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올림픽
“회장님이 오케이 했어.”
“하하. 역시 도련님 말씀이면 안 되는 일이 없네요.”
“사전 경영자 수업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이번 일로 실망하게 하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하시더라.”
“그럴 일은 없습니다. 이미 해외에….”
“그만. 그 얘긴 특별히 조심해. 어디서 누가 듣고 있을지 몰라.”
“예. 알겠습니다. 덩치가 자꾸만 커지고 있어서 안 그래도 보안에 더 신경 쓰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에 꾸린 투자사의 덩치가 커져서 뒤를 캐는 존재들도 생기고 있었다.
두 회사를 소유한 회사를 엉뚱한 나라에 만들었기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뿐이다.
아직은 미국과 일본에 위치한 기업들의 관심만 받고 있으니 걱정은 덜하지만, 한번 밝혀지면 한국까지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저는 이만 자리를 교체하겠습니다.”
“됐어. 배 실장은 여기 그대로 앉아 있어.”
“네?”
“배 실장을 내 옆에 두겠다고 회장님께 말씀드렸어. 그러니 오늘부터 배 실장은 운전병에서 보직 변경이야.”
“이야. 축하드립니다. 실장님.”
운전하던 최장호가 배영성에게 축하를 건넨다.
“하하… 드디어 운전에서 벗어나네요. 흐하하.”
“이봐. 좋아할 거면서.”
“도련님 곁에 남으니까 좋은 겁니다.”
“어쭈? 벌써 처세까지 배웠어?”
집에 도착하자 배영성이 먼저 차에서 내려 문을 연다.
“운전기사 졸업이라니까 그러네.”
“몸이 절로 움직입니다. 하하하.”
수안은 장호가 차를 주차하는 사이 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배영성의 재킷 주머니에 얼른 넣었다.
“장호 몰래 준비한 전별금이야. 나름 운전기사와 일별하는 날이잖아. 애인하고 맛있는 거 사 먹어.”
“도련님….”
“얼마 안 넣었으니까 적다고 불평하지 말고.”
“그게 아니라. 애인이라도 생기면 주시든가요.”
“아직도 안 만들고 뭐 했어? 배 실장 내일모레면 마흔이야.”
“윽. 집에서 맨날 듣는 소립니다. 듣기 싫어 죽겠습니다. 누군 안 만나고 싶답니까?”
“임을 봐야 뽕을 딸 것 아닌가. 선이라도 나가 보고 그런 소리를 해.”
“…앞으로 나가 보겠습니다.”
“국내에 설립할 회사에 임원으로 이름 올리고 있어. 간판이 그럴싸하면 결혼도 금방이야.”
“감사합니다!”
“이제 겨우 이사로 시작이야. 벌써 고마워하면 나중에 어쩌려고?”
“하하하.”
수안은 2차 사법 시험을 치르고 다시 합격 통보를 받았으며, 그 후로 올림픽 준비에 돌입했다.
수안이 올림픽을 준비하는 동안 수안의 사법 고시 합격 소식이 신문에도 등장했다.
[88올림픽 육상 2관왕 강수안 선수. 사법 시험 2차 합격!]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육상 2관왕을 차지하며 크게 이름을 알린 강수안 선수는 올해 한국대 법학과에 수석 입학하며 뛰어난 두뇌를 입증했다. 강수안 선수는 한국대 법학과에 괜히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듯이 곧장 제33회 사법 시험을 치르고 1차에 합격하였으며 이번에 치러진 2차 시험까지 동차 합격. 스스로 문무에 뛰어난 인물임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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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강수안 선수는 내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릴 올림픽 경기를 준비하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의 행보가 사뭇 기대되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부디 그의 땀이 헛되지 않길 바란다.
* * *
“워매. 야는 못 하는 게 뭐여?”
“뭔 일 있당가?”
시골에서 신문을 보던 사람이 동네 사람을 붙잡았다.
“신문 좀 봐바. 강수안이가 사법 고시를 합격했댜.”
“육상 뛰는 강수안이 말이여?”
“한국대 법학과를 갔다는 얘길 들은 게 얼마 전인디….”
“바로 사법 고시까정 봤다고? 근디 합격까지 해 부렀고?”
“그려. 아이고 배야….”
“나도 아랫배가 슬슬 아픈 것이….”
배가 아플 정도로 부럽다는 뜻이다.
“부러워 죽갔네.”
