한 다리 건너 다 아는 사이다.
소속사에서 지금까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해 욕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소문이 어떻게 퍼질지 몰라 차마 욕을 할 수는 없었다.
-괜찮지?
“…앞으로 좋은 일이 있겠죠.”
-이제 앞으로 더블 엔터로 가서 관리…. 받으면 될 거야.
그 관리가 무슨 관리인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재벌가의 노리개가 될 거라 판단하고 있었다.
“…음. 네. 알겠어요. 끊을게요.”
전화를 끝낸 아현은 옆에서 무슨 소린지 듣고 있던 어머니에게 설명했다.
“소속사 계약 해지됐대.”
“어엉?”
“수안 씨 회사에서 소유한 기획사로 옮기라고 하네.”
“…강수안 선수가 연예 기획사도 갖고 있어?”
어머니와 대화 중에 초인종 소리에 밖에 나갔던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아현아. 밖에 사람들이 와 있는데?”
“…누구?”
“더블 엔터에서 왔다네? 원래 소속사 아니지?”
“아… 저 내려가 볼게요. 수안 씨 회사예요.”
아현은 얼른 내려가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현의 인사에 경호원들이 화들짝 놀라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경호원 중 하나가 나서서 자신을 소개했다.
“오늘부터 임아현 배우님 경호를 담당할 정주한 팀장입니다. 그리고 저 외에 셋이 경호 인력으로 배치되었고,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는 회사로 가셔서 만나시면 됩니다.”
정주한 팀장을 포함해 경호원 넷이 상시 배치되고, 스타를 관리하기 위한 전담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까지 일사천리로 준비한 김기수 사장이었다.
“경호원이요?”
“…회사로 모시겠습니다.”
아현은 어색하게 차에 탑승해 더블 엔터로 향했다.
더블 엔터 건물 밖에 나와서 이제나저제나 아현을 기다리던 김기수 사장은 들어오는 차량을 보고 인사부터 박았다.
차에서 내려 나이 든 사람의 휑한 정수리를 보고 있자니 하루 사이에 뒤바뀐 자신의 위치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임 배우님. 들어가시죠.”
아현은 고개를 든 남자가 더블 엔터의 김기수 사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 사장님?”
“어제 뵙고 또 뵙습니다. 하하하.”
어제는 고작 신인 여배우였지만 오늘은 미래의 강운 사모님이었다.
아현은 김 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저희 더블 엔터는 앞으로 임 배우님께 최적의 환경을 마련해 드릴 겁니다.”
“네….”
“새로운 계약부터 진행하시죠.”
회의실에 마주 앉은 김기수 사장은 계약서부터 꺼내 들었다.
“…살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조항이 있다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곧장 수정해 올리겠습니다.”
보통 소속사 마음대로 진행되는 계약이다. 사인만 하라고 강요하는 곳도 많았다. 받지도 않은 계약금이 기입되어 있기도 했고, 일방 해지 때는 그 계약금을 배로 토해내는 것은 물론이다. 거기다 그간 활동하며 사용한 회사의 비용까지 부담해야 했다.
아현도 그 전 소속사와의 계약을 그렇게 진행했었다.
“계약금이… 제가 잘못 본 건가요?”
“적으신가요?”
‘0 하나를 더 붙어야 했나?’
“1억이라뇨.”
“일전에 5천을 받으셨다고 해서 딱 두 배만 적었는데…. 수정하겠습니다.”
“5천이요? 전 그런 계약금 구경도 못 했어요.”
“네? 5천…. 안 받으셨습니까?”
김기수 사장은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항상 하던 일이다.
급하게 계약을 해지하느라 당연한 의심을 하지 못했다.
“…그럼 얼마 받으셨습니까?”
김기수는 박 사장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다.
“계약금은 5백 받았었고, 그 뒤로 정산하면서 차감했어요.”
“…박 사장 이누무시키가… 잠깐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계약금은 수정해 오겠습니다. 계약서 나머지 부분을 살피고 계십시오.”
“…….”
* * *
“…박 사장. 내가 박 사장 좋게 봤는데 오늘 뒤통수 씨게 맞았네?”
-…뒤통수라뇨?
시치미 뗐지만 무슨 말일지 뻔히 짐작했다.
“계약금 5천 줬다며?”
-계약할 때 그렇게 했습니다.
“계약서 말고 진짜로 준 금액은 뭔데? 5백? 내가 이래도 뒤통수를 안 맞았다고?”
-에이. 다들 그렇게 하잖습니까. 위약금 다 주신다고 하셔 놓고….
“겨우 5백 줘 놓고, 그것도 나중에 정산에서 다 깠으면서. 나한테 1억을 받아 가? 너 진짜 쓴맛 좀 볼래? 너 내 승질 몰라?!!”
-…아휴. 제가 김 사장님 챙겨 주려고 일부러 그랬죠.
‘살려면 이 수밖에 없다.’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1억을 받았다고 전부 꿀꺽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가 3천은 김 사장님 챙겨 드리려고 빼놓지 않았겠습니까.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제가 전달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습죠.
아무런 말도 없으면 그냥 꿀꺽할 생각이었다.
“…….”
김 사장은 잠시 욕심이 동했지만, 모회사인 더블 스타의 정기 감사가 그의 족쇄였다. 만약 이 일이 탄로 난다면 그날로 대표 자리에서 아웃이었다.
‘앞으로 몇 년 대표로 있으면 그깟 삼천 아무것도 아냐.’
“헛소리 집어치워. 정산 다시 한다. 넌 임 배우에게 정산으로 빼먹은 계약금 5백을 제대로 다시 지급하고, 기존 계약금 5백으로 계산한 위약금 1천만 받는다. 9천은 반납. 선택지 없어.”
-김 사장님!!
“오늘 중으로 임 배우에게 지급 안 되면….”
-…안 주면 어떻게 됩니까?
“하! 마음대로 해라. 뒷일은 이제 나도 몰라. 대신, 갑자기 검찰에서 너 잡으러 와도 놀라지 마라. 알았냐?”
녀석이 주는 쥐약을 덥석 먹었다간 박 사장 대신 자신이 검사와 마주할 수도 있는 일이다.
-경찰도 아니고. 검찰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