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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 (12/304)

쇼핑

“무슨 말이긴. 네 혼처에 관련한 말이지.”

“아….”

속으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후아… 다행이다.’

강운 그룹 사장단의 일이나 투자 회사에 대한 건은 아니었다.

“그런데. 혼처요?”

더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너를 사위로 삼고 싶다고 난리다.”

수안이 어려운 집에서 자란 스포츠 스타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수안은 해마다 대한민국 재계 순위를 치고 올라가는 강운 그룹의 맏이였다. 미리부터 수안을 사위 삼고자 하는 총수들의 러브 콜이 강운모 회장에게 쏟아지고 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수안에겐 무조건 감사할 일이다.

“…….”

강운모 회장은 싫은 티라도 낼 줄 알았던 장남 얼굴에 화색이 돌자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략 결혼… 괜찮으냐? 내년에 고작 스무 살이야.”

“어휴. 부모님이 자식 혼삿길까지 걱정해서 챙겨 주시는데, 자식으로서 황공한 일입니다.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젊은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일찍 결혼하면 애도 일찍 낳고 좋습니다.”

안 그래도 엄두가 나지 않던 연애다.

지난 생에 여자는 노가다하다가 어쩌다 한 번씩, 화려한 빨간 조명 속에서 만난 여인이 끝이다.

반짝 욕구만 해결하고 끝나 버린 여성 편력이 전부인 금용에게 연애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연애에 이은 결혼? 그리고 자신의 아이? 전생엔 꿈도 꾸지 못했다.

배 실장의 늦은 결혼을 탓하는 이면에는 스스로를 향한 걱정도 들어 있었다.

집안에서 혼처를 정해 준다면 수안에겐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어련히 알아서 잘 고르시겠지.’

까다롭기 그지없는 아버지의 성격상 며느리 될 사람을 함부로 고르지는 않을 터였다.

“어…. 그래. 내가 네 어머니와 비서실을 통해서 잘 찾아보마.”

“수고스러운 일일 텐데… 민망스럽습니다. 하하하.”

다른 자식들은 대학에 가기도 전 술, 담배에 심하면 여자애를 임신시키거나 마약에 손을 대는 놈도 있는데 수안은 말 그대로 모범생이었다. 거기다 올림픽에 나가 두 개의 금메달까지 목에 건 국민적 스타였다. 다른 재벌 일가의 자식은 학교에서 하루가 멀다고 말썽을 부려 문제인데, 수안은 학교생활까지 원만해서 친구들과 잘 어울린다는 소리가 들린다.

‘너무 순종적이고 착해빠졌어.’

강운모 회장은 아들을 잘 길렀다 싶으면서도 투쟁심이나 경쟁심이 없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지경이다. 성격이 너무 무른 것은 경영자에게 단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 다음 올림픽이 끝나면 바로 경영자 수업을 받을 생각이냐?”

“우선 사법 시험을 치르고,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니 졸업은 해야죠. 그다음 경영자 수업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회사가 당연히 네 것이라고 생각하는구나. 네 동생들이 많다.”

“파하하.”

“웃어?”

“경쟁이 없으면 안 되죠. 누구든 키워 주십시오.”

강운모 회장은 번뜩이는 수안의 눈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각오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기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당연히 이긴다는 자신감이었던가?’

수안의 생각은 약간 달랐다.

‘동생들이 잘 커야 그룹을 나눠 먹죠.’

“의욕만 넘치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회사에 필요 없다.”

“저는 회사를 바꿀 겁니다.”

‘이미 바꾸고 있습니다.’

“바꿔? 어떻게?”

“혁신적인 경영을 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야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이죠.”

‘혁신적인 경영을 도입하고 있답니다. 신기술도 애쓰고 있고요.’

“혁신… 말은 좋구나.”

“살아남는 것으로 끝내버릴 거리면 적당히 해도 될 겁니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퇴보나 다름없습니다. 직원들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할 겁니다. 우리 회사가 일류로 나아가려면 그 정도 마음가짐과 혁신이 필요합니다!”

삼디 그룹 총수가 나중에 할 말이었지만, 수안이 미리 써먹었다.

‘덕분에 우리 회사가 여기까지 왔답니다.’

강운모 회장은 수안의 말에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

수안의 생각이 자기 뜻을 넘어서 거창한 미래를 그려내고 있었다.

주변 누구도 이와 같은 목표를 말한 사람이 없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들다마다… 헙.”

강 회장은 저도 모르게 긍정하고 말았다.

