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그리고 대학
배영성은 수안 대신 해외 투자사를 운영하는 일을 겸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창구를 배영성에게 일임한 것은 아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얼굴을 비춰야 했다.
“내일은 일본 지사장 오는 날이지?”
“예. 일본 쪽도 급격한 성장으로 대규모 이익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련 보고는 일본에 파견된 차진호 지사장이 직접 보고할 예정입니다. 미국 쪽 이방효 지사장은 이번에 제가 대신 가져왔지만, 다음 분기에는 직접 와서 보고 드린다고 합니다.”
“됐어. 그때는 전쟁으로 변동성이 심해서 투자 회사가 바쁠 테니 이방효 지사장은 4분기 실적 보고 때 오라고 해. 내일 차진호 지사장 만나는 장소는 비서실 눈 피해서 잘 선택하고.”
“예.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모든 보고는 차 안에서만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눈을 피하고자 이렇게 어렵게 회사를 꾸려가고 있다.
직접 직원들을 마주하며 소유자를 확인시켜 주고 있으니, 나중에 얼굴을 내밀어도 어색하지 않을 터였다.
그들이 비밀을 엄수하고 있어 아직 수안이 소유한 투자 회사들의 원주인이 밝혀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수안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 미래는 아버지를 설득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신의 사람들이라야 가능했다. 그래야 수안이 지표가 가리키지 않는 엉뚱한 지시를 해도 이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아. 이대로만 계속하자고.”
지금은 1990년. IMF까지 7년이 남았다. 그 전에 충분한 총알을 마련해야 했다.
“…언제쯤 회장님께 공개하실 생각입니까?”
IMF가 선언되었다고 끝이 아니다. 그 이후까지 생각해야 했다.
“아직 정해진 것은 없지만, 최소 7년. 아니면 그 이상이야.”
“그동안은 계속 이 좁은 차 안에서 보고해야겠군요.”
수안이 생각해도 좁긴 좁았다.
외제 대형 세단 차량이지만 업무를 보기엔 걸맞지 않다.
하는 일은 그룹사 회장의 업무와 다름없는데, 몰래 하다 보니 이런 꼴이다.
“연예인들 타는 대형 밴이라도 사. 어깨는 펴고 살자.”
“회사에 건의해서 바꾸겠습니다.”
수안은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회사를 공개하면 배 실장은 사장부터 시작이야.”
“저는 지금 이 자리도 좋습니다.”
“사장 자리는 더 좋잖아?”
“하하하.”
수안이 확인한 보고서를 배영성에게 주며 다시 말했다.
“매번 말하지만 우린 주고받는 사이야. 요즘 시대에 맹목적인 충성이라니 말도 안 되지. 배 실장은 일한 만큼 돈을 받고 나는 그만큼 성과로 돌려받으면 그뿐이야. 알겠지?”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무작정 충성하렵니다.”
가난한 의사로 살아가던 배영성이다.
수안이 자신을 거둔 이후부터 고생하며 아들을 뒷바라지하던 모친을 편히 모실 수 있었고, 뒤로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그 뒤로도 부족함 없이 사는 것은 모두 수안이 자신을 선택해 줬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지금까지 보여 준 수안의 능력은 탁월함을 한참 뛰어넘었다.
특히 지금까지 강운 그룹을 막후에서 경영하며 보여 준 능력은 뛰어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여기에 더해 경영 일선에 있지 않음에도 강운 그룹의 사장단을 휘어잡고 있었고, 해외에선 투자의 신이나 다름없이 군림하는 수안이다.
강운이 아니라도 수안의 그늘이라면 얼마든지 자신을 바칠 수 있었다.
말은 편하게 할지언정 아랫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고 언제나 존중하는 자신의 고용주였다.
“으이그. 잇속을 잘 챙기라고 하는 말이야. 보고 끝났으면 얼른 자리나 바꿔.”
“옙!”
잠깐 신호가 멈춘 사이 좁은 차 안에서 운전자와 자리를 바꾼 배 실장이 운전대를 잡았다. 집에 도착해서는 배 실장이 차 문을 열어야 했다.