“우리 아들래미는 대학이나 갈 수 있을랑가….”
“누구는 금메달을 두 개나 따고도 한국대 법학과를 가서….”
“사법 고시까정 단번에 합격하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은 맨날 놀기만 하는디… 이누무시키 다리 몽둥이를 가만두면 안 되것어!”
“나도 집에 좀 가 봐야 쓰겄네.”
부러움에 가득한 아빠들이 자식을 쥐 잡듯이 잡기 시작했다.
어머니들도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걸리기 전에 어머니를 먼저 거쳐야 했다.
“쟈는 아부지가 강운 그룹 회장이잖유! 돈 많응께 뭐든 하쥬.”
“…그랴서. 집이 가난한 너는 못 하긋다. 이 소리여 시방?”
“갑자기 나보고 한국대를 가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 이 소리쥬.”
쾅.
아버지가 씩씩거리면서 들어오는 모습에 아들의 태도가 순간 바뀌었다.
“지도 할라고요. 지금부터 열심히 하것습니다. 오마니.”
어머니는 어떻게든 비벼 볼 수 있지만, 아버지는 무시무시했다.
“이누무시키 일루와 바!”
아버지는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상식이 아부지. 야가 인자 공부한다고 했슈.”
“진짜로 열심히 할쳐?”
“나도 한국대 가야지유.”
“…진짜로?”
“노력은 해 보것슈.”
“애비가 딴 거 안 바랴. 네가 금메달이 가낭키나 혀? 글고 한국대까지도 안 바랴! 대신에 갸처럼 사법 고시만 합격하자. 으잉?”
“사법 고시… 라고라….”
“왜. 못 하긋냐?”
척.
아비 손에 들린 몽둥이가 손바닥에 올라가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 해야지유. 못할 게 뭐 있어유.”
공수표야 얼마든지 남발할 수 있다.
“두고 보자잉? 으잉?”
“야. 알았시유.”
‘내가 사법 고시를 무슨 수로 붙는단 말이유. 날고 긴다는 놈들이 다 보는 사법 고신디….’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애지중지 키우는 소까지 팔아가며 학비를 대는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해 볼 생각이다.
상식이와 같은 상황에 놓인 자식들의 볼멘소리가 전국에서 울린 날이다.
“강 선수는 정도껏 하쇼! 내가 강 선수 때문에 이게 뭔 꼬라지여!”
* * *
“훅. 훅. 훅.”
“너는 어째 텐션이 그대로 유지되냐? 한참 쉬었는데도 기록이 오히려 좋아져?”
임경남은 자전거를 타고 옆에서 달리며 물었다.
이젠 코치가 아니라 감독이라고 불러야 했다.
“쉬긴 뭘 쉬어요? 훅. 훅. 임 감독님. 나 말고 황 형이나 잘 봐줘요… 훅. 훅.”
강운 그룹은 수안이 육상 2관왕을 차지한 지난 올림픽 이후 육상 실업팀을 만들었다.
수안이 말하는 황 형은 황형조 선수였고, 내년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차지할 선수였다. 황형조 선수는 수안의 적극적인 추천에 따라 영입되었다.
강운 육상 실업팀에 임경남이 감독으로 영입된 것도 당연히 수안의 입김이다.
“형조는 네 옆에서 잘 뛰고 있잖아. 그리고 넌 왜 마라토너 훈련을 같이하고 있어? 넌 단거리를 연습해야지?”
“훅. 훅. 훅.”
황형조 선수는 수안 옆에서 페이스를 잃지 않기 위해 대화에 끼어들지도 않았다.
“황 형이 훅. 훅. 마라톤은 진짜 끝장이라고 훅. 훅. 나라도 훈련을 도와줘야지. 훅. 훅. 형은 금메달감이야. 훅. 훅.”
“출전권은 확보됐으니까 됐다 이거야? 너도 이제 스퍼트를 내자.”
수안은 임 감독의 말을 들으며 훈련만 이어 갔다.
항상 달리다 보니 하루라도 달리지 않으면 몸에 좀이 쑤실 지경이다.
이번 올림픽이 끝나더라도 수안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스퍼트! 속도 올려!”
“훅. 훅. 훅.”
텀을 두고 빠른 속도와 느린 속도를 반복하며 몸을 단련하는 수안이다. 옆에 있던 황형조 선수도 덩달아 스퍼트를 올리며 고된 훈련을 이어 갔다.