“큼큼…. 어쨌든 우선은 대학부터 제대로 다니거라. 졸업 후 유학은 생각해 보기로 하고… 또 네 운전기사가 요청한 차량은 조만간 바꿔 주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이건 입학 선물이다.”

툭.

회장이 앞에 던진 것은 차명으로 만들어진 통장이다. 아직 금융 실명제가 발효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넉넉하게 넣었으니 쓰면서 살아. 누가 널 강운 그룹 적장자로 보겠느냐.”

통장에 기재된 숫자를 보니 아버지의 사랑이 진하게 느껴진다.

“귀한 돈 중하게 쓰겠습니다.”

아버지는 돈이 가장 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측근들에게도 함부로 큰돈을 포상으로 주지 않는다. 다른 기업 총수들처럼 높은 자리와 정해진 연봉으로만 보상한다.

그런 아버지가 돈을 내어 주는 일은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수안이 통장을 받아 나가고 나서 서재에 앉아 있던 강 회장은 피식 웃었다.

“돈을 줘도 아깝지가 않으니 원… 나도 마누라처럼 맏아들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군.”

* * *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수안은 통장을 다시 열어 봤다.

‘이걸 어디다 써야….’

통장에 기입된 돈은 대략 30억.

투자 회사에서 운영하는 거액에 비하면 푼돈이다.

거액의 돈을 줬다고 마음껏 써도 될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허투루 쓰면 이로 인해 자신을 재평가하는 기회로 삼을 분이다.

‘일부는 탕진, 일부는 투자.’

고등학생임에도 수안이 받아 온 용돈이 한 달에 수천만 원에 달했다.

30억의 돈을 일부 탕진한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였다.

쓰라고 했으니 쓰긴 써야 할 것이고, 투자해서 불리기도 해야 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 탕진이 우선이지.”

수안은 동생들 방으로 향했다.

“야. 다들 같이 나가자. 오늘 내가 쏜다.”

“뭐?”

“오빠가?”

“형이 뭘 쏜다고?”

수안은 동생들에 어머니까지 모시고 백화점으로 갔다.

괜히 다른 기업에서 운영하는 백화점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내 돈 쓰는데 뭐 하러 남의 기업 배를 불려 준단 말인가.

수안이 온 곳은 뉴월드 백화점 강남점이다. 예전엔 삼디 그룹 산하였지만 지금은 강운 그룹 계열사의 하나가 된 뉴월드 백화점이다.

삼디 전자는 속이 쓰리겠지만, 기어코 삼디 전자의 소유의 백화점을 인수하고 기존 강운 그룹 산하 백화점과 통합해 거대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정부 권력까지 사용해 뒤에서 힘을 썼기에 가능했던 성과였고, 이 일로 백화점 사장의 입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공고해졌다. 일부 뉴월드 유통 계열사가 고모님 밑으로 계열 분리를 시작하고 있지만, 백화점만큼은 그 분리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모님.”

수안은 미리 백화점에 연락해 뒀다.

연락하지 않았다 해도 강운 그룹의 안주인을 몰라볼 수가 없다.

“김 사장이 나와 있었구나? 바쁠 텐데.”

“당연히 제가 나와야죠. 사모님.”

뉴월드 백화점 김동우 사장이 직접 마중 나와 있었고, 수안을 향해서도 살짝 고개를 숙이며 눈웃음을 흘렸다.

‘밖에선 아는 척하지 말라니까.’

뉴월드 백화점을 가져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김동우 사장이 아니라 수안이었다.

수안이 뒤에서 밀어붙였고, 김동우 사장이 앞장섰다.

수안과 뜻을 함께하는 모든 강운 그룹 사장단이 이 일을 막후에서 지원했다.

이로 인한 모든 공은 김 사장이 가져갔지만, 수안은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VIP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가자. 얘들아.”

““네!””

강운 그룹 로열패밀리가 총출동한 날이다. 그날 뉴월드 백화점 강남점에서 일하는 전 직원이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수안의 얼굴이 많이 팔렸다는 것은 여기서도 증명되고 있다.

“강수안 선수다!”

“우아! 진짜 크다. 얼굴도 진짜 잘생겼어.”

“운동선수는 달라도 다르네. 딱 봐도 단단해 보여.”

고1에 183에 달하던 신장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지금 186까지 자랐다.

더는 크지 않아 수안도 자신의 성장이 끝났음을 알고 있었다.

그사이 틈틈이 훈련을 빼먹지 않은 덕에 근육은 더욱 탄력적으로 변해 두꺼운 옷 속에서도 전체적인 핏을 살리고 있다.

수진은 자신들을 따라오는 시선이 못내 불편한 모양이다.