대외적으로 그는 여전히 운전기사였다.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임시 운전기사는 배 실장이 특별히 고른 경호원이었다. 입이 무거운 것은 물론이고 경호 실력까지 출중한 사람이다.
이 사람 역시 지금은 수안의 측근이었다. 비밀이 지켜지는 이유이기도 했고, 덕분에 사장단이 강운 그룹 비서실 눈에 띄지 않고 수안과 접선할 수 있었다.
“장호 형은 언제 장가가?”
“아이고 도련님. 그냥 장호라고 편하게 부르시라니까요.”
“여자는 몸만 데려와. 내가 신혼 살림 싹 다 넣어 줄 테니까.”
“푸흐흐. 저보다 배 실장님이 먼저죠. 순서는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배 실장은 아무리 말을 해도 데려오질 않잖아.”
배영성 실장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운전만 했다. 이런 대화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 봐. 듣고도 못 들은 척. 나이 서른일곱 노총각이 언제 결혼하려고 저러는지.”
“갑니다. 가.”
“저 소리를 몇 년째 듣는지 모르겠어.”
“실장님도 생각이 있으시겠죠….”
“올해는 제발 하나라도 만나 보자. 배 실장. 오케이?”
“도련님이 하도 일을 시켜서 여자 만날 시간이 없습니다.”
“그거 다 핑계라고. 우리 아버지는 뭐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 바쁠 때에 애를 줄줄이 낳았겠어? 아무리 바빠도 여자 만날 시간은 있는 법이야.”
“끄응….”
수안의 다른 말은 다 듣기 좋은데, 결혼하라는 잔소리만큼은 도통 적응이 되질 않는다.
모친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소리이기도 했다.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가….”
예상보다 빨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혈육을 잃는 것은 언제고 적응되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수안이 태어나고부터 할머니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던가.
누가 보면 수안이 막내아들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장례식장에서 구슬프게 곡을 했던 수안이다.
수안은 1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한 말을 떠올렸다.
“남자는 결혼을 해야 남자 구실을 한다고 입이 닳도록 얘기하셨다 이 말이야.”
“…치마만 두르면 됩니까?”
수안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라도 아무나 데려오고 싶은 심정이다.
“배 실장 군인이야? 치마만 두르면 여자야? 선량하고 지혜로워야지. 자고로 여자가 잘 들어와야 집안이 화목한 법이야. 배 실장 집안이 평안해야 회사에서 일도 잘할 거 아냐?”
“…그런 조건의 여자를 찾기가 쉽습니까?”
“쉬웠으면 배 실장이 벌써 결혼해서 나만 한 애가 있었겠지. 배 실장이 스무 살에 결혼했으면. 어휴. 나랑 두 살 차이밖에 안 나겠네. 지금 결혼해서 애 낳아도 걔가 대학 들어가면 환갑이야. 얼른얼른 찾으라고.”
“끄응….”
“도련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하하하.”
최장호의 말에 슬쩍 눈치를 준 배영성의 입은 다시 꽉 다물어졌다.
* * *
수안은 학력고사를 치르고 한국대 법학과 합격이 확정되었다.
아버지 찬스를 쓰지 않은 순수한 수안의 능력이고 성과였다. 그것도 수석 입학이다.
덕분에 동생들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오빠가 거길 수석으로 들어가면 난 어쩌라고!”
이제 고3이 될 첫째 여동생 수진이가 불만을 표하다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았다.
찰싹.
“아야!”
“오라버니가 한국대에 들어갔으면 축하는 못 할망정 초는 치지 말아야지.”
“축하해. 오빠.”
“축하해. 형.”
둘째와 막내는 수진이가 당하는 것을 보고 목까지 올라온 불만을 꿀꺽 삼켰다.
‘영악한 놈들.’
이제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한 동생들은 은근히 장남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형을 제치고 총수 자리를 틀어쥔 아버지의 피가 어디 가는 것이 아니다.
어려서는 잘 따르던 놈들이 슬슬 자신의 몫을 챙길 생각을 하며 수안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래봤자 수안에겐 어리게만 보였다.
‘어련히 알아서 챙겨 준다, 요놈들아.’
혼자서 독식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면 미웠을지도 모른다.