올림픽은 금방 다가왔다.
처음으로 화살에 불을 붙여 쏘아서 성화를 켠 바르셀로나 올림픽이다.
수안도 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 성화 봉송에 참여했다.
올림픽 대회 첫날 열린 여자 공기소총 10m에서 대한민국 여을순 선수가 금메달을 따냈다.
대회 당일부터 대한민국의 열기는 뜨거웠다.
그리고 수안의 차례가 다가왔다.
“여기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육상 경기장입니다. 강수안 선수가 100m 결승을 앞두고 몸을 풀고 있습니다.”
“전 국민들의 염원이 강수안 선수에게 향하고 있지요. 그리고 해외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강 선수입니다. 세계의 염원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수 호명하고 있습니다. 강수안 선수 전혀 긴장하고 있는 것 같지 않군요. 얼굴이 상당히 편안해 보입니다.”
“과도한 긴장은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강수안 선수는 이번이 두 번째 올림픽 출전이니 긴장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만큼 경력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고작 21살의 나이지만 올림픽 2회 차 선수이고 그간 세계 선수권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냈습니다. 강 선수가 관객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군요. 온몸에 여유가 철철 넘치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죠.”
“선수들 출발선에 섰습니다. 남 해설위원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부정 출발을 가장 조심해야죠. 본인이 아니라도 다른 선수가 부정 출발을 하면 전체적인 리듬이 깨질 수 있는 일입니다.”
탕!
“역시 치고 나옵니다! 강수안!!”
“빠릅니다! 빨라요! 어마어마한 훈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더 빠르게 느껴집니다.”
“강수아아아아안! 가장 먼저 결승선 통과합니다! 금메달! 강수안 선수가 다시 금메달을 획득하는 순간입니다! 올림픽 남자 100m 2연패의 쾌거입니다! 대한민국 강수아아아안!!”
“느린 화면 나오고 있습니다. 후발 주자와 비교할 필요도 없는 일이죠.”
“기록 나옵니다! 9초59! 강수안 선수 다시 한국 신기록과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웁니다! 지난 올림픽에서 자신이 세웠던 기록이죠. 오늘의 강수안이 어제의 강수안을 이겼습니다. 국민의 염원과 전 세계인의 염원을 기꺼이 들어 주는 강 선수입니다!”
“대한민국 강수안 선수. 기록판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팔을 벌리며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최고라 이겁니다! 지금 기자들이 찍고 있는 사진이 내일 전 세계 신문에 1면으로 장식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강수안 선수가 대한민국의 이름을 세계만방에 떨치고 있습니다!”
수안은 며칠 뒤 열린 200m 경기에서도 세계 신기록을 0.11초 앞당기며 19초11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가장 선두로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년 만에 다시 이뤄낸 올림픽 2관왕이다.
대한민국이 들썩거리고 올림픽 경기를 시청하던 전 세계인들도 환호했다.
하지만 수안은 올림픽 금메달이 이제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제 진짜로 그만해야겠다.’
금메달보다 기업을 경영하고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더 짜릿했다.
마지막 날 열린 남자 마라톤에 황형조 선수가 출전했다.
수안은 같은 실업팀에 속한 황형조를 응원하고 있었다.
‘결과를 알고 있는데도 이 모양이라니.’
마의 구간이라는 30km 지점에 위치한 몬주익 언덕에서 남은 선두 그룹은 일본의 모리타시 선수와 황형조였다.
서로 치고받으며 서로 치열하게 접전하던 두 사람의 승부는 역시나 황형조의 몫으로 돌아갔다.
일본과의 경쟁이라 국민들의 시선도 마라톤 중계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했고, 두 팔을 번쩍 들고 결승 라인을 통과하는 황형조의 모습이 전 국민의 눈에 각인되었다.
“대한민국 황형조 선수! 금메달! 금메달입니다!”
“손기정 선수가 56년 전 8월 9일 금메달을 땄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1992년 8월 9일! 황형조 선수가 대한민국에 마라톤 금메달을 안겨줍니다! 게다가 2위가 일본인 모리타시 선수와의 접전이었죠. 의미 있는 금메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황형조 선수가 금메달을 땀으로써, 이 대회의 첫 금메달과 마지막 금메달이 모두 대한민국의 차지가 되었다.
거기다 100m, 200m를 다시 석권한 강수안의 존재로 인해서 1992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일견 대한민국의 올림픽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