“엄마. 오빠는 따로 다니라고 할까?”

“어차피 VIP룸으로 가면 우리밖에 없어.”

“아. 맞다.”

주변을 둘러싼 백화점 보안 직원들이 사인해 달라며 달려드는 사람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그래도 수안은 꺄악 소리를 지르는 여성들을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 주는 팬서비스를 잊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다음엔 꼭 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가족 모임이라 이해 바랍니다.”

* * *

털썩.

쇼핑에서 돌아온 수안은 진이 빠져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으으. 나중엔 따로 가야겠어.”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문제였다. 여자들이 쇼핑에 들이는 시간은 무지막지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수용과 의기투합한 수안이다.

“야… 다음엔 따로 가자. 여자들은 안 되겠어.”

“알았어. 형. 매번 쇼핑하면서 왜 저러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니까.”

수안도 쇼핑을 했다. 대학에 다니면서 입을 옷과 신발, 시계까지 많은 것을 구매했다.

어머니와 여동생들도 이런저런 물건을 구입했지만, 거기까지 돌아볼 여력은 없었다.

VIP 쇼핑룸에서 만족하지 못한 동생들이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거길 쫓아다니는 것만 해도 체력소모가 엄청났다.

‘수진이랑 수현이도 운동을 시켰어야 했나….’

타고난 체력을 가진 본인보다 쌩쌩하게 쇼핑하던 여동생들의 체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수입차도 하나 골랐다.

“수입차가 싸다는 생각이 들 줄은 몰랐는데….”

어머님이나 동생들도 수안이 고르는 차를 보고 딱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수안도 간단하게 차를 고르고 나머지 자잘한 절차는 수안을 보좌하는 배 실장이 알아서 처리했다.

수안이 운전면허를 취득하면 가끔 타고 다닐 차량이라 조금 늦게 온다 해도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오늘 많은 돈을 썼지만 그리 줄지 않은 돈에 있다.

“탕진하려면 한참 더 걸리겠네.”

절반 정도는 탕진하려는 생각이었지만, 고작 하루의 쇼핑과 자동차 하나로는 어림도 없었다.

“나머지는… 그냥 투자로 돌려야겠어.”

솔직히 그냥 탕진해서 써 버리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 돈이면…. 국밥이 몇 그릇이냐.”

여전히 금용으로 살았던 때의 소비 습관을 다 버리지 못했다.

생의 마지막 즈음에 통장에 남아 있던 5,300원의 돈이 여전히 그의 뇌리에 선명하다.

오늘 소진한 3억을 제외하고 나머지 27억의 돈은 땅과 주식에 분산 투자할 생각이었다.

“주식에 투자하려면… 강운 전자. 삼디와 은성도 괜찮겠지만, 강운이 최고다.”

어차피 대부분의 투자는 자신의 해외 투자 회사를 통해서 진행 중이다.

10억은 강운 전자를 매입하고, 나머지는 땅이나 건물을 매입하면 된다.

강운 전자 주가는 자신에 의해서 날아오를 것이 뻔했다.

향후 수백 배의 이익을 남겨 줄 주식이다.

“강남 그리고 신도시.”

강남에 건물을 매입하고 곧 시작할 신도시에 살짝 발을 담그면 남은 자금을 탈탈 털어 버릴 수 있었다.

“배 실장에게 사람 하나 더 데려오라고 해야겠네.”

본인이 직접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재벌이 괜히 재벌이 아니다.

개발이 예상되는 적당한 농지를 물색하고 강남의 건물을 매입하는 것은 능력 있는 사람을 써서 맡기면 그만이다.

능력 있는 직원이 일하는 사이 본인은 사법 시험을 준비하고 내후년에 열릴 올림픽을 준비하면 된다. 대강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다음 대 대통령이 금융 실명제를 시작한다는 것도 미리 알려야 하는데….”

1990년. 아직 현 대통령의 레임덕도 오지 않은 판국이다.

여소야대의 정국에서도 처음부터 5공화국을 청산한다며 전 대통령을 산골의 절로 유배 보냈고, 얼마 전 범죄와의 전쟁까지 선포하며 업적을 쌓고 있었다.

다음 대통령이 누구인지 짐작도 못 하는 가운데, 다음 대통령이 실행할 금융 실명제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에효… 지금부터 준비해야 금융 실명제 위기를 무사히 넘어갈 텐데….”

이 일로 재벌가의 차명 계좌가 문제 된다.

물론 사법부에 선이 있는 아버지는 다른 재벌들처럼 빠져나오겠지만, 상당히 귀찮은 일임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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