동생들을 살뜰하게 챙겨 줄 마음이었고, 이미 강운 그룹을 휘어잡은 것과 다르지 않기에 동생들의 불퉁거리는 태도가 가소로운 것이다.
“고맙다. 너희도 어렵지 않을 거야. 과외 선생이 몇이나 달라붙었는데, 제대로 된 대학에 못 가면 말이 안 되지.”
“아으….”
“에효….”
첫째와 둘째 여동생 수진과 수현의 표정이 썩어들어간다.
이제 중3인 막내 수용이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에 안심하는 듯했다.
“특히. 수용이 너. 수진이랑 수현이까지 아버지가 한국대 보낼 생각은 없을 건데, 너는 꼭 가야 해.”
“나? 내가 왜?”
“아버지 아들이 나 하나야? 이게 왜냐고 물을 일이야? 생각은 하고 사는 거냐? 머리에 달린 건 장식이야?”
수안은 손가락으로 수용의 이마를 밀며 몰아붙였다.
수용은 함부로 대들 수도 없었다.
운동으로 단단히 단련된 근육질의 거대한 형이다.
어려서부터 누나들에겐 대들었어도, 형에겐 꼼짝도 못 했다.
“으윽.”
“수안이는 동생들 스트레스 주지 말고….”
“예. 어머니.”
“법학과라면 사법 시험을 볼 생각이니?”
“예. 아무리 전직 법관과 전직 검사들을 직원으로 쓴다지만, 직접 배워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저도 알 건 알아야 현직 칼잡이에게 제대로 지시를 하죠.”
칼잡이. 검사를 이르는 말이다.
“회장님은 성과 없는 노력 싫어하시잖아. 알지?”
“다음 올림픽 전에 사법 시험부터 패스할 생각이에요.”
“호호. 장남이 말하면 의심 하나가 안 들어.”
“사실이 될 테니까요. 하하하.”
“으. 재수 없어.”
수진은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툴툴거리고 있었다.
‘다 들린다. 이것아.’
* * *
강운모 회장이 집으로 돌아오자, 수안은 어깨를 펴고 서재로 들어갔다.
“약속 지켰습니다. 아버지.”
“약속은 당연히 지켜져야지.”
당연하다 하시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숨기지 못하는 아버지셨다.
‘츤데레 같으니.’
“사법 시험도 치르겠습니다.”
“붙을 자신은…. 물어볼 필요도 없는 말이었구나.”
강운모 회장도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이 대학 과정까지 배운 것이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일이다.
“다음 올림픽 전까지 합격하고 그다음 올림픽 출전하겠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IOC 후원사가 되어야 해야겠군.”
“동계 스포츠 쪽도 후원해 주십시오. 미리부터 준비하시면 큰 효과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90년은 김연하가 태어난 해였다. 아직 멀었지만, 처음부터 제대로 된 기반을 마련해 주고 싶다.
수안은 연하가 준비된 환경 속에서 제대로 꽃을 피워내길 바라고 있었다.
준비된 피겨 스케이팅 전용 아이스 링크에서 풍족한 주변 환경을 만끽하며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김연하가 무척 기대됐다.
“빙상이면 나쁘지 않지.”
쇼트트랙을 떠올리는 강운모 회장이지만 수안의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피겨도 노려보시면 추후 큰 성과를 얻으실 겁니다.”
“피겨? 넌 무조건 최고만 바라는구나.”
하계 올림픽의 꽃이 마라톤과 100m 종목이라면, 동계 올림픽의 꽃은 바로 피겨 스케이팅과 쇼트트랙이 있었다.
“그저 제안일 뿐입니다. 스포츠 후원은 기업의 마케팅 수단일 뿐이니까요.”
“고민해 보지. 피겨 쪽은 전무할 텐데… 나중에 성과가 나온다면 나름대로 메리트는 있겠구나.”
수안은 이 정도 답만 들어도 충분했다. 아버지가 하지 않으면 자신이 하면 된다.
“그리고 요즘 네 얘기를 밖에서 많이 듣는다.”
“……!!”
‘설마… 들켰나?’
자신이 계열사 사장들을 만나는 일이나 운영하던 투자 회사가 들킨 건 아닌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너도 귀가 있으니 들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당연히 알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떨리는 심정으로 아버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